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증언청취속기록 가운데 경남 통영지역의 경우 학살 가해자 중 일부인 헌병대 문관 2명이 증인으로 나와 학살 당시의 상황을 털어놓고 있다. 물론 이들의 증언에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지만,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증언을 보기 전에 당시 통영지역의 학살 전모를 정리해 보도한 40년 전 신문기사를 먼저 소개한다.
“거창.마산 등지의 소위 양민학살사건이 꼬리를 물고 백일하에 폭로되고 있는 이때 충무시(현 통영시)에서도 경찰과 해군들이 남녀 약 800명여명을 빨갱이로 몰아 총살 혹은 충무 앞바다에 수장한 사실이 사건발생 10여년 만에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20일 당시 희생자 유가족 수십명이 충무시내 모처에 모여 억울한 사실을 당국에 호소할 길을 강구하게 됨으로써 사건 실마리가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83(1950)년 6월 28일부터 충무시에 주둔한 해군부대장 박대진 대위, 오덕선 헌병소위 등은 경찰과 합동으로 약 2개월에 걸쳐 충무시를 비롯하여 통영군내에서 약800여명의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충무시의 도산면.광도면 등지 산골짜기에서 집단으로 학살하여 매장했다는데, 양민이 매장된 곳은 지금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일부 시민을 부둣가 배모 씨 창고에 감금하여 총살한 후 5명씩 일조로 하여 한 새끼줄에 팔다리를 묶어 돌을 달고 앞바다에 수장하기로 하고, 일부는 충무시에서 배로 약 한 시간 걸려 갈 수 있는 사량도 앞 장구섬, 한산도 주변 이름 없는 무인도 등에서 총살하여 사전에 파둔 토굴 속에 매장했다는데 이들은 대부분 30세 전후의 남자들이었다 한다.”(부산일보, 1960년 5월 21일자 보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직후 당시 언론에 보도된 통영 학살사건의 내용이다.
그후 약 보름 후인 6월 5일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 경남반이 경남도청 도지사실에서 통영지역 유족대표인 탁복수 씨와 가해자측인 진해해군헌병대 통영파견대 군속(문관) 허종완을 불러 증언을 듣는다.
허종완은 당시 우익단체였던 대동청년단 통영 서오동 동단 부단장이었다. 전쟁 발발 후인 7월초 해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헌병대 군속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허종완은 이 자리에서 “헌병대가…한 달포 있다가 양민을 붙잡아와서 두드려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붙들어 와가지고 주로 헌병대 대장인 오덕선이가 선임하사관 손 씨와 패댔습니다. 그리고 대원들 10여명이 다니면서 양민들을 데려다가 창고에다가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증언 중에는 전쟁의 진행상황에 따라 군인들이 일본으로 피신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만한 내용도 있다. 그는 해군 군속으로 근무하게 된 목적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목적이라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피란하게 될 때에는 배를 동원시킬 것이니 종국의 목적이 일본에 들어갈 것이다 급할 때에는…. 결국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전부 다 한국에서 있을 수 없고 일본에서 임시 피란할 때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튿날인 6일 부산 동래호텔에서 열린 특위에서는 역시 통영에서 헌병파견대 문관으로 양민학살에 가담했던 문창섭을 불러 심문하고 있다.
문창섭은 당시 인민군에게 식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을 잡아다 취조하고 처형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관되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면서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이어 이들 민간인들을 총살, 수장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조일재 위원=증인이 잡아가면 죽인다는 것을 알았지.
증인(문창섭)=네 그것은 알았습니다.
위원장(최천)=총살할 때에 보았는가.
증인=안봤습니다. 총살할 때에 안갔습니다.
조일재 위원=총살하는데 몇 번이나 따라갔는가.
증인=그런데 바다에 갈 때에는 따라갔습니다.
조일재 위원=어디쯤 갔는가.
증인=최의원 어장 앞의 바다입니다.
조일재 위원=몇 번 따라갔는가.
증인=두 번 따라갔습니다.
조일재 위원=배는 무슨 배인가.
증인=동찬호 22호인가 됩니다.
조일재 위원=어떻게 죽였나.
증인=개인 개인을 묶어 가지고 돌을 싣고….
조일재 위원=무엇으로 쐈는가.
증인=권총으로 쐈습니다. 돌려 앉혀놓고 쐈습니다.
위원장=누가 쐈는가.
증인=최 씨가 쐈습니다.
위원장=두 번 다 문관이 쐈다고. 헌병이 쏜 것도 있고.
증인=네.
조일재 위원=당신은 돌이나 실어주고 묶어준 것뿐인가.
증인=네.(후략)
이같은 국회 조사반의 기록처럼 통영에서는 8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짧은 시일(약 1주일)안에 접수돼 국회에 제출한 명단만도 267명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통영의 경우 대부분 바다에 수장됐기 때문에 유골을 발굴해 장례를 치를 수 없었고, 또한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 진상조사는 유족들에게 한가닥 희망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끝내 진상규명을 외면했다. 그 후 5.16군부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유족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당시 조사자료도 모두 압수해 폐기처분했다. 통영유족회 대표였던 탁복수 씨도 “좌익분자를 애국자인 양 허위선전하여 용공사상을 고취했다”(당시 판결문)는 이유로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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