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肥大)언론의 최면술

회색으로 본색을 가리는 비대언론들

등록 2001.07.27 00:01수정 2001.07.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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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른바 '빅3'니 '거대언론'이니 하는 단어들이 싫다. 그들 단어들이 왠지 긍정적인 의미의 '크다'라는 뜻을 담고있는 듯 해서다. 이제부터 나는 그들을 '비대(肥大)언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그 동안 '비대언론'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모든 언론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보도자세를 지켜야 한다는 잣대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다. 어떤 언론이 특정사안에 대해 다소 기울어진(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의한 판단) 보도를 하면 균형을 지켜야 할 언론의 모습이 아니라느니, 특정세력에 빌붙기 위한 비겁한 짓이라느니 하며 혼자 분노하기 일쑤였다.

모든 기사는 독자가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사를 두고 왈가왈부 해선 안된다는 비대언론들의 점잖은 투의 훈계에도 '그러려니' 하며 별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독자가 제대로 판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리 헷갈리게 기사를 가공해버리는 상황에서는 평범한 독자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러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동물의 왕국>을 보던 어느 날, '나의 이런 생각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균형보도 라는 것이 어쩌면 비대 언론 자신의 발톱을 감추려는 얄팍한 술수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동안 비대한 극우보수언론이 양념 삼아 진보의 탈을 쓴 '가짜 진보인사'를 내세워 '그래도 이만하면 진보적 언론이 아니냐?'며 으스대는 모습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래, 저 정도면 그래도 균형을 갖추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을 해오다 동물들의 치열한 생존의 현장 속에서 언론의 감춰진 동물적 속성을 발견했으니 나도 어지간히 우둔한 셈이다.

약한 것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위장색을 쓰는 것과 달리, 강한 것들이 약한 것들을 잡아먹기 위해 주변의 지형지물 속에 자기를 숨기는 것은 천양지차라는 점도 더불어 깨달았다.

생존을 위해 자신을 속이는 것에도 극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으로서 보호색을 사용하는 약한 동물과,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을 끝장내려 자신을 숨기는 강한 동물을 비교할 때 그들이 각자 자신을 숨기는 목적은 하늘과 땅차이 만큼이나 크다.


물론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으려 드는 것도 자기의 목숨을 유지하려는 행위이긴 마찬가지지만, 위장과 은폐를 통한 결과는 순식간에 생과 사로 분리된다. 강자는 실패해도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지만, 약자가 실패할 때는 그것으로 끝이다. 다음 기회를 노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비대언론의 균형보도 위장술은 더 많은 독자를 유인하기 위한 기만술이요, 상대적으로 '약한 언론'의 균형보도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탁월한 위장술과 변신술로 비대해진 오늘날의 비대 언론들은 더 많은 먹이감(독자)을 사냥하기 위해 상업주의라는 날카로운 발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는 보수와 진보, 극우와 극좌를 넘나들며 어지러운 공중제비를 돌고 있고, 그 현란한 곡예를 보며 먹이감의 혼을 빼놓고 있다.


분명히 검정색인 듯 하다가도 파란색이 되었다가 다시 노란색이 되었다가 하며 너무도 빠르게 변신하는 탓에 결국 회색으로만 보이는 오늘의 비대언론의 재주에 속아 나는 그 동안 '모든 색은 회색이어야 한다'는 착각 속에 빠져있었던 셈이다. 속에는 분명히 악의적인 색깔이 들어있는 게 확실한데 워낙 이것저것 기술적으로 '그림퍼즐'을 구성했으니 제대로 꿰 맞추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회색은 감춤의 색이다. 구름이 해를 감출 수 있듯, 회색은 음모의 색깔을 감추어 버린다. '저놈은 분명히 빨간색이다'라고 말하는 언론 자신이 더 시뻘건 색을 가졌으면서도 자기는 회색이라고 우긴다. 워낙 변신의 귀재인지라 독자도 그게 정말 회색인줄 착각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다.

나는 단순한 독자가 되고 싶다. 빨간 것은 빨간 것, 검은 것은 검은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런 언론을 보고 싶다. 그게 솔직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다면 그것 마저도 있는 그대로 보고싶다. 그래서 내 속에 넣어 내가 그 색들을 요리조리 조합해서 제대로 된 색을 만들어 내고 싶다. "파란 것을 빨간 것이라고 우기면 '그건 분명히 파랗다'고 주장해 바로잡고 싶다.

비대해진 극우보수언론은 진보적 언론이 보여주는 솔직함을 배워야 한다. 논조는 분명히 극우보수요, 감정이 가득 찬 화풀이를 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공정하다'느니 '우리는 특별한 계층만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모든 독자를 대변한다'는 거짓말, 위장술은 제발 쓰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차라리 '나는 극우보수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쓴다'고 솔직하게 말해달란 말이다. 그래야 어지럼증에 걸린 독자들이 환멸감만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저 신문은 원래 그런 신문' 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달라는 것이다. 드러난 건 분명히 검정색인데 자꾸 회색이라고 우기니 환장할 일이다. 극우보수세력들로부터 '빨갱이 신문'이라는 가당찮은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꿋꿋하게 일관된 논조를 유지하는 진보언론을 보고 배운다고 해서 체면이 구겨진다고 여기진 말아달라. 독자는 솔직한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덩치 큰 비대언론이 서로 죽겠다고 난리다. 화려한 변신과 위장을 거듭하며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만 해도 비난받을 일인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살을 부리며 '나 죽겠다. 저 놈이 날 죽인다'며 고래고래 소릴 지르는 꼴이란 정말 봐주기 어렵다. 남의 빵까지 가로채 배불리 먹고 그도 모자라 호주머니에 숨겼으니 이제 그것을 내놓으라고 한다고 해서'저 놈이 날 굶겨 죽이려 한다'고 악다구니를 쓴다면 배고픈 개가 웃을 일이다.

진정한 균형보도는 수치의 비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부자가 탐욕으로 다섯 개의 빵을 훔친 것과, 아사지경에 빠진 거지가 다섯 개의 빵을 훔친 사실은 다같이 도둑질이지만 다르게 바라봐야 하고, 힘센 자가 어쩌다 한번 맞은 것과, 힘없는 사람이 매일 얻어터지는 것은 다같이 폭행을 당한 것이지만, 결코 동일하게 평가해선 안된다. 항상 힘센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기만 하다 어쩌다 약자의 희생을 한번 보도하면서 균형있는 언론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진 말란 말이다.

우리의 언론들이 있는 그대로의 색깔을 다양하게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언론이 독자로부터 더욱 사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작은 언론이 고집스럽게 한쪽을 고수하는데, 크다는 언론이 이쪽저쪽을 넘나들며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극우언론은 이제부터라도 '우린 극우보수다'라고 밝히고 논조의 일관성을 유지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당신들이 그나마 남아있어도 봐줄 만한 언론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도 비대언론은 툭하면 "그럼 우리 신문을 애독하는 수백만의 독자들은 바보란 말인가?"라는 항변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비대언론 당신들의 눈속임이 그만큼 기술적이고 집요하기 때문이다. 최면에 잘 걸리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들이다. 왜곡보도를 일삼는 비대언론을 구독하는 독자들은 이미 최면에 걸린 상태다. 오랜 최면에서 깨어난 나의 경우처럼 그들 모두가 비대언론이 걸어놓은 최면에서 깨어나는 날이 비로소 언론개혁이 성공하는 날이 될 것이다.

언론개혁은 비대언론의 감추어진 본색을 드러내게 하는 작업이다. 감추어진 본색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최면에 빠진 독자를 구출하는 작업이다. 감추어둔 탐욕의 빵을 되찾아 오는 작업이다. 세무조사와 그에 대한 처벌은 단지 그 모든 것을 이뤄내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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