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국민의 힘 (제8회)

제 2 부 - 재벌 2세

등록 2001.07.20 14:43수정 2001.07.20 14:44
0
원고료로 응원
그녀는 사무실에서 얼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보는 순간 그녀는 그에게 빠져버렸다. 그렇다고 그가 얼굴이 잘 생겼거나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얼굴에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순수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그 동안 봐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입으로는 달콤하게 속삭이지만 속으로는 상대를 짓밟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 얼에게서는 그런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았다. 가끔 한 마디씩 던지는 그의 말속에서 그녀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그녀에게 그는 두 가지의 존재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연인으로서의 존재이다. 남자라면 외계인으로 생각하던 그녀에게 언제부터인가 얼이 이성의 존재로서 가슴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인생의 반면선생으로서의 존재이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그를 보면서 20년 넘게 쌓아온 자신의 속물 근성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사소한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려는 자세에서부터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관계에서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희생을 통해서 신뢰를 얻는 모습은 동갑이지만 인생의 선생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했다.

비근한 예로 사무실 청소나 허드렛일은 대부분 그의 차지였다. 한번은 단원들 모두가 사무실에서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신 적이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술을 깬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사무실 정리는 물론이고 해장국에 푸짐한 아침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술을 많이 마신 얼이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더구나 전날의 술판은 그의 입단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위험하고 힘든 일은 도맡아했다. 또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료 검토는 물론이고, 예행 연습까지 마쳐야 일을 시작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소극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단원들이 걱정할 정도로 저돌적이고 과감했다. 준비는 철저히 하되 일단 시작하면 물불을 안 가리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가 말보다는 행동을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가장 많이 얘기를 할 때는 회의시간이다. 그 순간만큼은 사소한 것까지도 꼼꼼하게 따진다. 하지만 그 외의 생활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말이 없다.

PR시대니,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는 화술을 지녀야 하느니 하면서 남성들을 수다꾼으로 만드는 세태에는 적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왠지 신뢰와 믿음이 갔다.


물론 그에게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 말수가 적고, 또 표정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어둡다. 그러다 보니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에게 익숙해져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단점마저도 좋아지게 되었다. 사랑의 힘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것 보세요. 이것 봐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이 옆에 앉은 선글라스를 낀 여자였다.

문제는 얼이었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괴로워했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라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녀가 발견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라는 얼보다 그녀를 먼저 보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TV드라마에서 들은 게 분명해. 아니, 영화에서 들었나?'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라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 나영아, 안돼! 나영아, 가면 안돼. 안돼!"
얼은 꿈속에서 누군가와 헤어지는지 간절하게 이름을 불렀다. 문제는 그 상대가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영이란 이름을 흘러나오는 순간 아라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건 결코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얼아, 정신차려. 얼아!"
"으음!"
그녀가 몸을 흔들자 얼은 간신히 눈을 떴다. 하지만 충격이 컸던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머, 이 땀 좀 봐. 젊으신 분이 몸이 안 좋은 모양이네요."
선글라스 여인은 손수건을 꺼내서 손수 얼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이리 주세요. 뜻은 고맙지만 제가 보살필게요."

손수건이 얼의 이마를 스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아라의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다. 그녀는 선글라스 여인을 한 번 노려보더니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선글라스 여인은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지 시선을 외면했다.

"싸움질은 잘도 하는 놈이 무슨 놈의 식은땀이야."
아라는 어느새 가방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을 닦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운 악몽을 꿨는지 이마뿐만이 아니라 전신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아라는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공연히 걱정을 끼쳐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전 한 얼이라고 하고, 이 친구는 김아라이고요."
그 사이 얼을 정신을 차리고 자신과 아라를 소개했다.
"저는 오미란이라고 해요. 두 분과 같이 여행을 하게 되어 기뻐요."
미란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자신을 소개했다.

'오미란이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후후후! 하긴 가명을 사용했겠지.' 아라는 기자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만약 단순히 여행을 하는 중이라면 계속해서 파고들어 상대의 신분을 반드시 밝혀냈을 것이다.

"고마워요. 자, 이걸 마시고 좀 쉬어."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물을 가져왔다. 아라가 그걸 받아서 얼에게 건넸다.
"음! 미안하다. 악몽을 꿨어.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얼은 물을 마시더니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디가 아픈 거야? 아니면 고소공포증이든지. 참, 넌 경찰 특수대 출신이라고 했지. 그건 그렇고....... 나영이란 여자 말이야. 누구야? 옛날 애인? 그 여자 얘기 좀 해 봐."
악몽을 꿀 정도의 여자라면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그는 3년이 지나도록 그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아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영아, 나는 네가 떠난 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단다. 이 비행기로 네가 있는 하늘나라까지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네가 없는 이곳은 너무 쓸쓸하구나. 나영아! 넌 덕수궁에서의 우리가 처음으로 입맞춤을 했을 때를 기억하니? 난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단다.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가슴속에서 밀려나오는 환희의.......'

그는 눈을 감고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꿈속이 아닌 현실세계에서의 시간여행이었다. 그 여행이 계속 되는 동안은 아라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소설은 단행본 2권 분량으로, 앞으로 4달간 연재할 계획입니다.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덧붙이는 글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소설은 단행본 2권 분량으로, 앞으로 4달간 연재할 계획입니다.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 가입하게 된 이유는 조중동의 언론독점의 폐혜를 극복하려는 오마이뉴스의 노선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자회원제를 통한 다양한 의견 수렴방식에 공감한다. 2. 나의 생각(소설, 사회비평)을 표현할 매체가 필요했다. 물론 다른 매체도 있지만 본인의 정치노선과 비슷하고, 글쓰기에 제약을 받지 않는 오마이뉴스를 선택하게 되었다. 3. 노동, 사회단체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얻은 경험으로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대세를 좇는 자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압록강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압록강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 2 경기가 끝난 뒤... 잠실야구장 vs. 월드컵경기장, 이렇게 달랐다 경기가 끝난 뒤... 잠실야구장 vs. 월드컵경기장, 이렇게 달랐다
  3. 3 '이재명 실패론' 유시민, 유튜브 여론은 비판 우세... 극우 채널에선 "잘 싸운다" '이재명 실패론' 유시민, 유튜브 여론은 비판 우세... 극우 채널에선 "잘 싸운다"
  4. 4 폭염경고 문자가 울린 날, 북한산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폭염경고 문자가 울린 날, 북한산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5. 5 일하러 와서 "딸처럼 편하게 지내자"?... 이건 아니죠 일하러 와서 "딸처럼 편하게 지내자"?... 이건 아니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