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핏자국을 따라서 달렸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코너를 돌자 마피아들이 막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6층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놓치게 될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그 때 아라가 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어떻게 돼....... 우욱!"
그녀가 말을 하기 위해 숨을 들이쉬는 순간 피비린내가 입을 통해서 전신으로 전달되었다. 만약 그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면 그녀는 참지 못하고 토했을지도 모른다.
"저... 저 피는 뭐야? 혹시 누가 죽은 건......."
"걱정하지 마. 놈들이 시신까지 끌고 갔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얼은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렸다. 이런 얘기는 길게 해서 좋을 게 없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면 쓸데없는 걱정만 늘 뿐이다.
"하지만......."
아라는 아직까지도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사회부 기자 생활을 2년 동안 하면서 그녀는 피 냄새를 숱하게 맡았다. 하지만 다른 것과는 달라서 그건 아무리 맡아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복될수록 느낌은 더 나빴다.
특히 방금 자기가 맡았던 냄새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더 강하고 지독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덩치가 큰 친구가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서 흘린 피라 그랬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미란 씨를 구하는 거다. 다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
"아... 알았어. 그런데 몇 층에서 내리지?"
"일단 1 층에 내려서 상황을 봐야지. 그리고 이건 네가 좀 맡아야겠다."
얼은 상의를 벗더니 아라에게 건넸다. 상의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다행히 다른 곳은 멀쩡했다.
"알았어."
아라는 기자출신답게 새로운 상황에 금방 적응했다. 상의를 받아서 뒤집어 말더니 옆구리에 꼈다. 그런 다음에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아, 여긴 한국이 아냐. 아무리 무술을 잘하는 사람들도 총 앞에서는 무력한 법이야. 조심해야 해. 알았지?"
"걱정하지마. 이 놈이 내 몸을 보호해 줄 거야."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셔츠를 들어올렸다. 그 속에는 아까 품속에서 꺼냈던 두루말이가 감겨 있었다. 같은 것이 양 팔목과 발목에도 채워져 있었다.
"말도 안돼. 그걸로 총을 이긴다는 거야?"
지극히 정상적인 의문이었다. 겨우 손가락 길이 만한 나무로 사람의 몸을 관통하는 총을 상대로 이기겠다는 것은 강아지가 호랑이와 싸워 이기겠다는 것과 같은 발상이었다.
"싸움은 꼭 무기로만 하는 게 아냐. 우선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의 몸이 빨라야 하고, 또한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해야 해. 이것은 비록 힘이 약하고 속도도 느리지만 한꺼번에 여러 개를 날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게다가 급소에 정확하게 맞기만 하면 총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 가볍다는 것도 장점이고. 총알을 몸에 백 개쯤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봐라. 뛰어다니기도 버겁지. 하지만 이건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가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거야. 특히 현대식 무기를 선호하는 미국 놈들은 이런 것을 더 우습게 볼 거야. 그것도 내게는 유리한 점이지. 허허실실이라고나 할까?"
얼은 아라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잘 만들긴 했네. 이름이 뭐야?"
"이름? 아직 못 정했어. 네가 예쁜 걸로 한 번 지어 봐."
"내가? 정말 그렇게 해도 돼?"
"물론이지. 가능하면 귀엽고 부드러운 걸로 지어 줘."
"알았어. 사람을 해치는 무기이면서도 귀여운 거라....... 나무로 만든 날카로운 물체니까 그래, 나무 침. 목침(木針)이라고 하면 되겠다. 아냐. 그건 너무 딱딱해. 그럼, 비침(飛針)은 어때? 하늘을 날아다니는 침 말야. 안되겠지? 이거 참 고민이네. 그렇다고 햇님이나 달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얼이 계속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그것만으로도 얼의 목적은 이뤄진 셈이었다. 그는 아라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일부러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그럼 이건 어때? 은총이."
"은총이?"
"그래. 넌 그걸로 나쁜 사람을 올바른 길로 가게 하려는 거잖아. 그러니까 은총을 주는 거지. 종교적인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뭐 어때?"
얼이 관심을 보이자 그녀는 신이 나서 설명을 했다.
"후후, 짧은 시간에 지은 것치고는 좋은데? 그럼 앞으로 이 놈을 은총이라고 부르자."
"정말이야? 야, 신난다. 앞으로 우리 은총이를 조심해서 다뤄줘. 가능하면 잃어버리지 말고."
"알았다. 최선을 다할게."
두 사람이 얘기를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그들은 즉시 옆의 엘리베이터로 갔다. 납치범들이 어디에서 내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하 3층이야. 이쪽이다."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막 지하 3층에서 멈춰 섰다. 얼은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서 비상계단을 찾았다.
"그 쪽이 아냐. 얼아, 일단 밖으로 나가자."
이번에는 아라가 그를 제지했다. 그는 영문을 모른 체 그녀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택시!"
그녀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택시를 불렀다. 그녀가 본토발음으로 뭔가를 말하자 운전사는 대답을 하더니 곧바로 출발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기자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익힌 거야. 만약 사주나 국장의 말을 잘 들었으면 지금쯤 이곳에서 미국 년 행세를 하고 있겠지?"
"후후! 누가 뭐라고 하더냐?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아라가 머쓱해 하자 얼이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다 왔어. 저기야. 조금만 기다리면 놈들이 나타날 거야. 후후, 벌써 나타나셨군. 그럼 어디 한 번 쫓아가 볼까?"
택시가 도착한 곳은 지하 차고의 출구였다. 굳이 주차장으로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시간상으로도 비상계단으로 내려갔으면 놓쳤을지도 모른다. 두 대의 차가 지하주차장에서 올라오자 아라는 또 다시 운전사에게 뭐라고 말했다.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미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곧바로 생겼다. 같이 나왔던 두 대의 차가 불과 100미터도 가지 않아서 각자 다른 길로 갈라진 것이다.
"얼아, 어떻게 할까?"
"오른쪽으로 가."
얼은 앞서 달리던 검은 색 캐딜락을 택했다.
"만약 뒤에 차에 미란 씨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녀는 운전사에게 말을 하면서도 걱정하는 눈치였다.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간사했다. 그녀는 불과 20분전만 해도 미란을 미워했다. 헌데 지금은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
"잘 생각해봐. 너 같으면 살인을 하면서까지 납치한 여자를 부하들에게 맡기겠어?"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과 부자들이 돈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나 같은 원리였다. 얼은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요즘 연예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대로 한다면 순발력이 뛰어났다.
이 때부터 미행은 수월했다. 워낙에 차량들이 많아서 숨기도 쉽고, 또 영업용 택시라 앞차도 미행 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놈들이 무슨 이유로 미란 씨를 납치했을까? 부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말야."
아라는 한참 생각을 하고도 해답을 얻지 못했는지 얼에게 화살을 넘겼다. 하지만 모르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혹시 인신매매를 하려는 건 아닐까? 얼굴 반반하고 나이도 어리니까 제격이지. 게다가 요즘 미국에서는 동양계 여자들이 인기가 캡이래."
그녀는 나름대로 인신매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희생이 너무 커. 마피아들도 경찰들과의 충돌은 원치 않아. 헌데 이제 총격 사건이 터졌으니 경찰이 개입할 수밖에 없을 거야. 내일이면 언론에서 즉각 떠들 테고, 그러면 여론을 중시하는 미국 경찰들이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야. 결국 누군가가 희생양으로 처벌을 받겠지. 미란 씨 정도면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는 아니지만 내가 마피아 두목이라면 그렇게 무모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아.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게다가 놈들은 미란 씨가 호텔에 들어서기 전부터 미행한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호텔에 같이 들어 올 수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야?"
"내 생각은 그래.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미란 씨가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아."
"그 정도가 되려면 미란 씨가 그 자의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어야겠지?"
두 사람은 미란이의 납치 이유에 대해서 조금씩 의견 접근을 해갔다. 그 사이 케딜락은 LA에서 부자들만 산다는 비버리 힐스로 들어섰다.
"스톱. 잠시만."
차는 언덕 위로 약 500미터 정도 올라가더니 대저택으로 들어갔다. 택시는 정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길가에 세워졌다.
집은 베버리 힐스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저택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항상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정도로 잘 지어졌다. 이렇게 되면 인신매매를 위한 납치의 가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집의 주인이 인신매매와 같은 불법적인 사업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일수록 제 몸을 아끼고 또 신중하게 행동하는 법이다.
그들은 오늘과 같이 무모한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언론과 경찰에 집중타를 맞아서 평생을 감방에서 썩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는가?
"정문으로 가자고 해봐."
"어떻게 하려고?"
"주소를 확인해야 집주인이 누군지 알지."
"그럴 필요가 없어. 여긴 블록별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돼. 저쪽이 70번지니까 그럼 73번지겠군. 저기에 적혀 있는 게 보이지?"
미국의 주택들은 도로를 중심으로 순서대로 세워졌기 때문에 주소 확인이 쉬웠다. 게다가 집 앞에는 주소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그럼 어디 한 번 어떤 인간이 사는지 확인해볼까?"
아라는 품속에서 손바닥 크기 만한 PDA컴퓨터를 꺼내더니 주소를 입력했다. 이제 잠시 후면 집주인의 신상 명세가 드러날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이곳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혹시 이건가?"
그녀는 종이 쪽지들을 확인하다가 여러 번 접은 작은 메모지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얼아! 이걸 봐."
"왜 그래? 아는 사람 집이야? 그렇다면......."
얼은 메모지에 적힌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아라를 쳐다보았다.
"그래, 이곳은 이명세의 집이야. 미란 씨는 놈의 부하들에게 납치된 거야."
메모지에는 이명세의 신상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일이 잘 풀리는 건지, 안 풀리는 건지 모르겠군."
얼은 이명세의 대저택을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냥 두면 미란 씨가 위험할 텐데."
"아라 넌 차를 한 대 구해서 여기서 기다려라."
"혼자 들어가려고? 집안에는 더 많은 놈들이 있을 텐데. 그리고 감시카메라와 보안장치들이 잘돼 있어서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마. 그리고 내가 나오기 전에는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된다. 만약 2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차라리 경찰에 연락해라."
"그래도......."
아라는 얼이 혼자 들어가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미국이란 땅은 설사 경찰이라고 해도 영장이 없는 한 남의 사유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만약 안으로 들어가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막을 재간이 없다는 말이다. 미국에서는 허가만 얻으면 총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침입자에게 총을 사용했다고 하면 그뿐이다.
"걱정하지 마. 은총이가 있잖아. 난 오히려 네가 걱정된다.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더라도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된다. 알았지?"
얼은 은총이를 보여주며 아라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하긴 고작 나무 조각으로 총을 상대하겠다는 데 누가 그것을 믿고 안심할 수 있겠는가? 그 말만 남기고 얼은 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7시가 넘어 주위는 어두워졌다. 길가는 가로등 때문에 대낮처럼 밝았지만 담벼락 근처는 캄캄했다. 게다가 정문의 왼쪽 편에는 담벼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그는 그 속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미련한 놈. 그 계집이 안에 없다고 해도 이렇게 서둘러 들어갔을까? 하긴 남자가 위험에 빠진 여자를 두고 눈치만 살피는 것도 꼴불견이지. 아무튼 멋있는 놈이란 말씀이야. 저런 놈을 잡지 못하면 난 평생 후회할 거야. 조금 무뚝뚝한 게 흠이긴 하지만 수다스러운 인간들에 비하면 오히려 매력이라고 할 수 있지. 두고 봐. 경쟁 상대가 누가 됐던 난 저 놈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아저씨, 렌트카를 빌릴 수 있는 곳으로 가요. 아차! 여긴 서울이 아니지. 호호호! 미스터, ......."
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라를 태운 택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소설은 단행본 2권 분량으로, 앞으로 4달간 연재할 계획입니다.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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