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은 교통사고로 불구가 됐고, 스파이더맨은 지구오염으로 폐경기에 접어들어 거미줄이 안 나오고, 배트맨과 로빈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AIDS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원더우먼은 할머니가 됐고, 펩시맨은 개그맨으로 전락했고, <인디펜던스 데이>의 윌 스미스는 서부로 갔기 때문에 지구를 지킬 사람이 없다며 낄낄대는 화성의 외계인들.
사랑하는 개 '현이'의 죽음. 죽은 현이를 붙들고 수간(獸姦)하는, 현이를 사랑하는 사람인 '나'.
단칸 셋방에 모여 살며 '요강' 속에서 '무릉도원'을 찾아내 "그래도 낭만은 있다. 이놈들아"라고 슬프게 소리치는 3명의 락커.
언더그라운드 만화 계간지 <코믹스> 창간호엔 언더만화 혹은, 인디만화(독립만화)의 특성이라 할 이런 기발한 발상과 튀는 감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극우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일본 총리를 혼내주는 엽기적인 소녀의 이야기 <코믹스 걸 Y>의 기상천외함과 여자 고등학교의 일상을 참혹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선영이 매니지먼트>의 파격도 기존 만화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언더그라운드 만화(언더만화)란 기존 만화출판의 대공장 시스템과 유통구조의 문제점을 거부하며 전개된 비주류 만화운동의 성과물이다. 그러기에 언더만화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다양한 유통경로 등을 그 특성으로 한다.
<코믹스>는 1994년 언더만화를 표방하는 <만화실험 봄>이란 무크지를 간행했고, 이어 98년엔 언더만화의 정서를 대변하는 만화잡지 <히스테리>를 출판했으며, 99년 독자와의 쌍방향 소통을 위해 인터넷 웹진 <월간 COMIX>를 창간하는 등 한국 언더그라운드 만화와 그 고락을 함께 해온 작가주의 만화집단 '코믹스'가 8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내놓은 계간 만화잡지.
지난 9월26일 오후. <코믹스>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해낸 편집장 신일섭(31세)을 신촌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털실로 짠 빵모자와 삐죽삐죽한 턱수염. 붉은 색 추리닝에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양말(?). 신씨는 그 자체가 만화같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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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믹스> 신일섭 편집장 ⓒ홍성식 |
- 먼저 창간을 축하한다. 재판을 찍는 것이 지상목표라던데 책은 좀 팔리나?
"잘 안 팔린다(웃음). 하지만, 언더그라운드 만화를 대하는 독자들의 태도가 진일보하고, 한국 만화의 획일성을 극복하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작업은 가치를 지니지 않겠나."
-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많은 독자의 반응을 체크하진 못했다. 그러나 비록 소수지만 '이제까지 나온 언더만화 잡지 중 가장 기억에 남았다', '외국의 언더만화와 비교해도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기존 상업만화와 경쟁해도 될 것 같다'는 등의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 <코믹스>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문화의 획일성을 혁파하는 거다. 독자에게 만화의 다양함을 보여줌으로써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상업적인 담론을 다루는 만화가 보여주지 못한 것들을 접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다수가 아닌 소수가 향유하는 만화도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의 만화는 지나치게 상품으로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 자본주의 사회에선 만화도 결국 상품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만화는 상품이 아닌 문화다. 만화가 문화라면 거기엔 상품성과 더불어 작품성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성은 배제한 채 지나칠 정도로 만화의 상품적인 가치에만 매달리고 있다."
- 기존 만화시장에서 유통되는 작품들을 보아온 독자들에게 <코믹스>에 실린 만화는 생경할 수도 있을텐데.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미 2년 정도 인터넷 사이트(웹진 COMIX)운영을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언더만화를 소개한 바 있고, 그 노력이 언더만화에 대한 거부감을 상당부분 해소시켰다고 생각한다."
- <코믹스>에서 주요하게 고려된 점은 뭔가?
"언더만화가 가진 자폐성과 어두움에서 빠져 나와 정반대의 밝음도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에도 언더만화 매니아가 최소 1만 명은 넘는다. 조급함을 버리고 그들과 함께 천천히 갈 길을 가겠다."
- 창간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또 창간 후 소감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만화실험 봄> <히스테리> 등을 함께 작업한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기 때문에 작품을 취합해 엮는 데는 별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작업이 실패할 경우 한국의 언더만화는 사라진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작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안정규의 <선영이 매니지먼트> 같은 경우는 작가의 요청으로 5번이나 수정 작업을 거쳐 완성됐다. 하지만 책을 내놓고 보니 작가들이 한 고생에 비한다면 만족도가 낮았다. 2호를 만들 때는 더 잘해야하지 하는 반성을 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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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일섭 편집장의 양말(?) ⓒ홍성식 |
- 대단히 즐거운 창간파티를 가졌다던데.
"그냥 <코믹스>에 참여한 작가들과 독자들 몇몇이 모여 재밌게 놀았다. 술도 마시고, 락 콘서트도 하고. <불타는 배트와 젖은 글러브>라는 작품을 그린 '쾌남아 프로덕션'의 <에로 구현만화-적미(赤米)의 전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웃음). 그 친구들(쾌남아 프로덕션)의 작품 <욕망의 도시>가 내년 봄에 발간된다.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 편집장으로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신대섭의 <코믹스 걸 Y>와 안정규의 <선영이 매니지먼트>다. '코믹스 걸 Y'는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는 작품인데 사회비판적인 요소와 만화적인 요소가 동시에 녹아들어 있고, 팝아트 경향을 보이는 그림도 독특하다. '선영이 매니지먼트'는 학원물은 곧 폭력물이라는 상업만화의 공식을 깨고 여고 현장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 당신 이야길 좀 하자. 만화를 접한 계기와 데뷔작은?
"만화 좋아하는 보통 아이들처럼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만화 대본소를 들락거렸다. 거기서 이현세, 장태산, 이희재, 허영만 등을 만났고. 왜 한국만화에는 사실적으로 그려진 인물은 없나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 의구심이 만화가를 꿈꾸게 했던 것 같다. 88년에 <주간만화>라는 잡지에 '신일섭의 이런 생각'이란 카툰을 그리면서 데뷔했다."
- 만화를 통해 당신이 발언하고 싶은 건 뭔가?
"다양함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일방통행이고, 유행에만 휩쓸린다. 자신의 일상을 그려내는 것도 만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 <코믹스> 편집장 외에도 '이발쑈 포르노씨'라는 밴드도 겸하고 있고, 영화도 찍고싶어한다고 들었다.
"언더만화 홍보차원에서 하는 거다. 음악은 만화보다 대중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지 않은가. 영화의 경우는 그림과는 표현기법이 다른 영상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해보고 싶다. 하지만 음악이건, 영화건 내겐 모두 만화를 유효적절하게 전달하는 수단이다. 만화는 연필로도 그릴 수 있고, 펜으로도 그릴 수 있으며, 필름으로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 한국 만화출판시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소비보다 대여 중심이라는 것이다. 만화책을 사지 않으니 그 사업은 사양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만화를 사러 서점에 가는 친구를 본 적이 있나? 질적인 발전에 대한 고민 없이 양적으로만 팽창한 시장에도 문제점이 있다. 영화와 음악의 한류열풍처럼 만화 자체도 유행을 타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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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자본이 할 수 없는 일을..." ⓒ홍성식 |
-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고민되어야 할까?
"거대자본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 만화 페스티벌, 웹(인터넷)을 통한 서비스, 독립출판, 전시회와 공연이 합쳐지는 퍼포먼스의 활성화 등 다양한 대중소통의 경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가능하다면 30~40페이지 정도의 작은 책을 만들어 좌판을 벌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음악과 영화는 물론 만화까지 언더문화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 문화들을 향유하려면 소비도 해야 한다. 이는 재생산 구조를 가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소비가 없다면 시장은 소멸한다. 언더만화 작가들도 상업만화와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신일섭 편집장은 <코믹스>가 탄생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또 다시 COMIX는 진화한다>는 만화로 그렸다. 거기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새로운 예술사조는 언제나 기존의 형식을 거부하고, 시대의 정서를 작품화하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상업만화의 규정화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형식으로 동시대의 보편적인 정서를 끌어안으며 '언더만화'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스스로 선택해 걸어가는 '코믹스'의 작가들. 느리지만 지향이 분명한 그들의 발걸음에 만화팬들이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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