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崇禮門)의 분노

만시지탄(晩時之歎)을 모르고 포호빙하(咆虎馮河)하다니...

등록 2001.04.28 11:01수정 2001.04.28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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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는 개성(開城)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제일 먼저 경복궁과 종묘(宗廟)를 건축하고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으로 하여금 경복궁을 중심으로 사방에 도성(都城)을 쌓게 했다.

그리하여 1396년, 동서남북의 4대문(四大門)과 그 사이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축조해 서울의 성곽(城郭)을 모두 8대문으로 건축했다.

4대문이란 정동(正東) 방향의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 정남(正南)의 숭례문(崇禮門 : 南大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 西大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 : 北門)을 이름이고, 4소문으로는 동북(東北)의 홍화문(弘化門 : 東小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 水口門), 서남(西南)의 소덕문(昭德門 : 西小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 紫霞門) 등을 일컫는다.

이 8대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이 바로 숭례문이었다. 그것은 당시 정남에 위치하여 사람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국, 일본 등 외국 사신들이 자주 출입하는 서울의 관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8대문 중, 유난히 숭례문 만큼은 웅대하게 건축했다. 두 날개를 가진 독수리 같은 형상으로 웅장하게 건축했던 이 숭례문은, 태조 5년(1396) 9월에 착공하여 태조 7년(1398) 2월이 되어서야 비로서 완공을 보았다. 이렇게 공사 기간이 비교적 길었던 이유는, 기술과 시일을 요하는 월단(月壇)과 문루(門樓)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다른 문들은 현판의 글씨가 모두 가로로 쓰여 있는 반면, 유독 숭례문의 현판만은 세로로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 그 까닭은 무엇일까?

전해 내려 오는 설(說)에 의하면 즉, 숭례문은 서울의 정문인데, 외곽 남쪽 관악산(冠岳山·629m)이 본래 화산(火山)으로서 화기(火氣)가 성해, 상대적으로 그에 대항하는 기세가 약하여 그 화기를 막아내기 위해, 관악산 중턱에 큰 물동이를 묻고 경복궁 앞에는 불(火)을 먹는 해타(海駝·해태라고도 함)를 만들어 세우는 한편, 음양오행설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로 현판을 세로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문의 이름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지은 것은, 우리 나라가 예(禮)를 숭배하는 동방예의지국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숭례문의 글씨에 대해서도 누가 썼는지에 대해 말이 많다. 어느 책에는 태종 때의 명필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글씨라고도 하고, 또 다른 책에는 중종 때의 공조판서를 지낸 죽당(竹堂) 유진동(柳辰仝·1497∼1561)의 글씨라고도 하지만,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의 글씨로도 알려져 정확한 고증(考證)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 숭례문의 현판을 잠시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것을 당시 청파역(靑坡驛·지금의 청파동) 배다리 밑, 흙탕물 속에서 찾았는데, 그 사연인즉, 동네 사람들이 밤만되면 다리 밑에서 이상한 서기(瑞氣)가 비쳐 아래로 내려가 보니 현판이 거기에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모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용케 견뎌냈던 숭례문은 구한말(舊韓末)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에 의해 모진 수난을 겪는다.

1908년, 당시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으로 초청됐는데, 일본 황태자의 마차(馬車)가 숭례문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크자, 서쪽 성벽을 헐어내자는 일본측의 주장으로 결국 성벽을 헐어내고 큰길을 내서 일본 황태자의 마차를 통과시켰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그 다음해 1909년에는 동쪽의 성벽마저 헐어버려, 그야말로 숭례문은 그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던 모습과, 두 날개를 가진 독수리 같은 형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천재지변도 아니고, 5백여 년 동안이나 민족의 상징으로 이어져 왔던 서울(漢陽)의 성벽을, 일본의 일개 마차 한 필을 통과시키기 위해 그렇게 쉽게 헐어 버리다니. 우리 나라의 '두 날개'는 그렇게 힘없이 꺾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 숭례문은 국보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것도 1934년 남쪽의 일본인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남대문'으로 이름을 바꿔 일제가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국보 1호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것을 지난 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하면서 다시 '숭례문'으로 명칭은 환원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국보 1호도 새로 정하자"는 당시의 여론은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요즘 일본은 '교과서 왜곡'으로 자국(自國) 뿐 아니라 주위 국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만시지탄(晩時之歎)을 모르고 포호빙하(咆虎馮河)하고 있는 것이다.

숭례문은 말이 없다. 하지만 '분(憤)'을 삭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일본이 명철보신(明哲保身)해 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숭례문의 얘기를 써 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위 칼럼은 5월 9일 '강남내일신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위 칼럼은 5월 9일 '강남내일신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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