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그릇에 담아낸 '베트남'

<베트남, 또 하나의 미래>에 실린 글들을 읽다

등록 2001.07.24 18:32수정 2001.07.2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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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과 피학,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 호치민, 구찌 터널, 반전 히피운동, 돌아온 김상사...

베트남이란 나라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단어들이다. 한국의 작가들은 올 1월 16일 이 '애증(愛憎)의 땅' 베트남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과 '적대적인 과거사를 청산하고, 향후 긴밀히 교류'하기로 정식적 문화수교를 맺었다.


물론 정식 수교 이전에도 한국문학에서 베트남은 생경한 소재가 아니었다. 안정효와 박영한은 각각 <하얀 전쟁>과 <머나먼 쏭바강>을 통해 베트남전을 소설화한 바 있으며, 86년 출간된 구엔 반 봉의 <사이공의 흰옷>은 60년대 베트남 학생운동을 다뤄 스테디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90년대 말엔 바오 닌의 장편소설 <전쟁의 슬픔>이 번역·출간돼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과 베트남 작가들의 교류가 본격화되면서,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들의 베트남 방문도 늘고 있다. 지난 6월1일엔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회장 방현석. 이하 베트남 작가모임)' 회원을 포함한 30여 명의 문인들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신경림, 김준태, 김영현, 이경자 등 단체의 이름과는 다르게 젊지 않은(?) 작가들도 방문단에 다수 포함됐다. 하긴, 젊음이란 열정과 마인드의 문제이지 나이가 뭐 그리 대수일까.

<베트남, 또 하나의 미래>는 이 젊은 작가 30여 명의 베트남 기행을 특집으로 꾸민 '베트남 작가모임'의 소식지다. 호화스런 장정과 화려한 표지로 꾸며진 책들이 난무하는 세태에서 고작 32페이지의 누런 종이로 만든 소식지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는 뭘까? 그 안에 담고있는 진지함과 진솔함일 터.

자타공인 '베트남 전문가' 김남일의 뒤를 이어 모임의 회장을 맡은 방현석은 '과거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상대와 소통하려는 눈길을 가진 사람이 젊은 작가'라고 정의하고, '앞으로도 베트남과 역사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고 진솔한 소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신임 인사말을 전했다. 이 '진솔한 소통'은 94년 모임의 출범부터 견지한 '깊은 관심'과 '낮은 목소리'의 큰 틀 안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베트남 작가모임 회원들의 중론.


한국 시인들의 기행시와 베트남 작가들의 대표시로 꾸민 특집란. 이재무의 '베트남에서 돌아온 P시인에게'가 눈에 띈다. 수난의 국가 베트남과 죄 짓고 살기 일쑤인 인간에 대한 애정이 촘촘한 행간마다 무시로 드러나고 있어 시는 피가 도는 듯 따뜻하다.

'게릴라처럼 급습했다 사라지는 스콜이 야자수와 메콩강을 살찌우는/자존의 나라 베트남에 와서 나는 뒤늦게 사랑을 배웠다네/용서의 지혜를 읽었다네. 그리고 늦게 찾아온 참회를 여기에 적네.../우리들 아버지와 삼촌을 이어 또 한번 그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을/오 친구여. 베트남을 다녀와서 불쑥 어른으로 성장한 친구여.'


<대한뉴스>를 통해 본 파월 장병의 승전보와 김추자의 노래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하던 베트남전쟁이 그들에겐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죄스러움을 느꼈다는 이재무는 위 시를 통해 넉넉히 베트남과 화해하고 있다.

시에서 P로 명명된 이는 "베트남의 국민시인 탄타오의 찬사를 자아냈던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의 작가인 박철"이라고 모임의 사무국장 고영직은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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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16일 한·베 작가합의문 서명식장 ⓒ모순영


이재무, 전성호, 정영주 등 한국시인의 작품 옆에 나란히 실린 베트남 작가 찜짱, 탄타오, 반레의 '수련꽃' '밀라이의 아이'같은 시들을 보면, 사람보다 시가 먼저 어깨동무를 하는 것 같아 보기가 흐뭇하다. 무릇 비적대적인 쌍방의 연대는 '몸'보다 '상상력'에서부터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시인 임동확은 '베트남과 내 고향 사이의 거리'라는 글에서 월남전과 80년 광주항쟁을 번갈아 떠올리며 베트남 병사(베트콩)에 대한 어린 시절 자신의 근거 없는 적의와 증오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술회하고 있다. 그는 그 엇나간 증오와 적의를 몇 년 전 미국 백악관 앞 노상에서 베트남 여인에게 처음으로 사죄했다고 고백한다.

베트남을 다녀온 작가들이 너나 없이 혀를 차는 꼴불견이 있다. 베트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어깨에 힘을 주고 내리깐 시선으로 베트남인들을 보는 한국사람들. 술집과 홍등가에서 아오자이의 여인을 거래하는 중년의 남성들. 그 모습은 흡사 온갖 패악을 행하고 고향을 떠났다가, 돈푼이나 벌어와 거들먹거리는 패륜아의 그것과 다름없다고 그들은 전한다.

베트남 작가모임 전임 회장 김남일의 '일본, 한국 그리고 베트남'은 바로 이 "남의 눈에 들어간 티끌은 보면서 자신의 눈에 박힌 서까래는 보지 못하"는 우리의 천박함을 꾸짖고 있다. 일본이 우리에게 행한 악덕과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는 목청을 높이면서, 우리가 다른 민족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한 자기 반성에는 무심하다면 대체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가르칠 것인가?

2세로 이어지는 고엽제 환자의 비극을 다룬 이대환의 <슬로우 블릿>을 소개하는 글 '전쟁의 그늘'에서 평론가 고영직이 말한다. '고엽제 후유증이 유전되듯 전쟁의 그늘 역시 우리 세대에게 드리워져 있다'고, '나와 전혀 무관한 과거사로 비칠지 모르지만 이제 그 과거사의 어두운 장막을 열어 젖히는 일은 미참전 세대의 몫으로 남았다'고.

'외세에 의한 강점'과 '민족간의 전쟁'이라는 아픔의 공통분모를 가진 한국과 베트남. "양국이 화해하고, 공생의 길을 걷는데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는 게 베트남 작가모임의 소박한 바람이다.

<베트남, 또 하나의 선택>에 담겨 있는 작가들의 따스한 진실을 읽고나니 그 '소박한 바람'이 허사(虛辭)만은 아님이 단박에 느껴진다.

이쯤에서 전쟁의 아픔을 아픔만으로 끝내지 않고, 그 아픔으로 붉은 수련 한 송이 피워낸 베트남 시인 찜짱의 시 한 편을 감상하는 것도 의미있을 듯하다.

수련꽃

이른 아침 뜰에 나가 수련꽃을 땄네
폭탄 구덩이 아래 어머니가 심은 수련꽃
아아, 어디가 아프길래 물밑 바닥부터
잔물결 끝도 없이 일렁이는가

몇 해 지나 폭탄 구덩이 여전히 거기에 있어
야자수 이파리 푸른 물결을 덮고
아아, 우리 누이의 살점이던가
수련꽃 오늘 더욱 붉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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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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