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여 이주노동자와 2000여 저소득층 사람들, 그들의 미래에 대한 꿈은 암울한 삶 속에서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어딘가에 버려지고 있다”
프롤로그
8차선으로 시원스럽게 뚫린 산업도로 39호선. 안산선 전철을 뒤로 과거 70~80년대 개발시대의 상징인 반월과 시화공단이 자리잡고 있다.
도로를 가로질러 100여개가 넘는 많은 연립주택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도로변의 번듯한 연립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실상은 달라진다. 10년이상 노후된 연립 수십여 동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야 가느다랗고 노란 도시 가스관이 주택의 벽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택을 돌다보면 유난히 1층 창문 아래로 일반 가정용 가스통들이 눈에 많이 띈다. 가스통의 호스는 어김없이 지하로 연결돼 있다. `벌집'이라고 불리는 이들 연립 지하방에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먹고, 자고, 살고 있다.
2001년 4월. 국내 최대의 공업단지 중 하나인 반월·시화공단 인근에는 수만의 외국인 노동자와 저소득층 시민들이 어둠과 매캐한 공기속에 밥을 거르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가스통을 안고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장면1=허기진 4평의 삶
지난 23일 오후 안산시 원곡1동 D연립 지하 102호. 봄볕을 쬐던 정임례(가명, 65) 할머니가 기자를 안내한 곳이다.
지난 98년 말 경남 마산에서 아들과 함께 올라왔지만 지난해부터 서울로 돈벌이 나간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12만원하는 방세도 두달이 밀렸다. 정할머니의 한달 수입은 딱히 없다. 아들이 서울에서 가끔 보내오는 용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을 위한 돈도 못받고 있다. 주민등록자체가 돼 있지 않은 탓이다. 굶주림은 일상이 돼 있는 듯 했다. 전날 점심때 주변 노인네들과 국수 하나 먹은 것이 그날 최고의 식사였다.
정할머니는 올들어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기침도 잦아졌고 무릎 관절염도 심해졌다고 한다. 꽉막힌 4평 남짓 공간의 퀴퀴한 공기와 습기속에 오랫동안 산 까닭이다.
“아들이 곧 온다고 했어. 아들이 오면 고향으로 내려갈 꺼야.” 정 할머니의 기다림은 계속되고 있다.
길 건너 L연립 지하에는 중국교포가 살고 있다. 5평 규모의 쪽방에는 3명의 조선족이 함께 살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한국에 들어온 이들은 서울 가리봉동을 거쳐 올 초 이곳으로 들어왔다. 아직 일감을 못찾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리영길(33) 씨는 “전 직장에서 월급을 못받아 이쪽으로 옮겼다”면서 “공사장 막일이라도 있는지 알아보고 있지만 찾기가 쉽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집 동네' 라고 불리는 지하방은 안산시 원곡 1동과 초지동, 고잔동 일대에 땅을 헤집고 들어서 있다. 이 지역은 특히 연립주택만 지을수 있도록 돼 있다. 주택마다 주민 대피용이나 창고 용도로 허가난 지하공간이 지난 10여년 동안 하나둘씩 쪽방 형태의 주거공간으로 바뀌었다.
같은날 오후 4시 초지시장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파키스탄 외국인 노동자 라소(32)와 니마(29) 씨가 사는 초지동 S 연립도 마찬가지다. 3 곳의 출입구가 있다. 출입구 아래 지하 공간에 4가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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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5평 정도의 공간에 이들외 2명이 더 살고 있다. 환풍 시설은 지상으로 나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 전기선을 끌어다 쓰다 보니 전선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 10만원. 얼굴을 씻거나 빨래는 밖의 공동 화장실에서 해결한다. 밥은 하루 한끼 정도로 빵이나 라면을 끓여 먹는 게 고작이다.
니마 씨는 “파키스탄에서의 생활과 차이 없어. 월급 높아 있을 뿐”이라며 떠듬떠듬 말한다. 그나마 니마 씨는 수원의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3개월분의 임금도 못받고 쫓겨났다. 매일 찾아가지만 사장을 만나기도 어렵다고 울먹였다.
#장면2=손가락 잘린 외국청년 `만도'
24일 오후 4시 원곡동에 위치한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 하루에도 수십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찾는 곳이다.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하는 한 인도네시아 청년을 만났다. 자신의 이름을 `만도'라고 밝힌 27살의 밝은 얼굴의 이 청년은 얘기 중에 점퍼 속의 한 손을 꺼내 보였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만 빼고 나머지 세 손가락이 없다.
지난해 11월 인천의 H 중소업체에서 기계 조립작업 중에 손가락이 로울러 기계에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회사쪽에서 치료비를 대주기는 했지만 만도 씨는 일을 못하고 있다. 매달 50만원씩 부모님께 보내드렸던 돈도 작년 말부터는 한푼도 송금을 못하고 있다. 센터에서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 위해 뛰고 있지만 그리 쉽지 않다.
“밥 먹기 조금은 불편하지만 거의 다 나았고 이제는 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일이 없어요”라며 만도 씨는 애써 웃음 짓는다. 그리고는 “마음이 너무 아퍼요. 나도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부모님이 전화로 우실 때 부모님도 (마음이) 아프고 나도 아팠어요”라며 눈시울이 불거진다.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 산업현장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이제 무시 못할 처지에 있다. 안산만해도 안산 경제의 10분의 1을 담당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있다.
물론 과거보다는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사업주와 사업장도 많이 달라지긴 했다. 임금을 상습적으로 떼이는 외국인 노동자도 전보다는 줄었지만 작업 환경이나 인권에서 볼 땐 여전히 `불법 외국인'으로 보는 눈이 많다.
#장면3=어둠을 가로지르는 고철 수집 아주머니
저녁 8시 원곡동 버들목 4길. 언덕 위 연립 골목사이로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수레를 끌고 있다. 이영임(가명, 35) 씨 역시 고잔동 지하방에 살고 있다. 헤어진 옷차림과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이내 땀방울이 배어 있다.
매일 저녁이면 원곡동과 초지동 일대를 돌면서 고철이나 버려진 가전제품, 폐지 등을 모으고 있다. 밤새 모은 것들은 다음날 아침에 재활용 수집상에게 넘긴다. 많이 쳐 주면 5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남편은 지난해 초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드러누운지 1년이 넘었다.
“올해 학교에 들어간 딸 아이와 아빠 약값에 보태려고. 내 타고난 팔자가 이런 걸...” 이씨의 말 속에는 삶은 곧 생존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기초생활보호 대상자 신청은 했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모른다”며 두꺼운 박스를 접었다. 이씨는 기자에게 더이상 말하기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수레를 끌었다.
초지동쪽으로 향하는 화랑로 4차선 도로 한복판을 지나는 수레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버스가 지나간다. 하지만 수레는 묵묵히 고갯길을 내려갔다.
#장면4=국경없는 마을
원곡본동 동사무소에서 안산전철역에 이르는 거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99년이후 매년 증가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이 일대에만 1만여명에 달한다. 유동인구까지 합하면 원곡동과 초지동 일대에는 3만여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살고 있는 `안산내의 외국'인 셈이다.
밤 10시 원곡본동 동사무소 앞. D마트는 일반공중전화 카드는 팔지 않는다. 대신 중국에서 직접 들여온 국제전화카드를 팔고 있다. 5개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20대와 30대로 보이는 여성들과 남성들이 전화를 하지만 우리말은 들리지 않는다.
최근 들어 중국교포를 비롯한 중국 한족의 인구가 크게 늘면서 중국식품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도 40여 군데나 된다. 일반 자장면이나 짬봉을 먹기도 쉽지 않다. 중국인만을 상대로하는 음식점과 중국곡만을 취급하는 노래방도 많다. 방글라데시 음식점을 비롯해 동아시아쪽 음식과 물품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올 초 이곳으로 온 중국인 리워청(27. 여) 씨는 “호프집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술시중과 다른 일을 하고 있고 월급은 70만원 받는다”고 말했다. 상하이에서 대학까지 졸업했다는 그녀는 인천을 통해 지난해 9월 한국에 들어왔다.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채 그녀는 다시 일하러 움직였다. 하지만 그곳은 호프집이 아니라 단란주점이었다.
국경은 없지만 생활과 대우에는 엄연히 국경이 존재한다. 중국 교포를 비롯 대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는 원곡본동 주변 다세대 주택의 지하에서 살고 있다.
28살의 방글라데시 청년 히무 씨가 살고 있는 지하방에도 무려 6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돌아가면서 공사장 노동일부터 음식 배달 등으로 6명이 다 모이는 날이 드물지만 주말이면 같이 누워 자기도 힘든 공간이다. 방값도 많이 올랐다.
지난해부터 중국인들이 늘어나면서 부터다. 지난해만해도 보증금 없이 월 15만이던 방값이 올해부터 보증금 200만원에 20만원씩을 내고 있다. 음식을 해먹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는 “일할 때는 그곳에서 밥과 돈을 준다. 일하지 않을 때는 굶거나 공동체(노동자센터)에 간다. 밥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에필로그
원곡동 일대에도 완연한 봄날이다.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파키스탄 청년부터 시민시장에 각종 봄나물을 팔러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들. 100여동이 넘는 연립과 수백의 다가구 주택의 지하에는 수많은 노동자와 빈민들이 가뿐 숨을 내쉬며 살고 있다. 감전되기 쉬운 전깃줄과 가스통, 탁한 공기와 온갖 병균들이 기생하는 공간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방치돼 있다.
안산시는 지난달에 이들 지역에 연립 입구마다 오는 30일까지 퇴거하라는 내용의 공지사항을 붙였다. 불법적인 용도 변경이고 주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이 왜 이곳에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나, `퇴거'라는 행정 명령말고는 이들을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주거대책이나 자활 프로그램을 내놓지 않나라는 질문에는 답을 내놓지 않는다.
결국 안산시장 이름의 공지사항은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어딘가 버려지고 있다. 2001년 4월 마지막 주말의 안산은 또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동안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동일보 4월 30일자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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