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짓는 게 억수로 재밌는 기라"

[까탈이의 국토종단 여행기 11]

등록 2001.06.28 22:20수정 2001.07.1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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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서 문경 넘어가는 901번 지방도로변 풍경 ⓒ 김남희


2001년 6월 25일 월요일 흐림


이 세상에 나와 살면서 아무 생각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가슴에 품고, 고민하며, 나름대로 답을 찾아가면서 살아간다.

세상에 나온 목숨 치고 귀하고 아름답지 않은 목숨이 없다.
나는 이 곳 상주에 와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희망을 보고 떠난다.

어제 하룻밤을 머물렀던, 우산 정씨 종가댁의 어머님.
나이 서른 넷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이 넷을 혼자 키우며 종가집 맞며느리로 살아 오셨다고 한다. 그 댁 종손의 표현처럼 "미국 역사보다도 오래된 집"을 지키며, 많게는 일년에 18번의 제사를 지내며, 제사 때마다 적게는 몇 십명에서 몇 백명까지 수많은 손님을 치르며 살아온 긴 세월.

그 모질기도 했을 세월에 대해 여쭈었을 때, "그래도 내는 당당하게 지키고, 키우고 싶었던 기라" 라고 짧게 대답하시던 어머님.

85학번인 당신 아들과, 그 후배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을 지켜보며 하신 말씀.
"사람은 다 때가 되면 변하는 기라.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 아이가. 말로 설득하려 하지 마라. 다 지가 느끼면 변하는 기라."


자신이 보는 농민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날카롭게 비판하는 선배와 그 선배의 말을 때로는 인정하며, 때로는 항변하며, 열심히 할테니 지켜봐 달라고 부탁하는 후배. 밤이 깊도록 이어지는 얘기들이 결코 헛된 논쟁으로만은 보이지 않았던 건 왜일까.

어제 농민회에서 만났던 한 분이 하셨던 말이 생각난다.
"농사 짓는 거. 이게 억수로 재밌는 기라. 논에 벼 심어 노면 매일 똑같은 것 같아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 기라. 그거 가마이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해예."


그래. 사람도 변하고, 자라는 거다.
그냥 두는 것 보다는 물 주고, 거름 주고, 피 뽑아 주면서 손을 대고 정성을 들이면 더 많은 결실을 맺는 벼처럼, 사람도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 애정어린 관심과 격려, 비판을 받으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인 거겠지.

901번 도로변의 초가집 한 채 ⓒ 김남희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바뀐다.
희망을 품고,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 곁에 서면 나도 희망에 들뜬다.

정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내 삶의 희망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 좋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인가.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는 큰 꿈을 가져본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본다.

길 위에 서면 날마다 새롭다.
늘 비슷한 것 같은 길도 다 다르고, 다 같은 사람살이 어디 가나 비슷하지 않냐고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새롭다.

산다는 건 끝이 없는 학교이자, 희망을 배우는 긴 길이다.
이 길 위에 오르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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