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책가방을 맨 남자아이

등록 2001.06.30 13:26수정 2001.06.3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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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광일아, 이 가방 예쁘지?"
"…… ."
아이는 말이 없다. 가방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야, 이거 새것이잖아."
아빠는 앞집 여자아이가 메던 빨간 가방을 들어 보이며 열심히 설득했다.
"……."
아이의 입에선 울음이 곧 터져 나올 듯 했다.

"야, 이 가방 메고 다니면 가방 살 돈은 너 줄께. 그 돈은 저금 하면 좋잖아."
"……싫어요."
퉁명스럽게 튀어나오는 아이의 말엔 울음이 묻어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사내아이에게 빨간색 여아용 가방을 메라는 아빠의 억지는 계속되었다.


"광일아, 가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는 아이의 손을 끌고 가까운 은행으로 향했다. 가방 값만큼의 돈이 들어간 통장을 만들었다.
"이거 봐. 니 이름이잖아. 너도 읽을 수 있지? 너는 최고야."
유치원도 보내지 않아 겨우 이름 석자와 쉬운 한글 몇 자만을 읽고 쓸 수 있는 아이에게 칭찬을 해 주었다. 아이의 기분을 바꾸어 보려는 순전한 아부였다. 그러나 그 아부도 통하질 않았다. 마지못해 통장을 받아든 아이의 걸음은 무겁게만 보인다. 울음이 곧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힘없이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아빠는 먼 옛날을 떠 올렸다.

저 나이때의 아빠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요구였다. 어쩌면 학교가는 길목 어디엔가에서 울고 앉았다가 돌아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한 버릇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늘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을 했었다. 그러한 아빠의 동물적인 감각이 아이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 이유였다.

우리아이들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멋들어진 아이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앞섰던 거다.
'당당할 수 있는 용기'와 '방종스러운 '기' 살리기'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앞의 두 상황을 구분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두 마리 토끼를 쫒는 위험한 시도였다.

끝내 빨간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남자아이의 흔치 않은 모습이 동네 골목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빨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 아이는 집이 보이지 않을 즈음에서 가방을 벗어들고 힘없는 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그 모습을 할머니께서 보셨다. 할머니께서 까만 가방을 사 주시고 말았다. 손주의 모습이 안쓰러워 차마 볼 수 없으셨던 것이었다. 아빠도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빨간 가방 사건은 단 며칠로 끝난 훈련이었다. 한글도 깨우치지 못하고 학교에 보낸 걱정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당당할 수 있는 강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은 욕심이 앞섰던 것이다. 부끄러운 기억들(아빠의 경험들)을 남겨 주지 않으려는 첫 번째의 시도였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맹목적으로 방향이 없이 베풀어지는 것보다는 어떠한 목적이나 방향을 잡아두는 것이 훨씬 보람 있으리라 생각했다. 첫 훈련은 실패로 끝이 났다. 어쩌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잔혹한(?)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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