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지역 민간인학살의 실상은 전 월간 <말> 기자였던 정희상(현 시사저널 기자) 씨와 젊은 역사연구자인 전갑생(민간인학살문제해결을 위한 경남지역모임 진상조사팀장) 씨의 조사로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이들의 취재와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거제지역에서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숫자는 9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갑생 씨는 자신의 조사기록에서 △49년 4~5월 2차례에 걸쳐 동부면 구천계곡에서 310명 집단총살 △50년 둔덕면 방답에서 10명 집단총살 △50년 4월 장승포 신사에서 20명 총살 △50년 8월 20일 지심도에서 400명 수장 △50년 7~8월 하청.연초지역에서 보도연맹원 40여명 집단총살 △49년 7월 연초면 송정리 뒷산에서 20~30명 집단총살 △50년 7월 장목면에서 보도연맹원 15명 집단총살 △50년 7월 칠천도 부근에서 40명 수장 등이 밝혀졌다고 한다.
전 씨는 이에 따라 49년 4~12월까지 1차로 230여명이 집단총살됐으며, 2차로 50년 5월 이후 500여명이 토벌대에 끌려가 수장되는 등 최소한 877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거제의 경우 좌익세력으로 구성된 야산대(빨치산)가 일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특히 민간인들의 희생이 많았다. 군인들이 민간인들까지 야산대로 몰아 죽인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60년 국회 증언청취 속기록의 내용에도 야산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족 윤병한 씨의 증언이다.
윤병한=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과거 농민들이니까 도장을 찍으라고 그래서 도장을 찍었더니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던 것인데 CIC(특무대).HID(방첩대) 사람들이 들어와서…거기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다 끌려 나갔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열사람 다섯사람씩 철사로 묶어가지고 바다에 나가서 없앴다는 것입니다.
위원장(최천)=거제도 야산대가 수가 얼마나 되었어요.
윤병한=처음에는 수도 많지 않았는데 군대가 들어와서 자꾸 죽이려고 하니까 산으로 쫓겨 올라가고 했습니다.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다 죽었습니다.
이와 달리 보도연맹원이 아닌데도 경찰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주민들이 돼지를 잡아먹고 있는데, 경찰관이 다가왔다. 주민 가운데 한명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저게 누구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나지막히 “경찰국 개”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이곳에서 돼지고기를 잘 얻어먹고 돌아갔다.
그런데 주민들끼리 나눈 이야기를 우익단체 회원 한명이 지서에 밀고했던 것이다. 이때 함께 있던 주민 8명이 지서에 잡혀가 심한 폭행을 당한 후 업혀 나왔다. 그런데 그 후에 다시 지서에서 호출장이 왔다. 이때 불려간 사람은 학살됐다.
당시 이런 학살모의를 꾸민 사람들은 우익단체인 국민회 회장이었던 도의원 김○찬으로 지목되고 있다.
속기록에는 이렇게 돼 있다.
증인=그때 책임자가 도의원 김○찬인데 국민회 회장이고 수습대책위원입니다. 그분들이 모의했다는 것을 현재 듣고 있습니다.
위원=자유당입니까., 민주당입니까.”
증인=자유당입니다.
위원=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증인=장목면에서 열다섯명이 죽었는데 저의 오촌도 그래가지고 죽었고 저 여자 남편도 그래 가지고 죽었고….
위원=15명이 죽은 것과 김○찬이와의 관계는.”
증인=김○찬이가 모의를 해가지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내 형님과 아저씨가 죽은 것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돼지사건으로다가 장승포로 잡혀갔다니까요.
위원=그러면 도의원한테 한이 많겠군.
증인=네.
위원=이 사건 이후에 한번 만나서 얘기한 일이 있습니까.
증인=전연 없습니다만 그 사람의 동생한테 형님이 같은 사람으로서 일을 했으니까 참회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증언청취 기록에서는 또한 국회 조사특위가 ‘양민’학살의 조사대상에 좌익혐의자는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민간인학살에는 좌.우익에 관계없이 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단 처형한 것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오늘날 민간단체의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는 현실인식이다.
그러나 유족인 김종백 씨의 호소에 당시 국회의원들은 이렇게 호통을 치고 있다.
증인=제 부친이 죽었습니다. 그 당시 보도연맹 간사장입니다. 성함은 김태곤입니다. 그 당시 저는 군대에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에 아무런 사형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어요.
박상길 의원=증인 아버지는 누구 때문에 죽었소.
위원장=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지 않았소. 그때 국가의 정세는 극히 비상한 사태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 국가를 공산주의에다가 맡기느냐 이런 비상사태가 생겼는데 29일(징역형) 죄를 받았으니까 죄가 안되지 않느냐 하는 얘기는 우리한테 통하지 않는 얘기예요.
증인=제가 얘기하는 것은 29일 언도받았으면 됐지….
조일재 의원=여하튼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힌 사람이라 보도연맹이다 이것은 그때 방침이 그랬던 것이예요.
당시 각 지역 보도연맹 간사장은 사법당국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확실한 사상전향이 된 인물을 선임했다. 이렇게 선임된 간사장은 그때부터 반공투사가 돼 반공강연을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이런 확실한 전향자마저도 무차별 학살해버렸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것으로 '국회 증언록으로 본 경남의 민간인학살' 시리즈를 일단 마칩니다. 당시 국회속기록에는 거창 함양 산청 등에 대한 조사기록도 있지만, 그 부분은 추후 보충취재가 더 되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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