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킴에 머무는 동안 팔라와 그의 가족들의 친절에 고향에 온 듯한 마음으로 편안히 지내기도 했지만, 안좋은 일도 있었다. 그동안 얼굴 붉힐 일이 없었던 나의 여정에 이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저 편안 마음에 내가 너무 마음을 터놓았다는 자책을 하며 마음을 달래려 애썼지만 이 일로 나는 오랫동안 마음이 상기되어 지내야만 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파상의 남자친구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다시 파상의 큰언니집으로 돌아간 날 저녁. 그날 저녁 파상의 베나(네팔어로 '형부'라는 뜻)가 동네 청년 두 사람을 초대해 작은 잔치를 벌였다. 붓다가 오지 않아 침울해 있는 파상을 위로하기 위한 베나의 배려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전 공무원인 베나의 한 달 월급은 7천루피.(1달러=약46루피) 이 정도면 꽤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베나는 전자기타를 갖고 있었고, 자주 동네청년들과 연주를 한다고 했다.
그날 초대된 청년 '마제스'와 '왕겐'은 룸비 공립학교 교사. 그들 역시 '부티아'로 생김새가 한국인과 비슷해 처음 만난 이들이지만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네팔리인 베나가 힌디와 네팔 노래를 주로 연주하고, 마제스와 왕겐이 팝송을 연주하고, 아이들이 춤을 추자 가라앉은 분위기는 금방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또 베나의 큰 딸은 네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고, 작은 딸과 밍마는 시킴에서 유명한 춤꾼이라 가족잔치가 아니라 프로들의 경연 같았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파상도 잠시나마 붓다의 일을 잊고 매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10시쯤 지나 아이들이 자야할 시간이 되자 우리들은 노래를 마치고 '창'을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제스와 왕겐은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마제스는 뉴스를 자주 보는지 남북이산가족이 만나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또 두 사람은 시킴이 인도에 속해 있는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어 예전처럼 독립된 나라로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킴이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될 당시 비록 투표를 통해 결정되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시킴인들은 독립을 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야기로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지자 마제스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나에게 '시킴'이 어떠냐는 질문을 해왔다. 나는 조용하고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아 무척 인상깊다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에 마제스는 무척 흔쾌해 하며 시킴 홍보사절단처럼 이런저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마제스가 '그런데 왜 동양여자들은 시킴 남자들과 결혼하길 꺼리는 겁니까?"란 질문을 해왔다.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나는 결혼하길 꺼리는 것이 아니라 결혼할 상황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을 했다. 외국인이 시킴에 머물 수 있는 곳은 1년에 단 15일뿐이고 그 기간은 일반적으로 결혼을 약속할 만큼 가까워지기 힘든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며.
그러자 마제스가 만약 시킴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시킴 남자를 만나면 결혼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머뭇거리자 마제스는 오해를 했는지 정색을 하며 내가 진실을 얘기하지 않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마제스의 질문은 솔직히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고, 내 생각으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나의 심정을 솔직히 얘기했다.
그러나 마제스의 태도는 점점 집요해졌다. 그러며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동양여자들은 시킴남자들보다 서양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다며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라고 얘기를 해도 마제스는 막무가내였다. 또 여기에 베나와 왕겐까지 합세해 마치 자신들의 말을 인정하기 전까지 이야기를 끝내지 않겠다는 자세로 공격을 해오자 나는 정말 화가 났다. 또 이들에게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환기되며 서글픈 생각까지 들었다.
그 때 문득 인도의 한 도시 산티니케탄이란 곳에 인도남성과 한국여성이 결혼해 살고 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나는 이 예를 들며 어떤 환경이 주어져 사랑의 감정이 충분해진다면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얘기 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들은 그것은 시킴 남성이 아니라며 일언지하에 나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처음부터 마제스의 질문이 그리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나에게 원하는 대답은 동양여자들은 시킴남자를 무시한다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이들이 일종의 열등감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집요함 뒤에는 처음 그들이 말했던 '시킴인'이라는 자부심보다는 열등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파상과 밍마가 마제스에게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달라고 얘기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마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밤 1시까지 한국의 화폐가치와 인도 화폐가치를 비교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약간 술이 취해 쉬지 않고 말을 하는 그를 보며,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킴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며 어쩜 영영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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