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정오, TV에서 친근한 실로폰 소리가 흘러 나온다. KBS 1TV '전국 노래자랑'의 흥겨운 종소리다. 키작은 아저씨의 우스꽝스러운 춤동작과 어설픈 노랫가락이 시청자들을 웃긴다. 그 웃음을 몇 배로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심사위원의 가차없는 '땡'소리다. 탈락과 합격의 희비를 가르는 얼굴 없는 심사위원, 작곡가 임종수(59)씨는 프로그램이 생기던 1980년부터 13년 동안 전국 지역사회를 돌며 서민들의 노래와 함께 했다.
"'전국 노래자랑'은 가수를 뽑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지역의 특산물과 주민들을 소개하는 일종의 지역축제나 다름없어요. 따라서 노래를 그저 특색 없이 잘하는 사람보다는 다소 가창력은 떨어지더라도 개성 있게 장기를 뽐내는 사람을 통과시킵니다. 일반 서민들이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프로그램인 만큼 누구나 저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거죠."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흰머리와 작은 두 눈, 둥글넓적한 얼굴의 임씨는 그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특유의 달변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땡 철학'을 이어간다.
"예비심사에 모인 몇 백 명의 사람들 중에서 본선 진출자 20여명 남짓을 뽑습니다. 나중에는 걸어나오는 모습만 봐도 탈락과 통과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예요. 일단 합격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방송에서는 시간상의 한계 때문에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명 '땡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겁니다. 빠른 노래를 부르면서 웃음을 유발시키는 사람들에게는 '땡'을 쳐도 인기상이나 상품이 돌아가니 모두가 열심히 참여하게 되고, 보는 이들도 즐겁지요."
본래 가수가 꿈이었던 임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0세 때 전주 방송국에서 주최한 국제레코드사 전속 가수 3명을 뽑는 대회에 출전한다. 당시 500여명의 지원자가 몰린 가운데 임씨는 최종 결선 10명안에 들어 마지막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초대가수의 무대가 펼쳐지고 가수 남백송이 나와 노래를 했다. 한참 노래를 듣던 도중 그는 '설령 뽑힌다 해도 저 가수와 같은 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대회장을 나와버렸다고 한다. 그 길로 산에 들어가 6개월 간 독학으로 발성연습을 했다. 목이 세 번 잠겼다 풀렸다를 반복하고 난 후에야 만족할만한 목소리를 얻었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60년대 중·후반에는 최희준, 현미, 위키리 등 미8군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에 의해 흘러 들어온 팝, 재즈 스타일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내 목소리는 남인수 선생과 같은 트로트에나 꼭 맞는 음색이었고, 그다지 독창적이거나 특색 있는 목소리가 못됐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너무 가난했다는 것도 내가 가수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자신에 대한 냉철한 분석 끝에 결국 가수를 포기한 그는 스승 나화랑의 권유로 작곡을 시작한다. 작곡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부터 시창과 기초 화성악 공부를 시작하여 68년부터 본격적인 작곡에 들어간다. 71년에는 세상에 곡을 발표하기 위하여 가장 잘 된 2곡을 선곡해 무작정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찾아갔다. 무명 작곡가가 레코드사 사장을 만나겠다고 하니 흔쾌히 만나줄 턱이 없었다. 여직원의 문전박대에도 불구하고 일주일간 사무실을 출근하다시피 한 후 겨우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나훈아에게 곡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레코드사에서는 바쁜 나훈아의 스케줄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다시 기약 없는 사무실 출입이 시작되었고 정확히 보름 후 가죽옷으로 도배를 하고 사무실에 찾아온 나훈아를 만날 수 있었다.
"사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나훈아를 불러 여기 내가 작곡한 노래 두 곡이 있으니 1절당 1분 30초씩 계산해 정확히 3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하는 임씨의 곡을 말없이 듣고 있던 나훈아는 갑자기 앞으로 나오더니 "나보다 노래를 더 잘하시네, 한번만 더해주이소"하고 말했다. 다시 노래를 하고 나자 이젠 악보를 보여달라고 했다. 나훈아는 악보를 보며 노래를 4번 반복해 듣더니 마지막에는 완벽하게 자신의 노래로 소화해냈다. 그리고 악보 아래에 친필 사인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취입하게 된 노래 '고향역'은 그의 데뷔곡이자 첫 번째 히트곡이 되었다. 아직도 이 노래는 명절 때마다 라디오 프로그램 오프닝 곡으로 흘러나오곤 한다.
두 번째 히트곡은 하수영이 부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다. 음악학원 강사로 있던 27세 때, 그는 6살 아래 제자를 아내로 맞이한다. 홍제동 산꼭대기 단칸방에서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어 있던 아내를 보며 '이대로 영원히'라는 노래를 작사·작곡, 이것이 훗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의 원곡이 된다. 노래가 발표되고 나서는 '우리나라 가요계에도 이런 노래가 나올 수 있다'는 극찬을 받을 정도였다. 그 후에도 그는 나훈아의 '대동강 편지', 태진아의 '옥경이', 인순이의 '착한 여자', 김상배의 '마지막 여인', 박윤경의 '부초' 등 수십 곡을 대 히트시켰다.
'옥경이'의 원제목은 '본듯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에 들어오는 제목은 아니었다. 친근한 여자 이름을 제목 컨셉으로 정하고 가수 태진아와 머리를 맞댄 끝에 탄생한 제목이 바로 '옥경이'. 다름 아닌 태진아의 부인 '옥형'씨의 애칭이었다.
"노래는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옮길 때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절대로 억지를 부려선 안돼요. 묻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노래를 들으면서 자기 안의 한을 되새기거든요."
작곡을 할 때의 원칙으로 그는 서슴없이 '진실성'을 꼽았다.
"요즘 가요계는 일본 가요계의 모습을 여과 없이 반영하고 있어요. 모든 예술에는 모방이 있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우리는 너무 천편일률적입니다. 오로지 시청률만을 따지는 거죠. 주 소비층인 10대와 20대를 겨냥하는 가요 프로그램대 전통가요 프로그램 비율을 70:30정도로 조정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95:5 정도에 머무르고 있어요."
현 가요계를 냉철하게 꼬집고 나선 '땡 선생님'은 우리가요의 나아갈 방향 제1요소로 '균형'을 짚었다.
근현대사의 흐름과 함께 울고 웃어온 우리 전통가요. 그러나 현재는 그 입지가 너무도 좁아져 있다. 13년간 종친 인생, 작곡가 임종수씨는 오늘도 작곡을 하고 주부들에게 노래교습을 한다.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양산해낸 한국 정서의 대변인인 그가 계속해서 제2의 '옥경이'와 같은 히트작을 내 좁아진 전통가요의 입지를 넓히는 기폭제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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