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피해 주민들의 전철선로 점거농성

등록 2001.07.25 11:08수정 2001.07.2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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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현란한 연예인들과 사랑, 불륜 타령의 드라마 '홍수'. 하지만 장마철 '홍수'에 단골로 TV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지하 방에 사는 사람들, 낮은 지대 거주민들, 재개발지역 주민들.

TV 연예인들과 요즘 중산층들은 시대와 유행에 따라 차림새와 말투도 '세련'되게 바뀌었지만 침수피해지역의 아저씨, 아줌마들의 모습은 60년대나 70년대의 그것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그을린 얼굴, 유행과 관계없는 듯한 옷차림. 그 서민들이, 화려함으로 도배질된 TV화면에 홀려서 잊고 있던 그 서민들이, 장마와 함께 홀연히 시청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서민들은 거친 항변의 말투에 전철 선로 점거 농성을 벌이는 '과격분자'로서 화면에 등장했다. TV카메라는 농성 장면을 보여 준 뒤 곧바로 몇몇 전철승객들에게로 옮겨간다. 그리고 진부한 질문과 뻔한 대답. "선로점거농성에 대한 생각은?" "시민의 발목을 붙잡고 불편을 주는 부당한 항의방법". '외대 앞 역 휘경 건널목의 전철선로를 점거농성하는 침수피해주민들'의 모습을 전하는 7월 16일 저녁 9시 TV 뉴스의 한 대목이었다.

신문들도 거의 마찬가지 논조였다. "점거농성으로 인천으로 향하던 하행선 전동차가 신이문역에서 정차, 이용객들이 다른 교통편으로 갈아타는 큰 불편을 겪었다"는 식의 단정적 보도 일색이다. 단지 7월 18일자 <경향신문>만이 '선로점거농성'의 경위와 주민들의 항변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싣고 있었다.

"공무원들이 사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집이 완전 침수됐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져 어쩔 수 없이 철로를 점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일요일 서울지역 집중호우로 집이 완전히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보자 '당국의 늑장대응으로 피해가 커졌다'며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돼 사법처리대상이 된 김모(24. 회사원. 서울 동대문구 휘경1동) 씨.

김 씨는 지난 16일 오후 10시 50분께 동네주민 100여명과 함께 지하철 1호선 외대앞 역 철로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돼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상태다. 함께 붙잡힌 23명은 모두 풀려났지만 주동자라는 이유로 김 씨만 아직 풀려나지 않았다.

김 씨는 18일 자신의 행동이 비록 불법이었지만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는 "수해당시 대피방송을 들은 바도 없고, 배수펌프시설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었다"며 "퇴근길에 동네 주민들이 철로를 점거한 것을 보고 당국의 처사에 화가 나서 농성중이던 시위대에 동참, 구호를 외쳤다"고 말했다.

김 씨는 "시민의 발인 지하철 선로를 점거한 채 시위를 한 것은 무리한 감도 있지만 거리에 나앉게 된 주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며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수해는 천재에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이 가세한 관재(官災)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점거시위는 지나쳤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온당한 대응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취재하고 기사화한 언론인들의 집이 당국의 무관심 속에 졸지에 물에 잠기는 것을 지켜봐야 했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하다. 사회적 지위와 재산도 좀 있고 아는 것도 많으니 여유있고 침착하게 법적 대응을 할 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사회 기득권층과 인맥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일의 해결은 한결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들의 최후의 휴식처라고도 할 수 있는 집이 물에 잠기고 허물어져 내리는 순간, 같이 무너져 내리는 억장과 잠기는 가슴에서 나온 항변의 몸짓에 대해 법을 집행하는 법관은 몰라도, 현장을 직접 취재한 기자들이라면 농성자들의 심정을 헤아려 줄 수는 없었을까? (정치인들 심정은 잘 헤아려 기사 취사선택하면서 말이다).

경찰은 "철로를 점거한 김 씨의 행동은 형법상 징역 1년 이상의 중형에 처해지게돼 있는 중벌"이라며 "비록 집이 완전 침수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법질서 확립차원에서 검찰의 지휘를 받아 원칙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경향 7. 18).


매향리 주민들이 '미 공군 폭격장 철거' 시위를 수년동안 했음에도 불구, 당국의 반응이 없자 자조적으로 "당국의 무응답은 바로 '무식한 자들아, 참고 살아라'라는 뜻이다"라고 푸념했다. 제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주민 시위자들은 지금도 위의 '김 씨'의 경우처럼 '법질서 확립차원에서 원칙대로 처리'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일은 예전에는 피해에 대해 대체로 순응하던 서민들이 권리의식에 점차 눈 떠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민들이여, 국가에 의무(납세, 국방)를 한만큼 권리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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