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파상'의 반란, 몰래 결혼식

임현주의 <인도여행기>

등록 2001.08.17 10:37수정 2001.08.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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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티아 마을의 이름없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 이름은 '팔라' (팔라 역시 스님이다.)

첫째 부인과 사별 후 재혼을 한 팔라에겐 모두 10명의 자녀가 있다. 이 중 위로 3명은 결혼을 해 다른 마을에서 살고 있고 나머지 7명의 자녀가 팔라와 함께 곰빠 마을에 살고 있었다.

올해 스무살의 파상은 팔라의 다섯째 딸. 파상은 말이 없고 조용해 처음 며칠간은 나와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삼일째 되던 날 저녁, 그녀와 동생 밍마가 '창'(한국의 막걸리맛과 같은 티벳 술)을 들고 내 방을 찾으며 그녀와 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녀가 처음 내 방에 들어와 한 말은 "담배 피워도 돼요?"였다. 평소 담배 피는 모습을 보지 못한 내가 의아해하자, 그녀는 내놓고 피우지 않을 뿐 시킴 여성의 반 이상이 흡연자라며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 올해 18살인 밍마 역시 13살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제서야 나는 파상과 밍마가 가끔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몰래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아버지 팔라 때문. 엄격한 팔라가 딸들의 흡연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몰래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라가 모르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창을 나눠 마시며 어색했던 사이가 가까워지자 파상은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내일 모레가 자신의 결혼식인데, 아버지 팔라와 새엄마만 모르고 가족 모두가 아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거란 생각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파상이 몰래 결혼식을 올릴 수밖에 없는 사연을 털어 놓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파상의 남자친구는 힌두교도. 불교도이자 스님인 팔라가 다른 종교인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남자친구 '붓다'와 약식 결혼식을 올리고, 며칠 후 붓다의 부모가 팔라를 찾아 허락을 얻어내기로 계획을 세웠고, 이미 붓다 부모와는 얘기가 끝난 상태였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인도에는 결혼식도 까다롭다고 생각될 정도로 조건이 많았다. 종교가 달라도 안되며, 카스트가 달라도 안되며, 심지어 어떤 지방은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 사회적인 제도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반면 파상은 부모와 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파상의 권유로 밍마와 함께 '림비'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그녀의 큰언니집을 방문했다. 팔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파상은 림비 근처 폭포에서 붓다를 만나 그의 집으로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새엄마를 별로 따르지 않는 파상이 결혼 전 날의 아쉬움을 큰 언니집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았다.

저녁 무렵 파상은 큰언니 '도마'와 둘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이 빨개져서 나온 파상을 보며 도마가 엄마 대신으로 시집가는 동생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모님 몰래 하는 결혼식에 신랑마저 오질 않고...

드디어 파상의 결혼식날 아침, 내가 7시즘 일어나보니 파상은 벌써 새옷으로 갈아입고 약간의 화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많이 긴장했는지 오전내내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더니 붓다와 12시에 만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10시가 조금 넘자 폭포로 출발했다. 나와 밍마도 그녀의 짐을 들고 폭포까지 동행했다.


폭포로 가는 길에 그녀에게 기분이 어떻냐고 묻자 그녀는 아버지 팔라가 결혼을 허락해 주길 바랄 뿐이라며 엷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결혼에 대한 기대와,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 등이 섞여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11시즘 폭포에 도착해 그 때부터 기나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셋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무 말없이 서로의 일에 열중했다. 밍마는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파상은 꽃을 꺾고, 나는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고...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2시가 지나고 1시가 지나도 붓다는 오지 않았다.

또, 2시가 넘어서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해 폭포에서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밍마와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파상의 안색을 살피느라 안절부절 못했지만 의외로 파상은 차분해 보였다. 비가 와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거라며 오히려 붓다를 걱정할 정도로.

4시가 넘어서까지 폭포 옆 빈집에서 비를 피해 붓다를 기다렸으나 붓다는 끝내 오지 않아, 결국 우리들은 도마네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파상은 저녁 늦도록 대문 앞에서 움직일 줄 모르며 붓다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오토바이 소리만 나면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우리 모두는 날이 밝는대로 붓다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붓다는 다음 날에도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게다가 비 때문인지 전화는 이틀째 불통! 결국 나와 밍마는 먼저 곰빠 마을로 돌아오고, 파상은 그곳에서 며칠 더 붓다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우린 헤어졌다.

그 후 나는 파상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곰빠마을로 돌아와 열흘을 더 묵었으나 파상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에겐 어떤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상은 보기에는 어려 보이지만 그동안 만났던 인도 여성들과는 달리 매우 깨어있는 친구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녀의 반란이 성공으로 끝나, 가족들의 축복 속에 정식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 꼭 오리라는 생각을 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시킴을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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