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05.31 21:11수정 2001.06.01 09:43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 나이는 서른 다섯입니다. 그 중 나와 결혼한 햇수가 9년으로 접어들었으니 자연히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 때까지는 부모님과 친구에게 그럴싸한 생일을 해마다 챙겼겠지요. 그후 그녀의 불행(?)은 나와 결혼 9년동안 계속 진행중입니다.
그 어느 해 무슨 특정한 날도 평상처럼 바라보는 남편의 구도자 같은 행태에 아예 포기한 채로 산 아내입니다 .결혼기념일은 고사하고 생일도 까먹기가 일쑤여서 처제가 한번쯤 은근한 협박용 말이라도 던져야 그제서 부랴부랴 마음을 앞세워 주머니 쌈지돈 탁탁 털어 얄궂은 꽃이라도 사가지만 이미 심드렁해질대로 심드렁해진 아내의 표정에 질려
차라리 어떤 친구의 애시당초 생일 무관심론으로 초반부터 진을 빼버리거나 김을 빼버리는 작전을 써야한다는 말이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곧 아니다라고 부정해 버립니다. 왜냐 그것은 삭막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의미가 한낱 등본에 게재된 현식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본적인 것 조차 없으니 무얼 더 여기서 응용하겠습니까마는 한 3년만 앙 버티면 여자라는 위인들은 제 풀에 나가 떨어진다고 하는 그런 패악한 결혼생활은 원치 않는바, 단 한가지만이라도 이번만큼은 아내에게 뭔가 챙겨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작년처럼 또 그 작년처럼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 아니 돈이 없기 때문에 더이상 해 줄 것이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콩 꼬투리 마냥 적은 용돈으로 쩔쩔매는 나로서는 서서히 다가오는 아내 생일이 신경이 무척 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특히 더욱 돈 쓸 곳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연과 환경과 농사에 관한 책과 그런 강좌를 듣는다고 돈을 이리저리 변통하다보니 자연 주머니엔 동전 몇개만이 딸랑거리며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디데이는 끝나고 생일날 아침은 밝았으되 좋은 묘책은 떠오르지 않고, 아내가 손수 끓인 미역국을 염치도 좋게 넙죽 받아먹고 회사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오늘도 귀농강좌가 있다는 사실을 아내도 압니다.
알기 때문에 강의만 듣고 일찍 들어오라는 말에 건성으로 그러마 하고 대답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답지 않은 말임을 압니다.
아니나 다를까 강좌가 끝나고 결국 저녁 식사겸 뒷 풀이 술자리를 마치고 나니 11시가 넘고 집에 들어온 시각은 12시가 다 되어서였습니다.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아내의 역정을 비껴갈 재량은 없습니다. 등 돌리고 훌쩍이는 아내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가슴이 시린 게 뭐라 한마디 말도 못 붙이겠더라구요.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반전 시켜 볼 요량으로 겨우 한마디 던졌습니다. " 여보 늦은 거 미안해. 그리고 생일 못 챙겨줘서 미안해. 내일
라디오 00프로그램한번 들어봐. 우리 생일에 대한 글 띄웠어" 듣거나 말거나 잘도 주워 넘기며 덴가슴 슬어내리듯 조금이라도 감정동요가 있길 바랬습니다. 나도 참 못된 놈이죠. 어디 할 거짓말이 없어서 생일을 빙자하여 라디오 프로그램에 글 썼다고 사기칠 수 있을까요.
이럭저럭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그렇게 해는 또 떴습니다. 물론 저는 압니다. 보내지도 않은 사연 나올리 천부당하고 거기서 내 것 채택하리란 것 또한 만부당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걸 그래도 혹시나 믿어 라디오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일 아내의 순진함이 더욱 절절합니다.
이미 파우스트가 되어버린 나를 믿는 아내의 순박함이 코 끝을 찡하게 울립니다. 손에 일이 잡히지 않고 오전 일과를 끝낼 무렵 한달 전에 결혼한 직장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그이 손에 작은 종이 가방이 들려있어, 순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어 이거 이러면 내가 부끄러워" 달포 전에 결혼한 그는 중매비를 뒤늦게 챙겨서 미안하다며 조그만 성의니 사양치 마시고 받아 두라며 억지 강매하듯 떠안겨 주었습니다. 사내 결혼까지 다다르게 한 공은 내가 절대적이었죠.
말도 못붙이고 쭈빗쭈빗하는 그를 소개시켜줘서 이렇듯 결혼까지 이르게 했으니 말입니다. 인연이 되서 그들 두 사람이 평생지기로 사는 것이지만 소개시켜준 나로서는 어쨌든 행복하고 잘 살기만을 바랄 뿐이었는데 이렇듯 선물까지 안겨주니 내가 더 황감 할 뿐이었습니다.
사람은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이런 와중에도 머리에 퍼뜩 떠오른 것은 하루 지난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방송에 내글이 나올거라 거짓말도 했겠다 일이 더 커지고 그 만큼 실망도 더 커지기 전에 이 기회에 진화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다행히도 상품권이면서 포장도 부티나게 했는 참에 생일 선물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넌덕부리면 침참해진 아내 마음 조금이라도 풀어주어 생일 이전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녁 퇴근 발걸음도 가볍고 몇 층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승강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척 하니 열리고 평소에 꼭 잠겼던 현관문도 열쇠 꺼내는 수고로움도 민망하게 수욱 열리고, 떡하니 들어서서 푸석푸석한 아내의 얼굴 코 밑에 대고 " 자 당신 선물. 내 얘기 방송에 안 나왔어. 어 피곤하다 뭐 먹을 거 없나? " 하고 보자기 슬쩍 디밀쳐보고 이내 방으로 갔습니다.
아내는 아내다운 티를 낼려고 뻔한 질문을 퍼붓더군요. 뭔돈으로 샀느냐, 돈 꿔서 샀느냐, 결국 우리 살림 살 돈에서 또 나가야 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을 하면서도 볼이 살짝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저는 아까와는 영 딴 기분으로 이불을 뒤집어 쓴채 " 에잇" 하며 내 자신을 심하게 꾸짖고 있었습니다.
가슴 한켠에 왠지 서글픔이 잔뜩 밀려오더군요. 아내는 임신중입니다. 결혼 9년째 턱걸이 하듯 가까스로 한 처음 임신입니다. 그것도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서 말입니다. 그런 아내를 두고 의뭉스럽게 거짓을 한 내가 정말 밉습니다. 이젠 정말 생일을 챙겨줘야 하겠습니다.
귀농해서 내가 직접 지은 온갖 곡식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주고 싶습니다. 더 이상 거짓이 없는 자연에서 말이죠.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