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06.30 16:58수정 2001.07.02 09:57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은행엘 다녀왔습니다. 마감전에 세금과 공과금을 납부하고 정기예금을 불입하느라 아이가 낮잠에서 깨기전에 부리나케 다녀왔습니다.
이번 달은 지난 달보다 예금액이 적습니다.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또 얼굴을 굳히고 불만의 소리를 쏟아 놓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남편에게 말합니다. 남편은 그 돈을 벌기위해 숱한 불쾌함과 피곤함을 견뎌왔을 것을 알기에 말입니다.
"자기야 이번 달 예금 45만원 했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을 가장합니다)
"뭐? 왜 그것밖에 못했어?"
역시나입니다. 이럴 땐 마음속으로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 그것밖에 못하기는... 쓴 게 많으니까 그렇지."
"이번 달은 카드도 별로 안 썼잖아, 뭐가 쓴 게 많다는 거야?"
"아이 참, 아기 카시트도 샀지, 시골에도 다녀왔지, 자동차세도 나가잖아. 그리고 기름값도 10만원이 넘었드라."
"뭐라구? 진짜? 어, 차도 별로 안 가져 갔는데. 뭔가 수상해. 감시를 하던지 해야지." 남편은 실눈을 만들며 못 믿겠다는 투로 말합니다.
이 대목쯤 되면 가계부와 계산기를 가져다 코 앞에 들이밉니다.
"감시를 하든지, 계산을 해보든지 자, 봐 보라구."
평소에 검소하기 그지없는 남편의 관심사는 통장으로 이체되는 월급중에 얼마를 저축하느냐 입니다. 저축액만 많으면 나머지 돈으로 몽땅 풀빵(?)을 사먹었다해도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축액이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적을 때는 이렇게 달라집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처음에'저축액이 왜 적은가?'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된 언쟁은 남편이 가계부를 들여다 보는 순간 전혀 다른 문제로 옮아 갑니다.
그것은'할부로 구입한 컴퓨터를 왜 한꺼번에 지출된 것으로 적느냐?'하는 식의 가계부 기입상의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거 뭐야?"
"세금. 그거 있잖아, 월급명세서에 보면 소득세외 해서 공제되는 거."
"그걸 뭐하러 적냐?"
"뭐하러 적기는, 거기 항목이 나오잖아."
"내가 통장에 들어오기나 했다가 빠진 거면 말을 안 하겠는데, 어디 만져보고나 지출된 돈이어야지. 뭐하러 이런 쓸데 없는 건 적으라고 돼있어. 이거 뭐 가계부가 한 눈에 딱 들어와야지. 뭐 이렇게 복잡하게 되어있는 거야? 이건 또 뭐야?"
"뭐 말이야, 그건 예금한 거지, 전화요금 자동이체 될 금액에서 만원 모자라서.."
"근데 이게 왜 지출이야?"
"왜 지출이기는, 지갑에서 나갔으니까 지출이지."
"그래도 아직 지출이 안 된거 아냐? 그럼 지출이 아니지. 여기 지출이라고 써놓고 자동이체 되면 또 지출이라고 쓰고, 그게 뭐야?"
이쯤 되면 다혈질인 저는 처음보다 목소리가 두세 배는 커지고 말하는 속도도 빨라집니다. "당연하지, 가계부는 내 지갑을 중심으로 적는 거잖아. 그러니까 예금하면 지갑에서 나간 거니까 지출이고 통장에서 찾아서 지갑에 돈이 들어오면 수입이고, 자기는 회계장부같은 것도 못봤어?"
"우리집이 무슨 기업이냐? 내가 알아볼 수 있게 돼 있어야지. 남들 보여줄 것도 아니고, 한 눈에 딱 총수입이 얼마고 어디 얼마 얼마 지출됐고 그게 들어와야지."
남편도 덩달아 목소리가 커집니다.
"어휴참, 그거야 여기 앞장에 '월별 예,결산표'에 보면 나오잖아"
그때 엄마 아빠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굴려대던 딸이 엄마한테 매달리며 '힝힝'울음을 뱉어냅니다.
정말 아차 싶습니다. 자식 보는데서 싸우는거 아니랬는데.
"으응, 미안해. 엄마 아빠 싸우는 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아이로 인해 잠시 휴전 상태가 되었습니다.
가계부를 이리저리 들여다 보던 남편이 마뜩찮다는듯 일어나며 "내가 한 눈에 딱 들어오는 가계부 만들어줄께"하더니 서재로 갑니다.
남편은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검색을 하더니 가계부를 내려받아 둔 모양입니다.
"저기 내가 가계부 다운받아 놨으니까 한 번 봐봐, 괜찮으면 쓰고 아니면 삭제 하든지."
"나는 아무 거나 괜찮으니까, 자기 보기 편한 걸루 해. 내가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데 컴맹인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종이가계부가 훨씬 편리합니다.
남편이 그러는 사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웃음이 납니다.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지점에서 목청높여 싸운 것도 웃음이 나고, 몇 달에 한 번씩 가계부를 가지고 반복해서 싸우는 것도 웃음이 나고, 무슨 상받을 일이라고 남편이 이해못하는 항목을 고집스레 적느라고 애쓰는 제 모습도 웃음이 나고, 만들어 준다던 가계부 대신에 인터넷을 뒤지는 남편도 재밌고, 인터넷 가계부는 쓰지도 않을 거면서 '자기 좋은 걸로 해'하는 제 능청도 우습습니다.
"다음부터는 월급에서 공제되는 세금은 안 적을께."
이쯤에서 타협을 합니다.
남편과 저는 서른살이 넘게 서로 다른 환경과 생활습관을 가지고 살아오다 서른 둘에 결혼을 했습니다. 늦게 만나 늦게 결혼한 만큼 많이 사랑하며 살자고 약속했는데 틈틈이 하게 되는 부부싸움은 그런 약속을 무색하게 합니다.
대개가 무덤덤한 남편에 비해 작은 일에 쉽게 상처받는 소심하고 다혈질인 제가 싸움을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보통의 경우 이해못할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하지만 서로 마음에 상처를 주지만 않는다면 싸움은 이해와 소통의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위이겠습니다만, 생각이 달라서 싸우는 것보다 대화하지 않는 부부관계가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싸움이 함께 살아갈 공동체를 튼튼히 하는데 영양많은 거름이 되리라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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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초창기에 시민 기자 활동을 하며 사는 이야기에 글을 썼습니다. 후원회원이 되려고 18년만에 다시 로그인을 했습니다. 지금은 독서논술 지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