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무엇을 위해 광주에 오는가
80년 오월에서 2001년 5월을 돌아보기 위해 18일 광주를 찾았다. 80년 당시의 광주역과 도청, 금남로는 항쟁의 거리가 아닌 깔끔한 거리와 서울의 명동과 같은 번화가 조성으로 인해 '시내가 주는 생동감'이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이렇게 달라진 광주를 나는 왜 찾아 왔을까?
일주일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의 참혹한 사진과 계엄군의 대검에 찔리는 80년 광주시민들의 사진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해서? 국가 기념일이 된 광주항쟁을 기리기 위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물음을 안고 다시 광주를 찾았다. 2000년 광주 항쟁 곳곳을 돌았을 때는 무엇을 위해 와야 하는지를 찾지 못했었다. 그리고 2001년 광주를 가자고 했을 때 한 친구는 '작년에 갔었는데...'라고 말하는 것에 그럼 왜 올해도, 내년에도 광주에 가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야 했다.
광주 항쟁 정신이 위기에 처하다.
'김대중 석방!'의 구호를 외치며 처절하게 숨져간 광주시민들은 이제 세상이 바뀐 듯한 경험을 했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대통령이 된 것이다. 하지만 '화해'를 위한 전두환, 노태우 사면은 세월이 다행히 치료해준 약에 불과한 것이었다. 곧 이어진 5.18 국가 기념일 지정과 국가 차원의 기념식 행렬은 명예회복과 정당성에 대한 문제를 두고 볼 때는 당연한 처사였다.
먼저 가신 5월 영령은 모두가 이 땅의 민주를 위한 열사이기에 진작에 인정받아야 했었다. 하지만 금남로에서 만난 2001년의 시민들의 말처럼 '시간이 많이 지났다'라는 것 때문에 광주항쟁 정신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항쟁지였던 도청 앞 YMCA에서 5.18 행사 참가를 했던 청소년 힙합 동아리를 찾았었다. 리더인 전남고 2학년생인 고등학생은 항쟁에 대한 정당성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요즘 애들 그런거 별로 신경 안 써요. 5월 행사해도 별로...'라고 말한다.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며 싸웠던 선배 고등학생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깊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그랬다.
유족회 관계자인 박경순 씨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님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고 계세요. 그런데 정작 그 2세들은 항쟁 후 등을 돌리고 말았어요. 충격이 크기도 하고, 부담감을 너무 느낀 탓이죠. 스스로가 항쟁정신을 거부한 셈이죠. 그래서 이 후에는 청년회를 만들어서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려 합니다. 광주항쟁정신이 끊길 위기에 처한 거죠."
인터뷰를 마치면서 요즘은 잘 찾아오지도 않는다면서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시기도 하셨다. 광주는 더 이상 기사화되지도 못하는 것일까.
금남로에서 만난 노점상 아주머니들도 당시 현장을 보았음에도 취재에 응하지 않고, 다만 '시간이 많이 흘렀지 뭐. 세상이 다른데'라고만 말씀하신다. 심지어 5.18 관련 보상자 사기극 사건으로 인해 이제는 부끄럽고, 5.18이 신물이 날 지경이란다. 광주지역 사람뿐 아니라 5.18을 통해 현재의 민주를 누리는 우리 세대들 역시 왜곡된 역사의식은 여전하다.
5월 항쟁에 대한 강연 도중 항쟁 당시 타 지역에서는 그 참사를 알지도 못했고, 전화선도 끊어졌었다라는 말에 한 학생이 '그 때는 삐삐도 없었어요?'라고 물을 정도이고, 아직도 남의 동네일이거나, 폭도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알고 있기도 하다. 또 금남로 중심에 있는 경찰서의 중견 간부도 '추모로 끝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80년 당시 경찰들은 시민의 편이었다는데.
21년이 흘렀다. 유족회, 부상자회 등 많은 단체가 조직되어 10년을 넘게 길거리에서 국회 앞에서 미대사관 앞에서 수없이 싸워서 이루어놓은 것은 경제적 보상과 화석화된 망월동 신묘역이었다. 또한 이제는 10개가 넘는 5.18의 이름을 건 단체와 갈 길을 잃어버린 항쟁체험자들이 오늘도 5.18 정신계승을 위해 광주에 온 외지 사람들을 맞이한다.
길거리의 TV에서 뉴스가 나온다. '망월동 참배객 줄어....'
19일 오전, 한산한 망월동 구묘역에는 집회를 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신묘역에는 구경온 듯한 가족들이 드나들었다. 깨끗하게 닦여진 길을 걷는 사람들은 공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디오에서 본 묘이장 당시 나온 5월 영령들의 뼈가 생각났다. 그리고 다시 참혹한 사진이.
왜 하필 광주였을까?
만나는 광주사람마다, 그리고 광주를 찾은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스스로 먼저 광주만의 특이한 점들을 찾으려한 것이다. 우리의 숙소를 만들어 주신 후배 아버님은 전두환의 정치적 이용이었다는 말씀과 부산, 마산지역 항쟁당시에 진압군으로 참가한 친구분의 말씀을 빌어 '부마항쟁당시 총 한방 쏘니 다 도망가더라'라는 말씀을 통해 나름의 기질이 있는 듯하다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동학 농민 전쟁의 원류와 일제시대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5.18로 본다면 역사적으로 저항정신이 깊은 곳인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7일간 계엄군을 퇴치하고 해방기간에 형성되었던 '공동체'는 어떻게 나왔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수 년간 광주를 찾았다는 참여자의 말을 통해 광주만의 특별한 것을 찾는 것 자체가 광주항쟁을 지역화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가족과 형제가 죽어가고, 미친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가만 있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광주항쟁지에 오면 모든 것을 해결하고, 가능하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관념적으로 광주를 신성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만난 광주항쟁 유족들과 부상자회 분들은 놀랍게도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5.18을 바로보고 계셨다. 그래야 먼저 가신 님들을 대하며 살아 있을 수 있으니까. 5월은 살아있어야 하니깐.
다시, 광주에서 무엇을 계승해야 하나.
금남로에서 만난 인형파는 노점상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도청에 있던 희생자들의 관을 기억하셨다. 취재하는 우리들도 눈물이 흐를 수 밖에 없었다. 광주항쟁 당시 사진과 기록, 영상들을 보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분노를 참지 못해 치를 떨었다.
그리고 망월 구 묘역의 비장함과 열사들의 묘에서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울기만하고, 애도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80년 광주를 보기 위해 오늘 광주를 오지는 않았다. 지금 살아 있는 5.18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광주사람들을 만나고, 정신계승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만났다. 21주년 5.18 행사위원회의 사무처장님은 지금의 현재적 과제와 연관되지 못하면 정신계승은 그야말로 기념일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유족회 박경순 씨도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돌아가신 오빠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지금껏 10년을 넘게 싸워왔고, 후세에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열심히 살고 계셨다. 살아남은 사람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시 해방기에 도청 앞에 대자보 한 장이 붙었다고 한다. 박경순 씨 역시 그것을 보았고, 내용은 미항공모함이 부산에 와 있다고 써 있었고 시민들은 우리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진실은 드러났다.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를 진압하지 못할 경우 미군이 완전 초토화시키기 위해 지원나온 것을. 다행인지 전두환은 항공모함이 진격하기 전에 광주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후 이어진 미문화원 방화, 미대사관 항의방문 등 반미의식은 전면적으로 솟아올랐다. 이것이 미국의 본질이다라고, 분단된 조국의 비극적 참상이며, 미국의 원조하에 이루어진 광주학살은 미국이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광주학살은 지금의 경제, 민생 파탄의 자리에서 10조억원의 무기를 강매하고, 6월 3일 뉴욕 전쟁범죄 재판소에서 51년 전 양민학살의 죄를 심판받아야 하는 미국이 저지른 짓이다. 통일이 되면 제국주의적 이권을 잃게 될 그들이 저지를 방해책동과 수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5월 영령들이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민주수호 역시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아직까지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매년 왜 광주를 찾아 올까라는 질문은 5월 영령들의 그 정신을 따라 지금 우리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19일 새벽까지 이어진 '순례단 한마당'의 참가자들 대부분이 노동자였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 처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언제 정리해고 당할지 모르는 정규노동자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향피우고 기념하면서 팔뚝질과 주둥아리로 외치는 것만이 먼저 가신 님들이 원하셨던 것은 아닐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20일 도청앞에서 열린 '5.18 정신계승 국민대회'에서 등장한 민주택시 노조의 경적시위와 택시 행렬은 80년 5월과 2001년 5월을 함께 만드는 자리였다.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싸우고 있었다. 21주년, 22주년, 23주년...해는 간다. 하지만 이 숫자들이 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광주항쟁은 살아있다'는 이유도 광주항쟁의 정신계승 이유도 살아있는 우리의 삶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왜 광주로 매년 오는가, 광주항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광주를 떠나는 버스속에서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부끄러움으로 5월 영령을 바라보며 나 역시 싸워야 하는구나라고.
덧붙이는 글 | 경기 남부 현장 취재 동아리 르뽀 게릴라
5월 기획 취재- 5.18 광주 민중 항쟁 취재
아주대 르뽀 게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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