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나는 게 촌사람뿐이구나'

[인터넷 문학기행]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을 찾아서

등록 2001.07.25 17:00수정 2001.07.2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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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메 마을, 앞 쪽 느티나무는 시인이 심은 나무다. ⓒ 김도수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中 일부>

▲비포장 적성댐 가는 길 도중에 왜가리를 만났다. ⓒ 조호진
전라도 실핏줄 같은 섬진강 변의 가난하고 작은 '진메 마을'에서 시인은 태어났다. 그의 마을은 지도에도 없다. 마을 자락에 핀 풀들도 식물도감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쌀밥 같은 토끼풀꽃과 숯불 같은 자운영 꽃이 흐드러진 섬진강 변, 강은 뼈 으스러지게 그리움을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 뿐이다.


내 친구,
서울에서 돈 못 벌고
중동을 다녀와도 어쩐지 우리는 못 산다며
첩첩산중으로 못난 여자 데리고
검은 염소 몇 마리 끌고 돌아왔지.

<섬진강 8 中 일부>

▲시인의 강 ⓒ 조호진
고향의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익어 정들어, 정든 이 땅의 사랑을 더 키우기 위해 불빛을 하나 둘 켜는 진메 마을, 세상에 치이고 버려지는 못난 친구와 마을 이웃들의 눈물을 보듬던 시인은 세상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면 저무는 강변에 나가 팍팍한 마음 한 끝을 강물에 적셔 풀어보냈다.

나는 누님의 어둔 등에 기대고 싶은 슬픔으로 이만치 떨어져 언제나 서 있곤 했지요. 그런 나를 어쩌다 누님이, 누님의 가슴에 꼭 껴안아주면 나는 누님의 그 끝없이 포근한 가슴 깊은 곳이 얼마나 아늑했는지 모릅니다.
<섬진강 4 -누님의 초상 中 일부>

전쟁이 끝난 어느 가을날 노을보다 먼저 징검다리를 건너 강변에 가 앉은 누님, 오지 않는 그이를 기다리다 서러운 강물을 쓸어안으며 쓰러진 누님, 이 가을과 긴 어둠의 겨울을 뚫고 그이가 눈부시게 돌아올 것이라고 끝내 믿던 누님...

▲강을 건너는 마을주민 ⓒ 조호진

"애야, 내가 죽으면
내 간을 꺼내 보거라
내 간이 있는가 다 녹아 부렀는가."

<섬진강 24 -맑은 날 中 일부>


▲진메 덕치초등학교 ⓒ 김도수
아흔 넷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상은 호상(好喪)이었다. 객지에서 조카들이 돌아오고 친척들이 호곡(號哭)을 하면서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처럼 굴뚝마다 연기가 나고 방들이 따뜻해지고 또 평화스럽고 아늑해졌다. 마당의 노름꾼들은 "패 돌려 패, 누구 잡을 차례지" 하며 자리를 잡고, 윷이야! 모야! 윷판이 벌어지고 부엌은 부산해졌다.

앞산 밭가에 굴을 파고
배고파 우는 너그덜 입을 틀어막으며
밤과 낮 따로따로 시달리며
풀뿌리 나무껍질로
모진 목숨을 연명했느니라

<어머니 이야기 -밭가에서 中 일부>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장소인 천담마을 ⓒ 조호진

회문산의 빨치산과 토벌대의 등살에 죽어나가던 시절에 태어난 1948년생 시인의 가족사... 개처럼 끌려가 개처럼 두들겨 맞고 돌아온 아버지, 어머니는 살이 찢기고 터진 아버지를 된장을 바르고 똥물을 먹여 살렸다.

너그덜은 고향 떠나
타관에서 가난에 쫓기고
우리는 여기 남아 이날 입때까지
이제나 저제나 마찬가지로 사니
죽어나는 게 촌사람뿐이구나

<어머니 이야기 -밭가에서 中 일부>

▲진메 가까운 장천계곡 ⓒ 조호진

북해도 탄광에 징용 당해 끌려갔던 아버지, 숟가락 몽댕이 하나 없이 분가해 가난한 식솔을 일군 아버지는 어느덧 세상을 떠났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선 피눈물이 나는 줄 알며 살아온 어머니는 타관객지로 떠도는 자식들 생각에 설움이 복받쳐 울어야 했다.

앞산에 꽃이 지누나 봄이 가누나
해마다 저 산에 꽃 피고 지는 일
저 산 일인 줄만 알았더니
그대 보내고 돌아서며
내 일인 줄도 인자는 알겠네.

<'일' 전재>

▲섬진강 문학기행 순례단들 ⓒ 전남 동사연

할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광웅이 형님이 죽고 남주 형이 죽고 그 다음에는 내 차례인가... 육친보다 더 좋아하던 두 시인의 죽음에 시인은 희망도 잡을 끈도 다 놓아버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시인의 몸은 극도로 악화됐고 정신은 허방을 딛으며 한 동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꽃이 핍니다
꽃이 집니다
꽃 피고 지는 곳
강물입니다
강 같은 세월이었지요.

<'강 같은 세월' 전재>

▲적성댐 건설 예정지 ⓒ 조호진

죽음과 대면까지 했던 시인은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만이 인간을, 문학을 세운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남녘 땅의 온갖 죽음과 대결의 궁극적 피울음은 증오였고 분노였던 것... 시인은 자신이 강 같은 세월로 부침(浮沈) 했음을 조용히 고백했다.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며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그대 생의 솔숲에서' 전재>

▲능수화가 드리워진 시인의 집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 조호진
시인은 과연 진메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천담분교, 마암분교, 덕치분교에서 다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자신의 느티나무와 강물과 바위들과 나무들, 평화로운 논밭 다랑지들, 진메의 늙은 이웃들과 옛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환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른 강물인가를.

<'섬진강 1' 中 일부>

▲진메 마을 징검다리 ⓒ 김도수

건설교통부는 전국의 12곳에 댐을 짓겠다고 지난 11일 발표했다. 이번 발표에 포함된 적성댐은 전북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와 임실군 강진면 일대의 240만평을 수몰시키게 된다. 이 계획대로라면 시인의 고향인 진메 마을과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장소로 천혜의 절경을 보여준 천담, 구담, 장구목 등이 물에 잠기게 된다.

▲김용택 시인 ⓒ 조호진
이건 몇 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달려들어 골재 채취를 일삼던 예전의 사건이 아니다. 지난 20일 취재 간 기자에게 시인은 "이걸 어쩌면 좋대유, 이걸 어쩌면 좋대유"라며 연신 안절부절했다.

정든 길을 코앞에 두고
얼마나 흐르고 싶은 심정이랴
흐르고픈 마음들을
서로 부둥켜 얼싸안고
물은 갇혀서도
저렇게 시퍼렇구나
깊을수록 저 깊이에는
푸른 하늘 한자락 보이지 않고
다정한 산굽이 하나 보이지 않는구나
굽이치지 못하는 슬픈 물굽이들이
얼마나 크게 힘쓰기에
물은 저렇게 흐를 길이 막혀도 썩지 않고
캄캄하도록 시퍼렇게
제 깊이를 만드느냐

<'섬진강 댐에서' 中 일부>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소식에 '그게 뭔 소리여!' 탄식하는 노인들 ⓒ 조호진

시인은 오래 전 마을 인근의 섬진강댐이 건설될 당시에도 '캄캄하고 시퍼런'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 문학의 젖줄마저 수몰시키려는 정부의 계획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댐을 앞에 두고 또 댐을 짓는다고..."

시인은 이 곳에서 '섬진강' 연작시를 포함해 '섬진강 이야기'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등의 산문과 창작동화 '옥이야 진메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등을 썼다. 그의 문학과 삶이 온전히 뿌리내린 섬진강이 물에 잠긴다면 할머니와 누이, 아버지와 형제, 마을 이웃들의 삶과 죽음 혹은 꽃이 피고 지던 앞 강물과 뒷산 또한 한 순간에 수장될 수밖에 없다.

▲추억의 책보, 진메 출신 김도수 씨는 주말이면 고향을 찾아와 자녀들에게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준다 ⓒ 김도수

진메가 포함된 섬진강 변은 시인의 고향만이 아니다. 특히 진메 마을은 고향을 잃어버린 수많은 '실향민'들이 대신 찾아와 피곤한 삶을 치료하는 안식의 고향이었다. 문학의 고향이자 영혼의 피난처 노릇을 한 진메 마을의 강과 들꽃과 골짜기는 문학기행으로 찾는 길 잃은 길손들을 어머니처럼 포근히 반겨주었다.

▲천담마을에서 내려본 섬진강 ⓒ 김인호
정부가 건설 계획대로 섬진강변을 수몰시킨다면 그들의 눈물은 댐을 차고 넘치게 할지도 모른다. 들꽃처럼, 강물처럼 고향에 남아 아이를 가르치고 시를 쓰던 키 작은 시인은 실성한 이 시대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시인은 최근에 펴낸 '섬진강 이야기 1·2(열림원)' 두 권의 인세를 환경운동연합에 기부했다. 시인은 이제 향수 어린 추억만으로 떠올릴 수 없는 고향, 차마 꿈엔들 잊힐 리 없는 그리운 진메 마을을 노래로만 지킬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린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용택 시인에 대해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 마을에서 태어났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1985년 첫 시집 '섬진강'을 펴냈다. 

이후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꽃산 가는 길' '그리운 꽃편지' '그대 거침없는 사랑'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등의 시집을 펴냈다. 

산문집으로는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작은 마을' '섬진강 이야기 1·2' 가 있으며 장편동화 '옥이야 진메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동시 엮음집 '학교야, 공 차자'가 있으며 '김수영 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김용택 시인에 대해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 마을에서 태어났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1985년 첫 시집 '섬진강'을 펴냈다. 

이후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꽃산 가는 길' '그리운 꽃편지' '그대 거침없는 사랑'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등의 시집을 펴냈다. 

산문집으로는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작은 마을' '섬진강 이야기 1·2' 가 있으며 장편동화 '옥이야 진메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동시 엮음집 '학교야, 공 차자'가 있으며 '김수영 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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