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골수마저 빠져버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친구야! 우리 사는 것이 힘들고 가파를 때...

등록 2001.04.28 21:21수정 2001.04.2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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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밤 늦은 시간에 수화기로 들려오는 네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푹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어.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다 떨어져가면서 내는 울음소리 같은 것이 아마 그런 목소리였을 거야.

넌 아마도 어디 골목길을 접어들다가 쓴약 같은 소주 한 잔 걸쳤을 거야. 값싼 안주도 시키지 못하고 막소주를 마셔야만 하는 네 마음은 귀퉁이 닳은 의자에라도 기대고 싶었을 거야. 꿩알 같은 백열 전등에 가난한 마음을 걸쳐놓고 얼마나 남모를 눈물을 흘렸니?


일 년 전 꼭 오늘 같은 시간에 너는 나에게 전화를 했었어.
"친구야! 나 직장 그만 두었다. 더이상 이놈의 밥통 못 차고 있겠어."
아마 그때도 오늘처럼 길 모퉁이 선술집에서 소주를 마시다 전화 했을 거야.
"그래, 너 참 잘 그만 두었다. 네 싱싱한 풋기 다 뺐기기 전에 잘 그만 두었어. 너 능력 있는 놈이잖어? 세상 겁나는 게 뭐 있어? 축하해."

무소식이 희소식이길 바랐는데 곁가지 돋는 것처럼 무심하게 들려오는 너의 소문들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었어. 얼마되지 않는 퇴직금에다 전세금까지 주식투자로 다 날려버렸다는 소식들을 듣고 나는 무슨 말을 하여야 할 지 몰랐어.

너 자신에 대한 무참함에 가까운 친구들과는 소식도 끊고, 너를 가장 이뻐하셨던 아버지 칠순잔치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야 나는 알았어. 네가 얼마나 무겁고 두려운 생의 등지게를 짊어지고 사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까맣게 잊고 지내다 골수가 빠진듯한 목소리를 듣고 갑자기 목이 메이는 것은 왜일까? 보고 있던 시집의 표제글씨가 흔들려오는 것은 왜일까?

아마 너의 잠들어가는 목소리를 깨워주지 못한 나의 가난이 슬펐을 거야. 당장 달려가 시린 너의 등받이가 되어주지 못하고 힘빠진 네 어깨와 동무하지 못하는 현실이 아팠던 거야.


얼버무리는 너의 전화번호를 간신히 받아 적고 난 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어. 이제사 조금 평온하게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를 듣고서 나는 왜 갑자기 푸르디푸른 보리밭 물결이 생각났는지 몰라. 그 옛날 우리가 살았던 마을 앞 보리밭 사이 좁은 길들이 생각났는지 몰라.

언땅을 뚫고 나오는 여리디 여린 새 보릿순을 생각한 거야. 한겨울 눈발 속에서도 그 생명의 줄기는 질기디 질겼어. 살을 에는 바람과 숨통을 끊어버릴 듯 차가운 눈발이 보리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자양분이었던 거야.


친구야!
어릴적 겨울날 생각나니? 너와 나는 경쟁적으로 토끼를 키웠어. 토끼풀이 없는 추운 겨울에 들밭으로 보리 뜯으러 갔던 추억 말이야. 왜 그때는 눈이 그렇게도 많이 내렸는지 몰라.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을 걸어서 변변한 장갑도 없는 맨손으로 눈을 헤치고 보리를 뜯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어.

그리고 빨간코를 문질러가며 네가 했던 말들은 내 기억 속에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꿰어져 있어. 이십 년도 훨씬 지났는데 말이야.

"아따, 이런 눈 속에서도 안죽고 살아있응께 영양가가 높은가 보다잉? 그라고 영양가가 높은께 보리 방구 소리도 크겄제?"
은근슬쩍 방귀 소리가 컷던 네 녀석 변명이 생각해보면 얼마나 웃겼던지 몰라.

우리들에게도 어김없이 봄은 왔어. 학교가 파하면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집에 올 때면 너와 나는 시인처럼 보리피리를 꺾어 불며 먼 길의 지루함을 달랬어. 어떤 애들은 영어단어를 외우며 다녔다고 하는데 왜 우리들은 보리 모가지를 꺾고 노는 못된 해찰을 부렸는지 몰라. 그러면서 너는 곧잘 뜬금없는 소리를 하곤 했지.

"속도 비어있는 놈이 모가지는 빳빳하게 쳐들고 있네? 그렇게 밟고 다녔는디 뭔 힘으로다 저렇게 꼿꼿한데냐?"
"그라고 저 보릿대들은 말라삐틀어져도 고개 숙일 줄 모른당께. 지가 뭔 똥빼라고 그란지는 몰라도 자존심이 무척 센 족속인가벼?"

나는 그때 네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공부도 너보다 훨씬 잘한 내가 감히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너는 별 것도 아니란듯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사물을 보는 따뜻하면서도 깊은 마음이 한없이 부러웠던 거야.

친구야!
왜 그런 일확천금의 속성에 빠져 들었니? 왜 땀 흘리지 않고 쉽게 돈을 벌려고 그랬니? 하면서 너의 잘못을 꾸짖을 수가 없었어. 이 혼돈의 세상이 너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누구나 실수는 있기 마련인 것이야. 그 실수가 먼 훗날 너의 큰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가까이서 너의 아픔을 덜어주지 못하고 우스갯소리 같은 보리 이야기만 하다보니 전화가 갑자기 끊어져 버렸어. 많이 취한듯 다시 전화는 걸려오지 않고 서둘러 불러받은 번호를 눌러보았으나 발신음만 길게 이어지고만 있었어. 독한 술로 삭혀보려는 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쓸데없는 소리들만 늘어 놓았나봐.

오는 일요일에 고향집에 가야해. 서로 맞보고 있는 너희집과 우리집을 가려면 언제나처럼 보리밭길을 거쳐야 하겠지만 이번만은 그냥 무심코 지나치지는 못할 거야. 출렁이는 보릿물결 속에서 자꾸만 밟혀오는 너의 지친 얼굴을 바라볼 수가 있을런지 몰라. 너의 무거운 등지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못한 부족함을 어떻게 삭혀내야 할까? 나 또한 깊은 자책에 빠져들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친구야!
우리 다시 일어서자. 이대로 무너져버리기에는 우리의 젊음이 너무나 아깝잖아? 네가 말했던 것처럼 골수 빠진 보릿대가 꼿꼿하게 하늘을 받치고 서 있는 것을 바라보자. 칼바람에 베이고, 시린 눈발에 머릿결이 얼어터지고, 무거운 발길에 밟혀도 꿋꿋하게 허리를 펴고 솟아나는 보릿대를 생각해 보자구.

불볕 더위에 타들어가도 기개를 꺾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보릿대를 쳐다보고 다시 일어서 보는 거야. 그리고 어느날 보란듯이 세상을 향해 황금빛 알곡을 터트리는 보릿대와 같이 너의 굵은 땀방울을 세상에 터트려 보는 거야.

보리

봄 가뭄 끝
몸을 낮춘 보리밭에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보릿대는
바람의 모양을
선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려내고 있다

골수 없는 관절이지만
머릿털 꼿꼿한 저 기개를 보라

이 마른 바람이 지나면
붓대를 꺾어 버리고
불볕에 스러질 육신인데

보릿대는
금빛으로 넘치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친구는 어디에도 부리지 못하는 생의 무거운 등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친구로서 그의 등짐을 덜어주지 못하고 이 짧은 졸시 밖에 바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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