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남자들끼리만 놀다 오자

'세 남자의 여섯 아이 보기' 그 이후

등록 2001.04.27 16:20수정 2001.04.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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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동민이네 집에 가스오븐을 새로 들여놓았습니다. 아직 한 번도 오븐이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없는 혜지네와 우리 가족은 오븐요리 한번 먹어 보자는 핑계로 동민이네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몇몇은 돼지고기를 굽고, 채소를 씻으며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또 다른 몇몇은 아이들과 물감놀이를 하느라 온 집안이 들썩거립니다.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을 때까지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부모들은 아이들 밥 챙겨 먹이느라 정작 오븐요리의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얘들아,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니까 장난감 정리하고 나와라.”
“안돼요. 우리 조금밖에 안 놀았단 말예요.”
“아빠,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돼요?”

밤이 깊었지만 아이들은 집에 갈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어른들도 다들 아쉬운 표정이더니 결국 아이들 핑계로 주저앉고 맙니다. 다시 한잔씩 술이 도는 동안 지난 번 여자들만의 늦은밤 외출 사건이 떠올라 이번에는 남자들만의 외출을 요구했습니다.

여자들은 얼마든지 그래도 좋다며 흔쾌히 대답합니다. 여자들끼리 외출한다고 했을 때 남자들의 미지근한 반응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확연해서, 이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남자 셋이 바깥으로 나와보니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술은 서로가 기분 좋을 만큼 마셨고, 또 남자들은 나가 봐야 술집 말고는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싫어서 술집말고 다른 곳을 찾기로 했습니다.

당구나 볼링 같은 게임은 셋 중에 꼭 한 사람씩 못하는 사람이 있어 셋이 함께 즐길 만한 것이 못되고 해서, 고민 끝에 요즘 인기 있다는 ‘친구’라는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심야상영을 하는 극장을 찾아 남자 셋이 영화관에 들어갔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객석은 많이 비어 있었고, 우리 말고는 모두 연인들끼리 온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선 시각이 밤 1시, 남자들은 빨라도 새벽 3시 이전에는 들어가지 말자고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지난 번 여자들이 집에 들어 온 시각이 새벽 3시였는데 그보다 빨리 들어가면 체면이 안 선다는 이유였습니다.


실내 야구장에서 어설픈 박찬호 흉내도 내보고, 오락실 입구의 펀치를 놓고 한번씩 주먹을 날려보기도 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그 늦은 시간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뿐이었습니다.

결국 나올 때의 다짐은 포기한 채 집으로 가는 길에 발견한 작은 바에 들어갔습니다. 탁자는 따로 없었고, 긴 테이블에 남자 셋이 나란히 앉아 맥주를 한 병씩 주문했습니다. 종업원인 듯한 젊은 여자는 문 닫을 시간 다 되어 들어온 남자 손님들에게 싫은 내색 없이 말을 건네 왔습니다.

“아저씨들 결혼하셨어요?”
“아뇨, 우리가 유부남처럼 보여요?”
남자들은 하나같이 뻔뻔하게 총각이라고 잡아뗐습니다. 하지만 대화 도중에 아이들 이름이 하나둘씩 자연스레 흘러나왔고, 결국 젊은 여자는 남자 셋이 이 밤중에 거리를 떠돌게 된 사연을 다 알아버렸습니다.

“이제 문 닫을 시간이니 그만들 드시고 부인들께 어서 가세요.”
젊은 여자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고 있는 남자 셋을 내쫓았고, 남자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제 시간도 거의 다 됐으니 슬슬 걸어서 집까지 갈까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남자들은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밤 공기가 차가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거실에서는 여자들이 이불 하나 펴놓고, 앉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직 안 잤어?”
“남편들을 물가에 내보내 놓고 잠이 와야 말이지. 그래 재미있게 놀았어?”

남자들 기다리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밤새 수다떠느라 그랬는지 판단이 잘 서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까지 안 자고 기다려준 여자들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자존심 내세우며 밤거리를 헤매고 다닌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이 우습게만 생각되었습니다.

퇴근하고 나서 남자들끼리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 주변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부부끼리 혹은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더욱 좋구요. 밤 늦은 시각 거리를 떠돌면서 깨달은 것은, 가족들 모두가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단순한 진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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