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의 멍에가 되어 버린 빚더미여!"

신용사회의 비극

등록 2001.07.24 18:40수정 2001.07.25 16:23
0
원고료로 응원
"지난 봄만 해도 신용카드 없이 사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은행에 오가지도 않고 통장 거래할 일도 없이 살 수 있다면 하는 게 최대의 바램입니다."

이달초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이 있는 김제로 귀향한 허오현(가명.38) 씨는 집으로 날아드는 우편물만 보아도 일순 긴장할 만큼 신경쇠약에 걸려 있다. 칠년전부터 사용하던 휴대전화도 벌써 세번째 번호를 바꿔 놓아 하루에 한 두통씩 걸려 올 뿐인데도, 전화 신호음만 울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허씨가 이렇게 우편물이나 전화에 신경 쓰이는 것은, 벌써 1억원 가까이에 이른 빚 독촉 때문이다.

그렇다고 허씨가 빚을 떼 먹고 숨어 다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 누구에게 얼마이고, 원금이나 이자가 얼마나 밀려 있는지를 수첩에 빼곡히 적어 두고 매일같이 이 기록을 들여다 보면서 한숨을 내쉰다. 빚 독촉을 받으면서도 돈 마련할 길이 없고, 그렇다고 금전을 변통할 길도 없다 보니, 하루 하루가 가시방석같은 것이다.

허씨가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2월부터 숙소 대신 사무실 구석에서 잠을 자며 매달 3백만원씩의 월급을 받았으면서도, 항상 호주머니에 천원짜리 서너장 갖고 사는 생활마저 이어가지 못할 정도가 되어, 대책없이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도대체 빚이 얼마나 되길래, 3백만원 월급으로 버티질 못한 것일까?
그가 몇 달 동안 월급 받은 돈으로 사용한 내역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서울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쓴 돈은 평균 4-5천원, 빨래할 곳이 없어 일주일 동안 빨래거릴 모아 뒀다가 주말에 집에 왔다 가느라고 쓴 기차삯까지 합쳐서 그가 한달 동안 서울생활과 교통비로 쓴 돈은 겨우 24, 5만원 정도였다.

나머지 돈은 그럼... 밀려 있던 카드 대금과 은행 대출금 이자 등으로 모두 나가고도, 아직 빚은 산더미같다고 한다. 그러니까 허씨는 월급 받아서 쓸 돈 쓰고 나머지를 저축하거나 빚 갚는데 쓴 게 아니고, 월급 받아 모두를 빚 갚는데 밀어 넣으며 그야말로 최소한의 돈만을 썼던 것이다.


"그나마 5월 들어서는 신용불량 거래자로 등록되어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금 서비스를 받아 변통했던 대출 이자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게다가 허씨가 다니던 회사는 6월 들어 자금 사정이 나빠져 월급을 주지 못했다. 본인이 이미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터에 유일한 수입원인 월급이 끊기니, 더 이상 살길이 막막했던 것. 그렇다고 딱 한 달 월급 밀렸다고 직장을 그만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몇년동안에 주변 지인들에게 신세를 많이 지다 보니, 신용도 떨어지고 더 이상 돈을 변통할 곳도 꽉 막힌 상태에서, 제가 급전을 변통할 수 있는 신용카드도 사용할 수 없고, 월급도 나오질 않으니,버틸 재간이 없더군요."

허씨는 결국 한 일주일 동안을 하루 한끼만을 회사 동료들 틈에서 얻어 먹고, 화장실에서 세수하며 버티다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고향행 기차는 다행히 철도회원 보너스 포인트가 쌓여 무임승차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날 기차 역에서 내려 짐보따리 둘러 메고 터벅터벅 집으로 걷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들이 다행이 아직 어려서 눈치를 못챘지만, 아내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더군요. 그래도 아내가 마음 상할까봐 대문간에서 씩 웃으며 얼굴 한 번 쳐다 보고 슬쩍 고개를 돌려 딴전을 피웠죠."

허씨는 그날밤 대문에 들어서자 마자 강아지 똥이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핑계대며, 빗자루를 들고 온 마당을 쓸었다고 한다. 감당하지 못할만큼 많은 빚더미, 그럼 그와 그의 가족은 요즘 굶고 있는 걸까?

다행히 굶지는 않고 있다는데, 그 이유는 그래도 아내가 작은 꽃가게를 하며 버는 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얘길 듣고 보니, 기자는 또 한번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남편은 한 달에 3백만원씩 월급을 받고, 아내는 작다지만 꽃가게를 해서 벌고 하며, 그야말로 전형적인 맞벌이를 하고 있는 가족이 왜 빚더미에 신음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남편은 월급 한 달 못탔다고 직장을 그만 두고, 은행 거래 없는 세상을 갈구하는 것인가?
1억원의 부채를 상식적으로 손가락 셈하자면, 연리 24%의 이자를 기준으로 해도 한달에 2백만원, 거기에다가 원금을 백만원식 상환한다 해도,합쳐서 3백만원이다.

얼른 생각하면 허씨의 월급이 고스란히 빚 갚는데 쓰이고, 허씨의 아내가 꽃가게에서 버는 돈으로 아껴 쓰면, 그럭저럭 생활은 될 터이다.

"문제는 상환기일이 닥쳐 있거나 급전으로 변통했던 빚입니다. 이 달에 4백만원 밀어 넣어야 하고 다음달에 6백만원 밀어 넣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두 달 사이에 7백만원을 또 빌려 변통해야 하는 거죠.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갚아 줘야 할 때가 눈 앞에 닥쳐 와 있는 빚이 한 두건이 아닌거죠."

얘기를 들을수록 기자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나중엔 가슴마저 답답하다. 대체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처음 예상치 못했던 빚은 보증에서 시작됐습니다. 집안 형님이 사업하다 부도를 내면서 제 연봉의 다섯배 정도 되는 빚을 갑작스레 떠 안게 됐던 겁니다. 이것을 기화로 해서 벌써 9년째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죠."

허씨의 불행 역시, 남다른 것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보증 피해 사례 중 하나였다.

"보증 피해를 입었더 저 자신이 저를 도와 준 가까운 사람에게 그 보증피해를 전가해 줄 뻔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미 몇 번 그런 위기가 있었던 걸 가까스로 넘겼는데, 다시 또 위기를 맞은 거죠."

허씨의 얘기 중에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최근 몇년 사이 이미 남에게 몇 차례 돈을 떼였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그만둔 직장 뿐 아니라 작년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3백만원 가량 월급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고, 그 전에 벌였던 개인사업을 하면서는 거래처로부터 2천만원 조금 넘는 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대체 그럼 허씨는 자기가 받을 돈도 받지 못하고서 빚에 허덕이는,아주 물컹한 사람인가? (다음 기사에 계속)

덧붙이는 글 | 기자가 만난 허씨는,최근 십년 사이에 겪고 있는 불행에 지쳐 이제는 아예 자신의 숙명인 듯 여겨진다고 말한다. 신용 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수많은 비극적 멜로 드라마들 중 한 사례인 허씨의 이야기를, 장황하겠지만 몇 차례 연재를 통해, 자세히 들어 보자.

덧붙이는 글 기자가 만난 허씨는,최근 십년 사이에 겪고 있는 불행에 지쳐 이제는 아예 자신의 숙명인 듯 여겨진다고 말한다. 신용 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수많은 비극적 멜로 드라마들 중 한 사례인 허씨의 이야기를, 장황하겠지만 몇 차례 연재를 통해, 자세히 들어 보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배우 활동의 마음 3% 정도... 무당으로서 우선 잘하고 싶어" "배우 활동의 마음 3% 정도... 무당으로서 우선 잘하고 싶어"
  2. 2 '참교육' 본 아이들의 예상 밖 반응...교사를 당혹케 한 한마디 '참교육' 본 아이들의 예상 밖 반응...교사를 당혹케 한 한마디
  3. 3 대문 열자마자 감동 받은 집, 가구 보고 놀란 이유 대문 열자마자 감동 받은 집, 가구 보고 놀란 이유
  4. 4 '멸종' 일본 수달이 돌아왔다? 유전자 검사 결과 '반전' '멸종' 일본 수달이 돌아왔다? 유전자 검사 결과 '반전'
  5. 5 "날 왜 낳았어" 폭발한 사춘기 아들 무장해제 시킨 남편의 한 마디 "날 왜 낳았어" 폭발한 사춘기 아들 무장해제 시킨 남편의 한 마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