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09.25 13:48수정 2001.09.25 16:0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도 어느새 밤이 되었군요. 모기가 참 많습니다. 모기향 하나 불을 붙여 벤치 밑에 경호원으로 세워놓고 앉아 있지만 그 사람은 영 오지 않은 채 하루가 끝나려나 봅니다.
당신은 혹 목이 마르게 우연을 기대해본 적이 있나요.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며 별 볼 일도 없이 거리로 나가본 적이 있나요. 벤치에 홀로 앉아 어깨에 한껏 외로움을 드러내며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에 숨소리를 죽여본 적이 있나요.
자꾸만 말라가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엉뚱하게도 초등학교 시절의 짝궁을 생각하다가, 눈 앞을 지나쳐가는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에 그만 자존심이 상해서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벌떡 일어서서 소주나 한잔 할까, 이런 날은, 이런 날...하며 좌우를 둘러본 적이 있나요. 그 순간에조차도 물론, 누구 같이 소주를 마셔줄 사람을 찾아본 것이겠지요. 쓸데없이.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분명히 그랬더랬습니다. 오늘은 유랑인이 아침부터 뭔가 절묘한 우연을, 긴급한 우연을 기대하며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우산을 받쳐들고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와서 같이 있어드릴게요, 하고 속삭여주는 그런 우연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뭐랄까, 예고편도 이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간밤에 통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던 것 같습니다. 전주의 공설운동장 앞 잔디 위에 텐트를 설치하고 드러누워 잠을 청했지만 오지 않는 잠 때문에 사뭇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설핏 잠이 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해도 뜨기 전에 다시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어떤 소리가 있었습니다. 음악이었지요. 노래,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 중 풍신기, 바람의 신이라고나 해야 할 것 같은 그 쓸쓸한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얼어붙은 눈물, 폭풍의 아침, 마지막 희망, 우편마차 등등 바리톤 음조의 어둡고 무거운 노래들이 마치 늦은 가을 바람에 부시럭거리는 갈대소리처럼 잇따라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유랑인 자신이 아직 잠에 취한 채로 흥얼거린 소리였는지도 모르긴 합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에 내가 취해서 그만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유랑인은 줄거리도 명확하지 않은 슈베르트의 노래에 취한 채로 바닷가를 미친 듯이 헤매고 다니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에 나오는 주인공쯤 되려나요. 아니 어쩌면 영화 동사서독의 황량한 배경과 그 남자 주인공들의 이미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뭉크의 그림 절규, 그 공포의 이미지였는지도 혹시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유랑인 자신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사랑을 잃고 광야를 헤매는, 겨울나그네 속의 어슴푸레한 그 이방인의 뒷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임을 잃고 나는 떠나네, 하는 그런 누군가의 싯귀 같은 패배자의 걸음으로 바닷가를 배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지요. 노태우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희망이란 뭐지?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이, 느닷없이 닥쳐온 그런 의문에 발목이 잡힌 채로 허둥거렸던 것이지요. 무슨 자동인형이나 되어버린 것처럼, 툭하면 협궤열차에 몸을 싣고 덜컹덜컹 달리다가 소래나 군자역에서 내려 갈대밭으로 어디로 미친 듯이 쏘다니다가 지쳐서 쓰러지기를 직업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깜빡 정신이 돌아온 것은, 거기가 어디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콜타르로 검게 칠한 소금창고들이 멀리로 아스라하게 보이는 어느 구멍가게 앞에서였습니다.
측백나무가 몇 그루 서 있을 뿐 주변에 인가도 없는 곳에, 판자로 얼기설기 집이라고 지어놓고 낙시꾼이나 혹은 떠돌이들을 상대로 소주와 과자부스러기 따위를 팔고 있는 그곳은 정말이지 구멍가게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에이그 혼자서 무신 재미루, 젊은 사나는 젊은 사나다운 데가 있어야지. 아유 저게 뭐야, 저 꼴이."
새우깡이던가 양파깡이던가, 하여튼 빠삭빠삭한 과자부스러기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는 참인데 주인 아주머니가 뒤에서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주머니는 끌끌 혀를 차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그 눈빛, 금방이라도 나를 당신의 품에 안고 어깨를 토닥거리며 울지 마라, 울지 마라, 그럴 것만 같은 그 깊은 눈빛이 나를 소스라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아주머니가 또 무슨 말로 나를 나무라고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때 그 아주머니의 깊은 눈빛을, 그 촉촉한 목소리를 유랑인은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슈베르트의 노래소리와 함께 듣고 있었고,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그 눈빛을, 그 목소리를 유랑인은 아마 눈을 뜨자마자부터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그 목소리가 내게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며 벤치 위에 어설픈 자세로 앉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시나리오도 물론 몇 개쯤은 쓰고 있었지요. 하루 종일 앉아 있었는데 어찌 시나리오가 없었겠습니까. 이를테면 아름다운 목소리가, 이런 경우에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애매하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인이 내 뒤에서나 혹은 옆에서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으세요?"한다든가 아니면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저기 잠시 동안만 신발을 좀 빌려주시지 않으실래요?"한다든가 아니면 아예 까놓고 "제가 지금 심심하고 외롭거든요"한다든가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인연의 끈이 닿았을 때 내가 취할 행동을 심각하게 연구해보는 등 뭐 그러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 그리고 자세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했더랬습니다. 내가 나의 자세를 정확하게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누가 봐도 아 저 남자 참 불쌍하다, 아니면 참 청승스럽게 앉아 있다, 뭐 그런 생각이 드는 자세를 만들어 보이기 위해서 나는 아마 퍽이나 많은 연구를 하고 있었을 겝니다.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틀었다가 오른쪽으로 틀었다가, 손바닥으로 턱을 고였다가 주먹으로 고였다가, 시선을 한껏 흐리멍텅하게 해서 어디 먼 데를 쳐다보는 척하다가 다시 하늘을 쳐다보는 척하다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가 다시 꾹 다물기도 하고, 적어도 수십 아니 수백 종류의 자세를 만들어 보이고 있었을 겝니다.
이것은 사실 우스운 일이지요.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하면 대단히 진지한 일이기도 하지요. 진지한 코미디라고 하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어설픈 코미디가 될는지는 혹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존재의 여부가 불확실했던 그 사람은 이렇게 밤이 깊도록 오지 않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것이었음을 내게 알려주고 있군요. 그렇다면 나는 이제, 앞으로 조금만 더 기다려보다가, 하늘의 별이나 한 번 훔쳐본 다음 텐트 속으로 기어 들어가야겠지요 물론.
이런 기분은 뭐랄까, 일견 허망한 것 같기도 하지만,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얻은 것처럼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또 있습니다. 결코 헛웃음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미묘한 미소를, 내가 짓는 미소를 내가 느끼는 그런 뿌듯함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하는 그런 새삼스런 안도감 같은 것도 느껴지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누구에게 자랑할 필요도 없고 감출 것도 없는 사람의 벗은 마음이나 아닌지 혹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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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