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여행 끝 '달표면'에 착륙하다

임현주의 <인도여행기>

등록 2001.07.24 11:12수정 2001.07.2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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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에서 보이는 곰빠. ⓒ 임현주
흔히 사람들은 '나닥(ladak : 인도의 잠무&카슈미르주에 속한 지역)' 을 '달표면'이라 부른다. 히말라야와 티벳 고원 사이에 위치한 나닥은 높은 산 위의 사막처럼 황량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마날리(manali)'란 마을에서 나닥의 중심도시인 '레(leh)'로 통하는 육로가 열리길 기다리며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마치 우주여행을 준비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달표면'이란 말만으로도 나닥은 인도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신비의 땅'이었던 것이다.


6월 초순경부터 마날리와 레를 잇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레로 향하는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됐다(보통 6월 말이나 7월 초순경이 되야 길이 열리는 게 정상인데, 작년 겨울 인도에 눈이 적게 와 올해는 일찍 열린 것이었다).

6월 8일, 나도 그 행렬에 끼여 마날리의 푸르름을 뒤로 하고 레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해발 4천고지 사막의 쌍봉 낙타 ⓒ 임현주
버스를 탄 지 2시간 즈음 지나자 해발 3400미터의 로탕패스(lotang pass)'가 나타나고 이 곳을 기점으로 초록빛의 세상은 끝이 났다. 로탕패스는 인도의 다양함을 새삼 실감나게 해주는 곳이었다. 눈쌓인 고원 위에 펼쳐진 풍경은, 그 옛날 유목민의 장엄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천막, 두꺼운 털모자를 쓰고 허리엔 칼을 차고 말을 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로탕패스를 지나자 초록빛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돌덩이, 돌산, 돌절벽뿐이라 가끔씩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타나는 휴게소가 인간세계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오랫동안 휴게소가 나타나지 않을 땐, '레'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도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버스는 작은 텐트촌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해발 3천미터를 달려온 사람들은 모두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고도 적응을 하지 못해 버스에서 내내 구토를 하며 온 사람들이 지친 모습으로 텐트에 누워 있는 풍경은 여행자가 아니라 방랑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다음날은 더욱 더 세상과 멀어진 느낌이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육로인 레로 가는 길은 사막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사막이 개발할 수 있는 한도에서 모두 개발시켜 놓은 느낌이라면, 이곳은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태고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 돌기둥, 돌궁전들은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몰래 숨겨놓은 것처럼 완벽한 모습이었다.

오후 무렵 해발 5328미터의 '타그랑라'를 지나자 서서히 사람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소를 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사람 사는 마을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을 주변으로 초록빛의 생물들이 함께 있었다. 그렇게 작은 마을들을 몇 개 지나치자 멀리서 '레'의 모습이 보였다. 높은 곳에서 본다면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마을처럼 황토색과 초록빛만 보이는 레.


레로 가는 길에 펼쳐진 돌기둥. ⓒ 임현주
버스 창 밖으로 우리를 향해 '줄레'(안녕하세요) '줄레' 하는 나닥키들의 인사말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레'가 세상에 존재하는 도시라는 안심이 들었다. 그때가 오후 7시. 꼬박 48시간을 달려, 드디어 달표면의 중심 '레'에 도착한 것이다.


느림에 대한 교훈

해발 3500고지에 자리한 '레'에 도착해 처음 느낀 것은 '호흡 곤란'이었다. 버스를 타고 5천고지를 넘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까지도 평평하게 잘 닦여있는 거리를 걷다가 숨이 차 가던 길을 멈춰야했다. 뿐만 아니라 강렬한 햇빛과 건조함 때문에 잠시만 바깥 외출을 해도 얼굴이 따갑고, 눈이 빠질 것 같이 아파 숙소 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지기까지 했다.

다행히 함께 한 일행 중 비상식량으로 고추장, 고춧가루, 미역 등을 갖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 김치와 미역국을 먹은 후부터 예전의 체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정말 고추장과 고춧가루는 그 어떤 약보다도 좋은 효과가 있었다).

체력이 회복되며 우리가 깨달은 레에서의 생활법은 모든 것을 느리게 하는 것이었다. 걸음걸이도 평상시보다 느리게, 말도 느리게, 이동도 느리게...

레의 시장 거리. 사람들은 많지만 시장은 다른 곳에 비해 매우 조용하다. ⓒ 임현주
성질 급한 나에게 모든 것을 한 템포 늦춰 움직인다는 것은 무척 고역이었다. 더구나 마지막 여행지라는 생각에 전과 달리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마음이 급해져 있는 나에게 '느림'은 말 자체로도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단어였다. 그러나 걷다가 말을 하거나, 급한 마음에 뛰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숨이 가파오고 머리가 아파 와 다시 느림으로 돌아가는 것이 레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많은 기대를 하고 레를 찾은 이들 중엔 호흡 곤란과 강렬한 햇빛, 건조함을 못이겨 서둘러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한 일행이 떠남 보다는 느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레 사람들 때문이었다. 거리에 나가면 나닥키 특유의 전통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줄레'(안녕하세요) 하고 씩씩하게 외쳐주고, 어린 아이들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줄레'하고 외치며 멀리 도망가는 모습에서 진한 사람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을 행사를 위해 나닥 전통옷을 입은 알치 마을의 소녀들, 지금 이들의 소원은 무거운 옷을 한시라도 빨리 벗는 것이란다. ⓒ 임현주
온통 돌덩이뿐인 이 곳에 물을 대 초록의 마을을 만들어 생활하는 나닥키들은 어려운 자연 환경에서 느림과 게으름의 선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서두르거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것이 전혀 게을러 보이지 않는 모습. 그런 그들의 모습은 오랜 고통 끝에 중용의 덕을 찾아 평안을 찾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고, 이제까지 만나온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건조하고 황량한 조건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냄새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은 <생태학 연구소>를 찾고 나서 조금씩 풀려 나갔다. 스웨덴 언어학자 '헬레나 누르보그 호지'의 노력으로 세워진 연구소는 나닥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건조하면서도 겨울엔 몹시 추운 기후 조건을 고려해 개발한 태양열 시스템과 농사법, 겨울나기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나닥 민속품 만들기. 이러한 노력들은 20여년 전부터 이들이 추구해온 나닥식의 발전 방법이었고, 그것은 최근 '나닥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수공예점을 방문했을 때 직원의 설명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전문적이거나 뛰어난 수공업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게 기술을 익히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헬레나가 쓴 책 <오래된 미래>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미래는 서구식의 발전 모델이 아니라 나닥식의 발전이었다. 그것은 곧 전통과 환경과 인간을 생각하는 발전이었다.

생태학 연구소. 박물관 한 벽에 그려진 환경 보호를 주제로한 그림 ⓒ 임현주
개발, 산업화가 곧 진보라고 생각하고 그 진보는 인간성 또는 전통과 반비례한다고 믿어왔던 나에게 나닥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조금은 비현실적이어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여유롭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은 바쁘고 숨막히는 삶에 지쳐 인도 여행이라는 돌파구를 마련한 나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6월 말, 나닥을 떠나 델리로 가기 위해 인도 파키스탄 분쟁지역인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 나닥 사람들의 삶의 방법인 느림과 헬레나와 나닥키들이 고민했던 인간적인 진보가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오래도록 나의 새로운 삶에 화두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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