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5월 투쟁 '죽음의 릴레이'를 옆에서 슬픔과 분노로, 공포와 절망으로 지켜봐야 했던 이들이 10년간 곪아왔던 자신의 상처를 '헤집기' 시작했다.
91년 5월 투쟁은 80년대와 90년대의 중첩과 단절을 낳았다. 분신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자기희생의 저항은 90년대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분신을 택한 이들은 유서를 통해 자신의 희생으로 투쟁이 보다 강하게 확대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그렇게 '분신한 자'는 떠났고, 이를 지켜봐야 했던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의 무력감으로 상처받아야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동안 침묵했다. 10년이 지난 오늘 그들이 말문을 열었다.
분신, 분신...무력감으로 지낸 시간들
"그때 받았던 상처 때문에 그 동안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없었다. 부담스럽고, 나서서 얘기하기도 뭐하고... 이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10주년이라는 것 때문은 아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만든 것 같다."
91년 당시 인하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김윤철(서강대 정치학 박사과정. 33) 씨는 현재 '91년 5월 투쟁 10주년 사업을 준비하는 청년모임(이하 청년모임)'대표를 맡고 있다. 김씨가 10년전의 상처를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청년모임' 때문이었다.
'청년모임'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91년 5월 당시 학생회 간부 등 책임을 지고 있던 활동가들이다. 따라서 학교나 학번은 다르지만 당시 '열사정국'으로 인해 한결같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같이 모여서 얘기하니까 객관화되고 서로 위안이 되고, 나만 상처받은 것은 아니구나 하니까 말하기도 편했다."
술 한잔 기울이면서 푸념처럼 털어놓을 법한 얘기 같지만 김씨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술자리에서 더 조심스러워진다. 감정에 복받쳐 하는 말들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에...
신촌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약간 긴 듯한 반곱슬머리에 거친 턱수염의 그는 서강대 대학원 연구실에서 막 나온 상태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김윤철 씨는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4월 26일 강경대 열사가 죽던 날 새벽 마침 서강대에서 총학생회장들 회의가 있었어요. 우리는 낮에 있었던 강경대 사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했고 각 학교에 돌아가 투쟁을 조직하기로 했지요."
강경대 학생이 5명의 백골단에 의해 타살됐을 때까지도 5월 투쟁과 열사정국을 예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돌아가 경찰의 쇠파이프 폭력으로 명지대 학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자 많은 학생들이 분노했고 이를 규탄하는 집회도 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총학생회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전남대총학생회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4월 29일 박승희 학생이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잊지 말자"며 분신한 것이다.
"전화 받고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슬픈 게 아니라 절망적이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날 마침 집회가 있어서 그런 심경을 연설했어요."
김씨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린 후배가 죽었다는 것이 제겐 충격이었어요. 유서를 전화로 받아 적는데 박승희 열사의 치열한 고민을 접하고 나니 비장감마저 들더라구요."
박승희 학생에 이어 '분신'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5월 25일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 진압에 의해 질식사한다.
"그날 비가 많이 왔어요. 동국대로 쫓겨 들어갔는데 경찰의 침탈 위험이 있다고 해서 회의를 하기 위해 학교 근처 조그만 술집으로 갔지요. 막 술을 시키고 있는데 저 쪽에서 한 여학생의 절규가 들리더라구요.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하면서 우는 거예요."
김씨는 언제부터인가 말을 하면서 계속 몸을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목소리도 처음보다 많이 가라앉았다.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듯했다.
"그 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 당시 투쟁을 만들어가야 할 우리들이 정신적으로 상처와 압박, 부담감에 엄청나게 힘겨워했지요."
5월 투쟁은 그렇게 살아남은 자에게 부담만을 남긴 채 시들어져 갔다. 김씨는 6월에 구속된다.
"감옥에서 몸이 많이 아팠어요. 그 때 반성이 되더라구요. 무력감도 느끼고, 더 이상 책임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물론 사회적, 국가적 억압도 있었지만 친구와 후배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상처를 남겼죠."
감옥에서 나온 김씨는 학생운동을 떠났다. 91년 5월 투쟁이 남긴 교훈 때문이다. 김씨는 기층 민중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운동을 만들어내겠다고 결심하고 인천으로 향한다.
"인천에서 있을 때 그 곳에서도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죠. 그런 과정을 겪고 나니까 이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93년 어느 날, 그는 신촌에 있는 '오늘의 책'이라는 서점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 서점 한편에 김귀정 열사 추모시집이 보여서 무심코 꺼내 읽었는데 첫머리에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상권아, 네 애인 죽었다.' 그 책 읽는데 막 눈물이 나더라구요. 대낮에 서점에 앉아 그렇게 눈물을 쏟아 놓았죠."
그 뒤로 김씨는 '91년 5월 투쟁'에 관한 어떤 글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자신의 친구인 김정한(서강대 정치학 박사과정) 씨가 98년에 쓴 '91년 5월 투쟁' 관련 책도 지금껏 한번도 제대로 읽지 못하다 지난해 '청년모임'을 시작하면서야 읽었다고 한다.
"그런 무력감으로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왔으니 힘있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죠. 심리적인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아요. 10년이라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심리적인 정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그는 3년 전에 결혼했고 아이도 한 명 있다. 아직 공부를 다 마치지는 못했지만 벌써부터 생계 걱정을 해야 할 형편이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 남겨진 과제가 있다.
"청년모임을 통해 집단적인 자기 고백의 공간을 제공하고 다른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청년모임'이 만들어지면 한 발 뒤로 물러서 도와주는 역할만을 하겠다는 처음 계획을 수정하고 '91년 5월 투쟁 10주년 사업'을 가장 앞서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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