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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라와 그의 아내 ⓒ 임현주 |
4월 25일 무더운 캘커타를 도망치듯 빠져 나와 시킴에 도착했다. 오랫 동안 독립된 나라로 존재하다 1975년 인도의 22번째 주로 편입된 시킴은, 그 역사 때문인지 여러 모로 내가 알고 있는 인도와 다른 곳이었다.
가장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사람들의 생김새.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아리안, 드라비다인들인 것과 달리 시킴에는 부티아, 렙차스 등 몽골리안 계통사람들과 네팔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여름에도 솜이불을 덥고 잘 정도로 시원한 곳이란 말만 듣고 시킴에 도착한 나는, 도착한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킴주정부 소속 버스에 올라보니 온통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나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지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대신 가벼운 미소로 날 반겨주었다.
시킴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부티아'는 내가 한국인이냐고 물을 정도로 우리와 생김새가 정말 비슷했다. 케체팔리 호수 근처 부티아 마을에 머물며 이들이 생김새뿐만 아니라 언어도 우리와 비슷한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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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티아 고유의상을 입은 부티아 여인들 (오른쪽)버스 안의 두 여인 ⓒ 임현주 |
처음 부티아마을에 있는 이름 없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 내가 들은 말은 "아빠!". 한 꼬마가 날 보자마자 "아빠!"하고 부르자 정말 나이든 남자가 나타나 방을 안내해주는 것이었다.
아빠 외에도 부티아 말 중에는 우리 말과 비슷한 단어가 더 있었다. 아마(엄마), 아추(아이 추워), 아따(아따거워), 아뜨(아뜨거워). 처음에 난 이들이 내가 하는 말을 재미삼아 따라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물어보면 부티아 언어 또한 우리 말과 같은 의미와 소리로 사용되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더욱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마당에 앉아 있는데 꼬마들이 "공공칠빵" "공공칠빵"하며 내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자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공공칠빵 놀이 동작을 취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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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꽃심기에 열중인 동자승들 (오른쪽)아이와 함께 앉은 부티아 여인 ⓒ 임현주 |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공공칠빵 놀이까지 똑같은 줄 알고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얼마 전 이 곳에 머물렀던 한국 여행자가 이들에게 공공칠빵 놀이를 가르쳐 준 것이었다.
놀이에는 서툴렀지만 이들은 공공칠빵 놀이를 너무나 좋아해 피곤한 나를 오랫 동안 재워주지 않았다. 또 놀이를 마친 후엔 선물이라며 '아리랑' 노래를 불러 주었다. (아리랑 노래 역시 한국인이 이들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중간중간 가사를 몰라 콧소리를 냈지만 너무도 정확한 그들의 발음에 난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름없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부티아 마을의 정식 명칭는 '케체팔리 곰빠'. 작은 곰빠(티벳인들이 '절'을 부르는 말) 하나와 1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은 한 가족에 한두 명씩은 모두 스님이이었다. 티벳 불교 계열의 중의 하나인 '닝마파'에 속하는 이 곳 스님들은 결혼을 할 수 있어서 곰빠를 중심으로 스님들이 가정을 이루어 사는 스님 마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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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15일간 묵었던 게스트 하우수 (오른쪽)게스트하우스에서 보이는 칸첸충가 ⓒ 임현주 |
마을 전체가 한 가족처럼 사는 이곳에서 나는 시킴에서 머물 수 있는 기간인 15일을 모두 보냈다. 고개만 들면 보이는 칸첸충가 봉우리와 공공칠빵, 공기놀이, 저녁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주는 풍경들이 너무나 정겨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과 15일을 같이 보내며 내 마음 속에는 내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딘가 즈음에서 부티아들과 우리는 분명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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