'우리시대' 19번의 빈자리

한국 인문학 발전을 위한 참신한 결단들

등록 2001.02.26 17:30수정 2001.02.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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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순서대로 매겨지는 번호에서 중간에 이가 빠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눠지는 것 같다.

은퇴하는 불세출의 스타를 기리기 위해 그 선수가 달았던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하는 것이 그 하나요, 뭔가 문제가 있어 불가피하게 그 번호를 없애야 것이 또 다른 하나이다.


앞의 것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귀감의 상징이지만 뒤의 것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경고의 상징이다. 최근 우리 출판계에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경고의 상징으로 일련의 번호에서 한 번호가 영구히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출판사상 전후후무한 일

이미 신문에 보도가 된 터여서 내용을 알고 있을 독자들이 있겠지만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해 간단히 전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출판사 책세상이 인문학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문고 '우리 시대'의 19번 「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의 글쓴이 정기도(서울대 대학원 철학박사 수료) 씨가 이화여대 철학박사 출신으로 미국 스탠포드대 박사 후 과정 수료중인 여명숙 씨의 박사학위 논문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존재론과 그 심리학적 함축'(1999)과 또 다른 논문 '사이버문화의 형이상학적 기초'(한국정보과학학회지 1999년 8월)의 상당 부분을 글쓴이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도용, 표절하였다는 것.

이같은 사실을 여명숙 씨로부터 전해 들은 출판사측은 여씨로부터 문제의 논문을 건네받아 확인하고, 또 정기도 씨로부터 이같은 사실을 확인 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정씨가 여씨에게 공식 사과한다.


아울러 출판사는 한국 인문학의 장래와 출판문화의 새로운 풍토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이 책을 전량, 회수하여 폐기함은 물론 절판을 통해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에서 영구히 삭제하기로 결정한다. 이 시리즈 19번은 결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출판사는 책 회수에 들어가 현재 1200부 정도가 회수된 상황이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글쓴이들은 물론 출판사측의 수습 과정은 기존의 출판계 관행에 비춰 뭔가 새로움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론 이 일은 출판 사상 전후후무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만이라면 내가 굳이 칼럼까지 써가며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론은 이제부터다.

이해당사자들의 용기있는 행동

출판사측은 이같은 사실을 공식적으로 자사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것은 물론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배포해 공론화했다.

여기서 나는 출판사는 물론 특히 글쓴이를 비롯한 이해당사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동(?)받았다.

사실 표절의 장본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낸다는 것이 단순한 용기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학도의 장래가 걸린 문제이기에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판사 역시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서점에서 잘 팔리고 있는 책을 회수하여 전량 폐기함으로써 생기는 경제적 손실은 차치하고라도 이 기획은 물론 출판사 이미지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출판사 기획편집 책임자나 이해 당사자들 모두 서로 사적으로 잘 아는 사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결정은 또 다른 의미를 띠고 있음을 발견한다. 시쳇말로 서로 아는 사이인데 내부적으로 쉬쉬하고 넘어가도록 수습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아주 어려운 결정을 했고, 우리는 지금 그들의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즐기고(?) 있다. 나는 확신한다.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 19번의 빈자리는 '양심적 학문 연구'를 상징하는 훈장으로 기능할 것이고, 용기있는 젊은 학자는 앞으로 보다 나은 성과물로 독자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으리라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글쓴이 쉘 실버스타인의 '이가 빠진 동그라미'라는 책처럼 이가 빠진 조각을 찾아 끼운 동그라미가 너무 빨리 굴러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해 다시 조각을 내려 놓듯 '우리시대' 역시 이가 빠진 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늘 겸허한 마음으로 애초에 이루려고 했던 목표 달성을 위한 채찍으로 삼아 분발하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데일리 인터넷 북리뷰 부꾸(www.bookoo.co.kr) 2월 26일치에 실려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데일리 인터넷 북리뷰 부꾸(www.bookoo.co.kr) 2월 26일치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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