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에게 작품이란 무엇일까. 물론 민족이나 국가, 종교, 가족, 사랑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 스스로가 설명하는 화법일 수 있다. 그럼 자신의 입장이나 처지를 설명하는 변론의 도구일 수도 있을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은 분명히 마스테베이션은 아니다.
문학이 마스테베이션과 가장 큰 차이는, 문학이라는 것이 자기의 순간적인 쾌락에 만족하는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닌,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줌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후일담 작가들의 작품이 문학작품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나 고백을, 이 시대나 개인이 겪어왔던 보편적인 고통으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이문열이 최근에 보여준 행위는 단지 문학을 마스테베이션의 수단으로 격하시킨 셈이다.
이미 이문열의 소설에 대해 관심을 끊은 기자가 그의 기사를 다시 뒤적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이 논쟁을 마무리하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왜 다시 논쟁을 시작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이 과연 이런 식의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때문이다.
이문열의 이번 작품이 마스테베이션인 까닭
한 일간지 브리프 기사로 본 이문열의 발표작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현대문학 10월호)는 문학 본연의 자세가 아닌 자기 만족을 위한 작품이다. 스러진 유림의 자손으로 겪었던 방황과,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는 이 소설의 문장들을 보고 기자는 어이가 없었다.
"언관이라고 해서 세금을 포탈해도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 빤한 이치를 내세우고 비위에 거슬리는 언관들을 모조리 잡아넣은 정권의 얄팍한 처사가 역겨워 <언관(言官)없는 조정(朝廷)을 원하나>란 벽서(壁書)를 써 붙이자 큰 소동이 났다"는 부분은 명확한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풀이다.
또 자신이 왜 언관의 편을 들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설명한다. 작가의 논리는 이전과 차이가 없다. 북한보도에 대한 언론사의 딴지, 시민단체의 행동 등등, 그리고 추미애 의원과의 논쟁도 덧붙인다.
"개는 저마다 주인을 위해 짖는 법「犬吠其主」이지만, 함부로 짖고 물다가는 주인을 욕보이기도 하는 법. 한 때는 그 주인 신법당과 선의왕을 여지없이 나무람으로써 개 잘못 키운 죄를 물을 궁리도 해보았다"고 풀이한다.
또 시민단체에 "지난 시대 열심히 신법당을 따라다녔으나 끝내 한 자리 얻지 못하고, 재야에서 이런 저런 운동으로 민의(民意)를 사칭하며 불러 써줄 날만 기다리는 패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둘만 모여도 무슨 회(會)요, 다섯만 모여도 무슨 운동본부가 되는 것들이 다시 몇 개씩 모여 거창하게 무슨 시민연대라는 걸 꾸미고 연신 성토대회다, 기자회견이다, 하며 저 사람에게 짖어댔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 과거 자신이 던졌던 언어폭력의 연장일 뿐만 아니라 철저한 상대방에 대한 냉소다. 그리고 나감과 들어옴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말한다.
이 글은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저간의 상황에서 한발짝도 나간 것 없는 그대로의 설명과 자기 입장 변호다. 그러면서 자신은 강철에 단련되어진 것처럼 말한다. 과연 그럴까. 기자는 그가 지금 핍박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주는 수많은 매체(그는 8월에만해도 국내 최대 월간지 2곳과 인터뷰도 하지 않았던가)와 발언권을 갖고 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실어줄 수많은 잡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편에 서 있는 수많은 팬들도 있고, 문인도 있다. 그런 그가 과연 "달구어지고 두들겨 맞아 단련되는 것은 강철만이 아니다. 그들이 체제의 억압과 박해를 통해 단련되었듯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는 이들의 모습만 보고 투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을 진지하게 삶과 결합시키지 못한 작가의 무지다. 결국 그는 문학을 자기 위로를 위해 사용했고, 문학을 수단화하는 오욕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다시 논쟁을 가열시킨 목적은
이문열은 스스로 더 이상 이 문제로 논쟁을 가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논쟁을 일으킨 것 역시 그다운 행위다. 곡학아세 논쟁이나 추미애 의원의 발언문제는 이미 일반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뻔히 논쟁의 소지가 되는 글을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순수한 문학작품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미 기자를 포함해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논쟁자들을 봐도 그가 이번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그가 이번 글을 발표한 것은 분이 덜 풀렸거나, 상업적으로 이 사태를 활용해 보겠다는 소산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현대문학'에 글을 발표하는 것과 더불어 동시에 책도 출간한다.
이것은 자신의 이전 주장과 완전히 아귀가 맞지 않는다. 어차피 이문열이 이 책을 발표한 이상 추미애 의원은 물론이고 시민단체들과의 설전은 불가피하다. 그 설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혼란이라고 했지만 말과 글이 오가는 논쟁이란 그다지 나쁜 절차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 논쟁을 통해 자신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고, 세인의 관심권에 자신을 두려 한다. 그것이 혼자하는 행위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일반인들의 가치관을 흐리게 하는 사악한 기운이었을 때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문학을 자기 변론의 수단으로 사용한 작가
이문열은 또한 문학을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기 자신을 변론하는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문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을 저버렸다.
문학이란 무엇일까. 문학개론서를 하나 펼쳐 보았다. 르네웰렉은 "문학작품은 하나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들의 관계들이 지닌 하나의 성층화(成層化)된 특성으로 이루어진 고도로 복잡한 조직화라는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문학의 이론' 33P)고 말한다.
하지만 이문열의 이번 작품은 자신의 관점을 단순화시킨 것일 뿐, 이 사안이 갖고 있는 복잡한 조직화와는 완전히 거리가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거기에 후반에 보이는 냉소주의는 인간과 인간, 작가와 독자와에 가져야 할 기본적인 예의조차 무시한 행위로 읽힌다.
물론 문학의 기능인 교화의 도구, 혹은 작가나 독자들을 정서의 압력에서 해방시키는 행위와도 멀다. 많이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의 기능을 자기 변명의 도구나 상대방에 대한 매도의 수단으로 쓰라는 이는 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행위는 문인으로서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못한 행위다.
그는 결코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출세간을 말하지만 끊임없이 세상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행위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아래는 이문열 씨가 <현대문학> 10월 호에 발표한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중 문제가 되고 있는 대목의 전문.
그 중에서도 짚여오는 것은 이 여름 저 사람이 세상과 주고받은 요란한 시비다. 정권을 맡은 신법당(新法黨)과 허영 많은 선의왕(選擬王 * 美利堅 사람들이 처음 대통령제를 만들 때는 '선거로 뽑은 왕'의 개념에 가까웠다고 한다)이 세리(稅吏)를 시켜 이 시대의 언관(言官)들을 굴비두릅 얽듯 얽어 넣었는데, 저 사람이 그걸 참고 보아 넘기지 못한 게 그 발단이었다. 언관이라고 해서 세금을 포탈해도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 빤한 이치를 내세우고 비위에 거슬리는 언관들을 모조리 잡아넣은 정권의 얄팍한 처사가 역겨워 <언관(言官)없는 조정(朝廷)을 원하나>란 벽서(壁書)를 써 붙이자 큰 소동이 났다.
겉으로는 엄연한 나라의 징세권(徵稅權) 발동을 저 사람이 언로(言路)를 막고 언관을 억누르는 일로 본 데는 연유가 있었다. 이번에 가장 호되게 몰린 언관은 여러 해 전 지금의 선의왕이 재야에 있을 때 그를 위군자(僞君子)로 탄핵하여 크게 시비한 적이 있었고, 근래에도 집권 신법당의 정책을 그때마다 겁 없이 꼬집거나 비아냥거려 왔다. 또 북쪽 붉은 진나라[赤秦=북한]의 참상을 자주 고발하여 폭살(爆殺) 위협을 받은 적도 있는데, 그 이세(二世) 두령과의 화호(和好)를 일통천하(一統天下)의 묘계로만 여기고 있는 신법당 정권에게는 작지 않은 골칫거리였다. 거기다가 전부터 붉은 북쪽에 동조해온 무리들이 이제는 집권세력에 아부를 겸하여 <반 아무개 시민연대>라는 걸 만들고, 그 언관에게 법에 없는 사형(私刑)을 가해오고 있는 중이었으니, 그를 향한 징세권(徵稅權)의 때늦으면서도 갑작스런 발동이 어찌 공변되게 보일 수 있으랴.
하지만 저 사람의 글은 처음부터 오로지 언관들 쪽만을 편든 것은 아니었다. 집권세력과 언관들을 마주보고 달려오는 화차(火車)에 비유하고, 그 충돌의 위험을 먼저 일러준 뒤에, 그래도 정히 싸워야 한다면 언관들을 편들 수밖에 없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집권당과 선의왕을 떠받드는 무리가 벌 떼같이 일어나 저 사람을 몽둥이 질 하듯 몰아세웠다. 대개는 언관도 세금은 내야한다는 빤한 이치의 되풀이였지만, 개중에는 엉뚱한 시비도 있었다.
이를테면 율사(律士)에서 선의왕의 총신(寵臣)이 된 한 여류(女流)는 저 사람을 구법당(舊法黨)으로 잘못 알고 난데없이 곡학아세(曲學阿世)로 몰아세우더니, 일이 잘 안 풀리자 술을 퍼 마시고 아재비 뻘은 되는 저 사람에게 비가당자(非可當者=가당찮은 놈)라며 마구잡이 욕설을 퍼부었다. 또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저 사람이 다른 데에 쓴 글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터무니없는 혐의를 덮어씌우기도 했다.
개는 저마다 주인을 위해 짖는 법[犬吠其主]이라지만, 그 여류 키워도 너무 잘못 키운 개였다. 실은 그게 주인과 그 식구들을 욕보이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짖고 물어대니 어지간한 저 사람도 참기 어려웠다. 못된 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라 하나 자칫하면 꼴사납게 되 물리는 수도 있어, 한 때는 그 주인 신법당과 선의왕을 여지없이 나무람으로써 개 잘못 키운 죄를 물을 궁리도 해보았다.
지난 시대 열심히 신법당을 따라 다녔으나 끝내 한 자리 얻지 못하고, 재야에서 이런 저런 운동으로 민의(民意)를 사칭하며 불러 써줄 날만 기다리는 패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둘만 모여도 무슨 회(會)요, 다섯만 모여도 무슨 운동본부가 되는 것들이 다시 몇 개씩 모여 거창하게 무슨 시민연대라는 걸 꾸미고 연신 성토대회다, 기자회견이다, 하며 저 사람에게 짖어댔다. 그 중에 <반 아무개 시민연대>는 그들이야말로 명예훼손으로 언관 아무개의 소송객체가 되어야할 처지면서도 거꾸로 소송주체가 되어 저 사람을 고소하기까지 했다.
그럴듯하게 싸바르고 치장하는 기술만 일품인 신법당에 홀리거나, 수상쩍기 짝이 없는 '타자(他者)로부터의 신호'에 턱없이 충성스럽기만 한 일부 젊은것들도 벌 떼같이 일어났다. 언제든 홍위병(紅衛兵)이 되어 거리를 내달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들은 먼저 저 사람의 전자(電子)사랑방에 몰려들어 과부하(過負荷)로 대들보가 내려앉을 때까지 별의별 욕설을 다 퍼부었다. 게 중에는 고의적으로 남의 말을 오해하고, 그걸로 저희끼리 찧고 까불다가, 공연히 달아올라 저 사람의 책을 반품하자는 억지스런 운동을 벌인 치들도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저 사람을 옳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면을 얻은 논객들은 글로 편들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민망스럽지만 상대와 똑같은 욕설로 맞받아 쳤다. 저 사람도 잘 버티어, 시비 그 자체로 보아서는 이겼다 할 만했다. 어떤 전시(電視)방송사는 저 사람의 글에 대한 찬반(贊反) 의견을 전화로 집계해본 적이 있는데, 집권 신법당의 그 요란한 정책홍보에도 불구하고 과반수가 찬성을 나타냈다.
...(중략)
그런데 - 저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 이(李)아무개다. 이 여름 세상과의 한바탕 시비 끝에 고향으로 내려가 몇 달 지낸 일을 비록 남의 얘기하듯 썼으나, 실은 자못 쓸쓸한 내 얘기를 길게 한 셈이니, 자, 이제 다시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겨 취하도록 마셔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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