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들고온 음료수 박스

국민의 눈물 닦아줄 수 있는 진정한 경찰은 없을까?

등록 2001.04.30 16:09수정 2001.04.3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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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망설이다 지나간 '구문'을 올린다. 벌써 1주일 전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처형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이 살고 있다. 처형 식구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두 지방이 고향인 까닭에 서로 가까이 이웃하고 사는 게 어려울 때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처형네 식구들은 우리가 결혼한 지난 3년 전부터 가장 가까운 이웃사촌으로 살고 있다.


그런 처형집에 얼마 전 큰 일이 생겼다. 회사 공금으로 쓰일 현금 450만원을 포함해 결혼패물, 비디오카메라 등을 합해 1000만원 상당을 도둑이 새벽에 훔쳐가 버린 것이다.

사건 발생 당일, 처형 부부는 날이 밝자마자 112로 경찰에 신고했다. 우리 부부도 다급한 전화를 받고 아침에 달려갔지만 두 부부는 망연자실해 넋을 잃고 있었다.

도둑은 평소 문단속이 허술했던 뒷문을 통해 새벽녁에 처형 부부가 잠든 틈을 타 범행을 감행한 것으로 추정됐다. 절도범을 신고해 봤자 검거될 가능성이 극히 낮은 게 일반적인 통례지만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이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린 하루가 채 못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유일한 단서가 될 만한 10만원권 자기앞 수표 2장의 번호를 피해자가 당일 아침 은행이 문을 연 직후 사고 신고하고 수표번호까지 알아내 관할 파출소에 통보했지만, 경찰은 정작 수표추적에 늑장을 부렸다.

더욱이 범인이 은행에 사고수표임을 확인하는 전화를 당일 오후에 걸었지만 경찰은 전화추적 등 사전에 이를 감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관련 금융기관에 미리 수사협조도 구하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을 안 처형 부부가 급기야 파출소에 찾아가 항의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돌아가서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본 기자는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취재하리라 마음 먹었다. 안 그래도 대우자동차 노조원들에 대한 폭력사용으로 경찰에 대한 국민 감정이 최악인 상태에서, 경찰이 자기 본분을 다하기는커녕 이무영 경찰청장이 평소 입버릇처럼 주장하고 있는 경찰개혁에 역행하는 처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경찰의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에 분노까지 일었다.

관할 경찰서에 전화를 걸자 파출소장은 대뜸 전화상으로는 자세한 상황을 밝힐 수 없으니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 기자가 파출소에 찾아가자 소장은 '피해자가 수표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수사가 어려웠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수표번호를 피해자가 경찰에 알려준 시간은 사건 당일 오전 9시30분 이전이었고, 범인이 은행에 확인전화를 한 시각은 당일 오후였던 것으로 밝혀져 경찰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치 못했음이 드러났다.

결국 범죄수사의 ABC라고 할 수 있는 초동수사에 경찰이 실패함으로써 검거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 것이다.

또한 피해자에 따르면 경찰은 당일 새벽 6시경 112 신고를 받고서도 15분이 휠씬 지나서야 사건 현장에 도착해 절도범의 조기 검거 가능성마저 놓쳐 버린 것으로 확인됐다. 물론 경찰은 이같은 사실을 부인했다.

특히 본 기자가 확인한 결과, 파출소측은 사건보고를 당일 오전에 했다고 했지만 사건이 넘어간 관할 OO경찰서 강력반의 담당 형사는 이틀이 지난 뒤에야 사고 수표 금융기관을 조사하고 피해자 진술을 확인하는 등 본격적인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경찰이 평소 얼마나 절도범 수사를 허술하고 안이하게 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그러나 더욱 서글픈 일은 정작 취재가 끝난 후 발생했다. 파출소장을 비롯해 경찰 4명이 취재 당일 오후 10시가 넘어 음료수 한 박스를 사들고 본 기자의 집에 찾아온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혼자 집에 있던 임신 8개월의 아내는 뒤뚱거리며 경찰을 쫓아가 음료수 박스를 돌려주었으나 경찰들은 다시 대문 앞에 음료수 박스를 놓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경찰들은 아내에게 "아까 취재할 때 홍기자님과 얘기가 잘 안 끝나 직접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후 파출소장은 본 기자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와 "아까는 미안했다. 노력해서 꼭 잡을 테니까 한번만 봐 주세요"라고 말했다. 잘못한 게 전혀 없다던 아까와의 태도와 180도 바뀐 것이다.

서글펐다. 대한민국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의 자화상이 서글펐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본청이나 보안, 정보분실 등 각광받고 빛나는 노른 자위 부서보다 일을 열심히 해도 볕이 잘 들지 않는 파출소 근무자와 일선서 강력반 형사들이 누구보다 열악한 근무조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는 모든 고유 명사를 빼고 이렇게 기사화를 하기로 했다. 어찌보면 기사감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국민 개개인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판단 아래서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일반 서민에게 1000만원은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돈이다. 힘없고 빽없는 국민들이 도둑을 맞았을 때 기댈 건 '경찰'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짜 경찰'들은 마음속 깊이 헤아려 줬으면 좋겠다. 국민들의 아픈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진정한 경찰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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