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LA행 대한항공 비행기는 막 김포공항을 날아올랐다. 이륙하느라 잠시 기체가 흔들리더니 비행기는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한반도의 수백 배가 넘는 거대한 태평양을 지나 세계의 지배자, 미국을 만나기 위한 머나먼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3등석에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도 제법 시끄러웠다.
"이렇게 덩치가 큰 비행기가 고작 두 개의 엔진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니. 야, 정말 대단하다. 저길 봐. 바다야."
아라는 처음 타는 비행기라 모든 게 신기했다. 기자 출신이면서도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않았다면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제주도도 구경해보지 못했다.
조국일보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촉망받는 사회부 기자였다. 그리고 1 년쯤 지나자 사내에서는 차기 주미특파원 영순위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간부들과 충돌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계속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 덕분에 그녀는 한 번도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지방에서 대형사건이 터지면 으레 특별취재단이 구성되기 마련인데 그녀는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런 대우를 받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국일보는 민족정론지라고 내세우면서도 노동조합조차도 없는 언론사였다. 물론 70년대에는 자유언론 노조가 있었다. 하지만 독재정권과 사주에 의해서 핵심 멤버들은 대부분 쫓겨나고 노조는 해체되었다.
아라가 입사할 당시에 편집국 기자들을 중심으로 노조를 구성할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사주와 간부들의 조직적인 방해 공작과 기자들의 해바라기 근성 때문에 노조 결성은 지지부진해지고 결국 핵심 기자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거기에 막차를 탄 것이 바로 아라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노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부 기자생활 1년을 하면서 노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자신이 쓴 비리와 고발 기사들이 번번이 사주와 간부들에 의해서 각색되거나 삭제되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노조가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결성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회사의 눈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1년 동안 그녀에게 무려 다섯 번이나 대기발령을 냈다. 그래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정작 그녀를 괴롭힌 것은 사주나 간부들의 압력보다 동료 기자들의 무관심이었다. 입만 열면 자유와 민주주주의를 외치는 자들이 정작 언론자유에는 눈을 감은 것이다.
마침 그때 오동민과 최강조가 '국민의 힘'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만약 그들의 제안이 없었다면 그녀는 지금도 계속 노조 결성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이미 결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그랬어? 그러면 지금쯤 청와대 출입기자나 하다 못해 유럽에서 특파원 조수노릇이라도 할 게 아냐."
얼도 그녀가 신문사를 나오게 된 경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너는 뭘 얼마나 잘했기에 쫓겨났어? 아마 난 기자 생활을 계속했다면 지금쯤 정신병원에 가 있을 거야. 그나저나 석이 놈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마 배가 아파서 아침도 못 먹었을 거야. 그지?"
아라는 갑자기 우석이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우석이가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밤잠을 설치며 호들갑을 떨든 그에게 방해물이 생긴 것이다. 갑자기 다른 사건이 생겨서 그에게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하늘을 보면서 우리 욕을 하고 있겠지. 의리 없는 인간들이라고 말야. 말은 안 했지만 아마 실망이 컸을 거야."
얼은 창 밖을 보면서 석이를 생각했다.
석이는 세상 이치에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마음의 고향처럼 생각했다. 다른 애들처럼 랩과 펑키 같은 미국 음악을 좋아하고, 또 농구와 야구를 즐겨했다. 게다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컴퓨터 역시 미국인들의 창조물이지 않은가? 그러니 얼마나 가보고 싶었을까?
얼은 바다 위에 비친 석이의 얼굴을 보면서 삥긋 웃었다.
"정말 꼴불견이야. 도대체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서 뭘 하겠다는 거야?"
갑자기 아라의 작은 목소리가 얼의 귀를 자극했다. 그녀는 곁눈질로 얼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훑어보고 있었다.
아라는 구름을 보고 싶다며 굳이 창가 자리를 고집했다. 그래서 얼이 선글라스를 낀 묘령의 아가씨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옷차림이나 외모로 봤을 때는 3등석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법 품위가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왜 그래? 너도 남자라고 예쁜 여자를 보니까 마음이 흔들려?"
아라는 얼이 다른 여자를 훔쳐보자 질투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 것 같은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서 봤더라?'
그는 선천적으로 관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났다. IQ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한 번 본 것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여자는 무척이나 눈에 익었다.
평범하거나 흔한 얼굴도 아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오뚝한 콧날과 가는 입술, 그리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턱 선은 그녀가 상당한 미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라가 자연미를 지닌 들꽃이라면 그녀는 온실 속에서 오랜 시간 가꿔진 난초였다.
"척 보면 모르냐? 실내에서 얼굴을 가리는 인간들은 딱 두 가지 유형밖에 없어. 하나는 주위로부터 관심을 끌어보려는 수작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애. 3등석에 탄 것을 보면 그녀가 1등석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라는 것일 테고, 선글라스를 낀 것은 이곳에서도 혹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 얼굴을 가린 거야.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 여자는 연예인일 가능성이 높아. 그것도 미국행을 숨겨야 할 정도로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연예인. 아마 1등석에는 그의 애인이 타고 있을 걸?"
아라는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직업은 속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기사를 쓰듯이 사람을 분석했다. 여자로서 자기보다 예쁜 상대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분석은 단순히 질투심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선천적으로 예쁜 얼굴을 지니기도 했지만 평소에 관리를 하지 않으면 그런 얼굴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것은 여자의 직업이 외모를 무기로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여자들이 모두 연예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라가 그렇게 판단한 것은 그녀가 선글라스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한 것 때문이었다. 인기 연예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까봐 연인과 영화를 보러 갈 때도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다.
아라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것을 연상했다. 그리고 언젠가 모 인기 여배우가 해외 여행을 갔는데 같은 비행기에 모 재벌 회장의 아들이 탔다고 해서 연예가에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잠이나 자둬라. 시차 적응을 잘못하면 고생한다."
얼은 더 이상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라의 생각은 달랐다.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얘기야? 지금 우리가 미국을 왜 가는지 생각해봐. 부실 기업주나 말썽 많은 재벌 2세들의 주위에는 항상 젊고 예쁜 여자들이 득실거린다 말야. 그건 이명세도 마찬가지야. 재작년인가? 인기 여가수와 염문을 뿌려서 한창 스포츠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렸어. 그뿐인 줄 알아? 연예부 기자들 얘기로는 그 자식 빽으로 연예계로 진출한 여자 연예인들이 한 둘이 아니래.... 야, 불황기에 항공사만 돈을 버는구나. 무슨 놈의 여행객들이 이렇게 많아?"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아라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기 때문에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라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IMF 초기 때만 해도 여행사들이 줄줄이 부도가 날 정도로 해외 여행객들이 없었는데 말야. 하긴 정부가 나서서 IMF 조기졸업을 선전하며 과소비를 부추겼으니 누구보고 탓하겠어? 이제는 IMF가 아니라 그 할애비가 와도 금 모으기와 같은 자기 전국민적인 운동은 일어나기 힘들 거야. 그런데 말이야....... 자냐?"
아라는 말을 하다 말고는 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사람은 잠들었을 때가 가장 편한 얼굴을 한다는데 얘는 왜 이럴까?"
아라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걱정을 했다. 그는 악몽을 꾸는지 잠을 자면서도 얼굴을 계속 찌푸리고 있었다.
'도저히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사연이 많은 것 같기는 한데 통 말을 하지 않으니....... 그리고 보니 얼이와 만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구나. 그래도 처음 봤을 때에 비해서는 많이 좋아졌다. 그 때는 세상의 고통은 혼자서 다 짊어지고 사는 것 같았는데. 저런 애가 뭐가 좋다고.......'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소설은 단행본 2권 분량으로, 앞으로 4달간 연재할 계획입니다.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