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을 부정하는 조선일보

등록 2001.07.27 18:10수정 2001.07.28 11:30
0
원고료로 응원
조선일보의 '막가파'식 칼럼이 끝을 모른 채 치닫고 있다. 7월 25일자 칼럼에서 민경국 교수는 '평등주의'가 판치는 세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세상이 온통 평등주의자들이다. 의료 혜택도 교육도 언론도 “모두 다 ‘평등하게’ 누리고 모두 다 ‘평등하게’ 배우고 잘 살자”고 한다. 학생과 학교를 모두 닮은꼴로 만드는 교육평준화 정책, 부유층의 부담으로 서민층의 복지를 지원하는 건강보험제도, 메이저 신문사의 경쟁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신문고시제도. 이런 주장의 핵심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중략).. 하지만 이런 세상은 과연 가능한가. 인류 역사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세기에 태어났다가 소멸된 사회주의 실험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통해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고, 서민층에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의료 기회를 보장하고 독과점을 방지하려는 노력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려는 유 교수의 발상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반독점 행위를 문제삼고 거대 통신회사의 합병을 불허하는 미국정부도 사회주의 정권인가? 경제무역학부 교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사회주의'와, 공정한 경쟁 및 최소한의 복지를 보장하는 '자본주의'를 혼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무지가 아니면 의도적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듯 대학교 1, 2학년 생들도 황당하게 여길 주장을 버젓이 칼럼으로 실어 이데올로기 공세에 나서는 용감함과 뻔뻔함이 바로 조선일보의 힘이다. 개혁 주장에 대해 무조건 '색깔론'으로 밀어붙이려는 조선일보의 전형적인 수법이 이번에도 고스란이 보여진 셈이다.

그런데 이번 칼럼은 그러한 색깔론보다도 좀더 '원초적'인 문제점이 보여진다. 민 교수의 주장을 좀더 들어보기로 하자.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유대감·형제애 같은 원초적 도덕심은 가족이나 원시사회와 같은 소규모 그룹을 유지하는 데 적용되는 것이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사회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순간적으로 일부 계층에 득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하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필자는 난생 처음으로 사회구성원간의 유대감과 형제애를 부정하는 글을 접했다. 형제애를 가지게 되면 모두가 불행과 고통을 겪게 되니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잘먹고 잘사는 데만 관심을 가지자는 주장이, 다시 말하면 도덕 교과서를 통째로 부정하는 반체제적 주장이 판매부수와 영향력이 1위라는 신문에 당당히 실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나는 정말 진지하게 민교수와 조선일보 편집진에게 묻고 싶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정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며,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사회 기득권 층의 생각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득권층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양보를 거부한다면, 또 이러한 거부를 조선일보가 계속 대변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기본적 가치를 지키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합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이들을 더 이상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이다. 정신 바짝차려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기고] 평등주의와 ‘원초적 본능’ .... 민경국 

세상이 온통 평등주의자들이다. 의료 혜택도 교육도 언론도 “모두 다 ‘평등하게’ 누리고 모두 다 ‘평등하게’ 배우고 잘 살자”고 한다. 학생과 학교를 모두 닮은꼴로 만드는 교육평준화 정책, 부유층의 부담으로 서민층의 복지를 지원하는 건강보험제도, 메이저 신문사의 경쟁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신문고시제도. 

이런 주장의 핵심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뒤에 처지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이를 위해 앞서가는 사람들은 유대감과 형제애로써 참고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어도 ‘듣기 좋은 말’은 모두 골라 쓴다. 형제애, 동지애, 평등, 정의, 개혁. 정말 듣기 좋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찬성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국내만이 아니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반세계화 시위도 결국은 이 같은 평등주의에 바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과연 가능한가. 인류 역사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세기에 태어났다가 소멸된 사회주의 실험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런 ‘역사의 실험’을 끝낸 지 10여년이 지난 21세기의 초엽에 아직도 이 같은 논란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적인 평등주의, 정치 사회학적인 사회주의 또는 좌파적 이념이나 목표는 역사적 사명이요 진보이고, 이에 반대하는 모든 것은 반역사적이고 수구라는 식의 이분법에 왜 솔깃해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좌파 이념이 원래 인간의 이성보다는 원초적 본능에 호소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렵채취를 통해 살아가던 원시부족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모두 원초적 본능의 소산인 유대감과 형제애로써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뒤처지는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온정적이었다. 사적 소유의 개념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구성원들은 모두 개인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자였다. 원시사회에서는 유대감과 형제애와 같은 도덕을 무시하는 구성원, 의견이 다르거나 그룹이 추구하는 목적을 비판하는 구성원은 가혹한 처벌과 증오의 표적이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질투심과 이에 대한 공포심도 원시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강제력이었다. 그들은 다른 부족들을 적으로 취급하고 이들과 고립하여 살았다. 

그러나 인간이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본능적 도덕’ 속에서 살아 온 기간은 아주 길었던 반면 불평등을 불가피한 원리로 한 시장경제 속에 산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인류 역사를 하루 24시간에 비유한다면 23시간57분 동안 폐쇄된 원시사회의 본능을 바탕으로 살아왔으며, 시장경제 속에서 산 것은 3~4분에 불과하다고 할까. 

오랜 기간 동안 호모사피엔스의 신경구조와 본능적 소망이 형성되었고 이 원초적 본능은 유전적으로 전달돼 현대인의 마음 속에도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평등주의는 결국 현대인에게 내재한 이 같은 원초적 본능을 자극해 세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도덕적이고, 자유주의자들은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하고 또 이런 평가가 인정되는 것도 이런 감정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유대감·형제애 같은 원초적 도덕심은 가족이나 원시사회와 같은 소규모 그룹을 유지하는 데 적용되는 것이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사회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원시적 도덕률을 현대의 ‘거대한 열린 사회’에 무리하게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이 옳은 것일까. 

그 결과는 순간적으로 일부 계층에 득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하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 강원대 교수·경제무역학부 )

덧붙이는 글 [기고] 평등주의와 ‘원초적 본능’ .... 민경국 

세상이 온통 평등주의자들이다. 의료 혜택도 교육도 언론도 “모두 다 ‘평등하게’ 누리고 모두 다 ‘평등하게’ 배우고 잘 살자”고 한다. 학생과 학교를 모두 닮은꼴로 만드는 교육평준화 정책, 부유층의 부담으로 서민층의 복지를 지원하는 건강보험제도, 메이저 신문사의 경쟁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신문고시제도. 

이런 주장의 핵심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뒤에 처지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이를 위해 앞서가는 사람들은 유대감과 형제애로써 참고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어도 ‘듣기 좋은 말’은 모두 골라 쓴다. 형제애, 동지애, 평등, 정의, 개혁. 정말 듣기 좋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찬성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국내만이 아니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반세계화 시위도 결국은 이 같은 평등주의에 바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과연 가능한가. 인류 역사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세기에 태어났다가 소멸된 사회주의 실험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런 ‘역사의 실험’을 끝낸 지 10여년이 지난 21세기의 초엽에 아직도 이 같은 논란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적인 평등주의, 정치 사회학적인 사회주의 또는 좌파적 이념이나 목표는 역사적 사명이요 진보이고, 이에 반대하는 모든 것은 반역사적이고 수구라는 식의 이분법에 왜 솔깃해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좌파 이념이 원래 인간의 이성보다는 원초적 본능에 호소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렵채취를 통해 살아가던 원시부족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모두 원초적 본능의 소산인 유대감과 형제애로써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뒤처지는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온정적이었다. 사적 소유의 개념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구성원들은 모두 개인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자였다. 원시사회에서는 유대감과 형제애와 같은 도덕을 무시하는 구성원, 의견이 다르거나 그룹이 추구하는 목적을 비판하는 구성원은 가혹한 처벌과 증오의 표적이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질투심과 이에 대한 공포심도 원시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강제력이었다. 그들은 다른 부족들을 적으로 취급하고 이들과 고립하여 살았다. 

그러나 인간이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본능적 도덕’ 속에서 살아 온 기간은 아주 길었던 반면 불평등을 불가피한 원리로 한 시장경제 속에 산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인류 역사를 하루 24시간에 비유한다면 23시간57분 동안 폐쇄된 원시사회의 본능을 바탕으로 살아왔으며, 시장경제 속에서 산 것은 3~4분에 불과하다고 할까. 

오랜 기간 동안 호모사피엔스의 신경구조와 본능적 소망이 형성되었고 이 원초적 본능은 유전적으로 전달돼 현대인의 마음 속에도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평등주의는 결국 현대인에게 내재한 이 같은 원초적 본능을 자극해 세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도덕적이고, 자유주의자들은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하고 또 이런 평가가 인정되는 것도 이런 감정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유대감·형제애 같은 원초적 도덕심은 가족이나 원시사회와 같은 소규모 그룹을 유지하는 데 적용되는 것이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사회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원시적 도덕률을 현대의 ‘거대한 열린 사회’에 무리하게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이 옳은 것일까. 

그 결과는 순간적으로 일부 계층에 득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하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 강원대 교수·경제무역학부 )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쓰고 버리기 아까운 지퍼백, 남편이 낸 재활용 아이디어 쓰고 버리기 아까운 지퍼백, 남편이 낸 재활용 아이디어
  2. 2 유럽 여행 간 아들네 강아지를 18일 맡아주고 깨달은 것 유럽 여행 간 아들네 강아지를 18일 맡아주고 깨달은 것
  3. 3 여권 빼앗고, 밥과 오이만 주고...전국 방방곡곡에 도는 '괴담' 여권 빼앗고, 밥과 오이만 주고...전국 방방곡곡에 도는 '괴담'
  4. 4 "내가 죽으면 철거를" 왕의 유언에도 매년 130만 명이 찾는 성 "내가 죽으면 철거를" 왕의 유언에도 매년 130만 명이 찾는 성
  5. 5 사직구장 관중 '69명'...그때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어디 있었을까 사직구장 관중 '69명'...그때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어디 있었을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