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폭력은 분노를 불러오며 저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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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shu95)등록 2001.04.22 14:02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불행한 가난한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끊을 수 없으리라.
(사형선고를 받은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 스파이즈의 법정 최후진술)

폭력은 분노를 불러온다!
(4월 10일 대우 자동차 노조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에 대해)



폭력은 분노를 불러온다. 당장에야 두려움이 동반되겠으나, 그 폭력이 정당하지 않을 때 - 하기야 정당한 폭력이 존재할까 - 두려움은 잠시이고, 당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한 민중에게 가해지는 폭력일 때 문제는 달라진다.

민중에 대한 폭력은 잠깐 동안의 두려움이 사라진 후 분노로 변한다. 민중에 대한 폭력은 분노로 돌변하며, 이는 곧 저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폭력의 규모가 클수록 분노와 저항이 커지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저항의 몸짓으로 변해 정권이 무너지고 혁명이 도래하여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우리는 역사속에서 쉽게 발견하곤 한다. 이제 곧 혁명의 5월이다.


4월 10일 대우차 사태

김대중 정부는 이런 단순한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지난 4월 10일 대우자동차 노조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 소식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말로만 '국민의 정부'이면 정권의 정체성이 찾아지는 줄 아는가.

이름을 바꾸길 간곡히 권유한다. '기업의 정부', 또는 '가진자의 정부'라고 하는게 차라리 낫겠다. 지난 4월 10일 노조 사물실로 들어가기 - 이미 인천지방법원의 판결에 의해 '노조사무실 출입방해금지 가처분결정'이 내려진 상태였다 - 위해 대치중이던 대우자동차 노조원들은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어지고 반신불수에 언어장애증상의 피해를 보았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밥줄, 일터를 잃어버려 분노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곤봉과 방패로 내리 찍히고, 군화발로 짓이겨지는 폭력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촬영한 비디오를 보면서 80년대 광주항쟁의 현장을 담은 비디오의 한 장면이 필름처럼 내 머리속을 스쳐가는 건 나만의 과잉반응일까.


분노는 저항의 밑거름이 된다

도대체 자신의 생존권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를 막는다는 것 자체가 과연 가능한지를 묻고 싶다. 그리고 대우자동차 문제의 책임자가 과연 누구인지를 묻고 싶다.

누군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는가. 그래 최소한은 하루 아침에 정리해고 당해 밥줄이 끊겨 목숨을 내놓아야하는 노동자들에게 올 4월은 기억하기도 싫은 잔인한 달일 것이다.

그러나 현정권은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4월과 5월은 우리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저항의 몸짓이 가장 컸던 시기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40여년전 4월의 혁명은 정권을 바꿨으며, 20여년전 5월의 광주는 결국 전두환 정권이 살인 정권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광주의 피를 빨아먹고 탄생한 정권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곧 5월 노동절이다. 100여년 전 사형언도를 받은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의 절규가 21세기 한국사회에서도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각성하라! 폭력은 분노를 불러오며 이는 곧 민중에게 두려움 없이 저항하게끔 하는 밑거름이 된다. 당대의 문제가 당장에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책임을 후대로 넘길 때 우리는 이미 역사앞에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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