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국민의 힘 (제56회)

제 6 부 불치병 - 대통령병

등록 2001.09.27 18:50수정 2001.09.27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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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 배신자의 운명>

[1]


몇 시간 뒤 '국민의 힘' 단원들은 사무실에 모였다. 사무실 분위기가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이유는 각서였다. 그들은 탁자 위에 놓여진 각서를 보면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흠! 이 따위 종이 한 장 때문에 살인을 하다니......."

최강조는 각서를 보면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상상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신진수 그 인간은 말종입니다. 말종. 에잇! 더러운 자식. 면도날 형, 그런 새끼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우석은 옆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차며 화를 달랬다. 흥분하기는 면도날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지금껏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또 보기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비열하면서도 더러운 짓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막 나가는 세상이라지 만 어떻게 돈 때문에 형을 죽일 수가 있습니까?"
그도 감정이 격해지자 말을 꽤 길게 했다. '국민의 힘'의 단원이 된 이후로 말을 이렇게 많이 한 적이 없었다.

"이건 단순히 돈 문제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진수가 이것을 최갑진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진수가 이미 유대석과 적이 될 것을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민의 설명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신진수와 최갑진이 만난 것이 순전히 자신들의 작전에 의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헌데 각서가 그것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결국 우리가 신진수에게 자리를 마련해준 셈이군요."
아라의 목소리에는 다소 힘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얼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M호텔에서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워낙 과묵한 성격이라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못 챘지만 그녀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P대학교를 다녀온 이후로 얼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관계가 당분간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구나. 형님, 이렇게 되면 우리도 일을 서둘러야겠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결탁한 것이 사실이라면 유대석에게도 변화가 있을 겁니다."
"하긴 신진수처럼 영악한 인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움직이진 않았겠지. 발목당의 고문단 개편이 언제라고 했지?'
"내일 중으로....... 바로 그거였군요."
동민은 대답을 하다가 뭔가 떠오른 것이 있었던지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형, 무슨 일이야. 자세히 설명 좀 해봐."
"정보에 의하면 발목당에서는 내일 고문단 개편이 있을 거라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유대석도 더 이상 입당을 미루지는 못할 거다. 어쩌면 윤재철과는 이미 합의가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신진수는 그것을 눈치채고 최갑진에게 붙은 것일 테고. 그런 자는 체질적으로 야당과는 맞질 않거든."
최강조와 오동민은 리더답게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오빠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서둘러야겠네요."
"그래야겠지. 석아, 오늘 주식 시세는 어떠냐?"
"여전히 잘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갑진과 신진수는 아직 빼내지 않았다는 말인데. 아깝긴 하지만 내일 장이 열리면 모두 매도해라."
강조는 결단을 내렸다. 원래는 내일 오후까지 계속 가지고 있기로 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사진은 어떻게 됐느냐?"
강조는 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때까지 얼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예에?"
"사진 말야."
"아! 예! 빠른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배달될 겁니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대충 대답을 했다.

M호텔 앞에서 외제차에 탄 여자를 본 이후 그는 계속 같은 상태였다. 호텔에서 찍은 사진도 면도날이 대신 현상해서 유대석의 사무실로 보냈다.
"얼아, 너 얼굴 색이 왜 그 모양이냐? 병자처럼.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냐?"
강조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라와 우석도 계속 얼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특히 아라는 회의 시간 내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극구 부인했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최갑진과 유대석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했던 인물들 중에서 가장 거물급이다.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가 당할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면도날이 조직원으로서 활동을 처음 시작한 날이다. 만약 저 친구가 없었다면 우리는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일을 그르쳤을지도 모른다. 신고식은 이번 일이 끝난 뒤 하더라도 앞으로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잘 지내길 바란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태어나서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면도날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는 전과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사회 전체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개인들의 면면들을 보면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데도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또한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 점이 그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자 형제다. 네가 들어와서 나도 기쁘다."
동민도 나가면서 그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들과 누나는 제가 잘 보살필게요. 헌데 누나, 누나는 언제 손 기술을 배웠어?"
강조와 동민이 나가자 우석의 장난기에 발동이 걸렸다. 물론 그건 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계획된 행동이었다.

"으응? 뭐라고?"
아라는 얼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흥! 못 들은 척 하기는. 손 기술 있잖아? 그거 면도날형한테 배웠지. 의리 없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내가 사부로 모시면서 그렇게까지 애걸복걸했는데도 들은 체도 안 하더니. 얼굴만 좀 반반하면 다야? 다냐고! 흥이다."
이번에는 면도날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우석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뒷짐을 진 채 미소만 짓고 있었다.

"석이 너,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거냐? 대장 말대로 한 시가 급하다. 장난은 그만하고 나갈 준비나 해라."
반응이 금방 나타났다. 얼이 우석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 있을 우석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얼이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도 참 답답해. 애인이 남의 남자 품에 안겼다가 왔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애인이라니? 누구 말이냐?"
애인이란 말에 얼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누구긴 누구야? 여기 여자가 누나 말고 또 있어? 나도 남자지만 형처럼 무뚝뚝하고 감정이 메마른 남자는 처음 봤어.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자. 형은 누나가 그 시간에 M호텔에 왜 갔다고 생각해? ... 저렇다니까. 애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를 구하러 갔는데 고맙다는 말은 못할 망정 딴 생각만 하고 있으니 말이야. 나 같으면 저런 애인은 그냥 잘라버린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마음에 두지를 않는다. 저렇게 무뚝뚝한 인간이 뭐가 좋다고......."

우석은 얼을 거세게 몰아세웠다. 그의 말이 다소 거칠긴 했지만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얼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기선을 제압했다고 판단한 우석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소매치기 기술도 없는 여자가 도대체 그 물건을 외간 남자의 옷 속에 어떻게 넣었냐 말야. 형도 잘 알지. 최갑진이란 놈이 얼마나 난봉꾼인지. 그런 놈이 누나 같은 미인을 옆에 두고 가만있었겠어? 그러고 보니 늦게 온 것도 좀 수상하네. 내 계산에 의하면 한 시간 정도 늦은 것 같은데. 그 동안 뭘 했을까?"
"너 정말....... 이제 그만해라. 네가 자꾸 그러면 내가 무안해지잖아."
아라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화를 내려다가도 미인이라는 말에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알았어. 그런데 정말로 말 안 할거야? 정말로 놈이 누나에게 아무 짓도 안 했어?"
"저게 정말! 너 자꾸 그럴 거야?"
"아... 알았어. 내 임무는 여기까지란 말이지? 그럼 애인과 재미있게 놀다가 와."
우석은 목적을 달성하자 뒤로 물러났다.

문제는 아라였다. 이쯤 되면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헌데 그녀는 애인이란 말 때문에 부끄러워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양쪽 볼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사회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온갖 경험들을 다 해봤다. 저급한 욕지거리를 듣기는 다반사였고, 때론 싸움판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겨우 애인이란 말 한 마디에 얼굴을 붉혔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만하고 가자. 유대석의 움직임을 살펴야지."
보다 못해 면도날이 나섰다.
"그래. 가자."
"석이 너, 갔다 와서 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나! 난 나중에 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겁 안 난다니까. 그럼 잘 갔다와. 올 때 족발 사오는 것 잊지 말고. 키키킥! 모처럼 입을 풀었더니 식욕이 생기네. 저렇게 다니면 얼마나 좋아? 분위기도 좋고 말야."
그는 얼이 아라와 나란히 나가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했다.
"그럼 어디 한 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볼까?"
그는 곧바로 컴퓨터를 켜더니 인터넷 여행을 시작했다.

다음 날 오후, 유대석의 사무실. 뉴스 시간인지 TV에서는 여자 아나운서의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발목당은 오늘 고문단을 새로 정비하고 상임고문으로 동방재단의 이사장인 유대석 변호사를 영입했습니다. 보수계층과 전문가 집단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유 변호사는 그 동안 여야로부터 끊임없이 영입교섭을 받아 왔습니다. 이로써 여당은 영입작업에 기선을 빼앗겼으며 앞으로 대선을 향한 정치권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 계속해서 떠들어대라. 후후후, 앞으로는 뉴스에 자주 나오도록 건수를 많이 만들어야겠군. 그럴 게 아니라 보고서대로 아예 언론 전담팀을 만들어 버릴까? 그걸 어디에 뒀더라? 저기다 넣어 뒀나?"
유대석은 금고를 열더니 문건을 하나 꺼냈다. 두툼한 것이 적어도 70-80페이지는 돼 보였다.

표지에는 '대권 5개년 계획'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건 유대석의 부하들이 작성한 비밀 보고서였다. 문건은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눠져 있었다.

첫 번째 장의 내용은 입당을 해서 대중적인 인물이 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매스컴의 활용방안으로 언론과 방송을 우호적인 것과 적대적인 것을 분류한 다음 적대적인 언론을 길들이는 방법을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부록으로 언론인들의 성향을 분석해 놓았다.

둘째 장의 내용은 당내에서 계파를 형성하는 방법이었다. 대상 의원들과 운영방식, 그리고 재정 문제는 물론 외부에서 영입해야 할 인물에 관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세번째 장에는 경쟁 상대들을 물리치고 대권후보가 되기 위한 방법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는 상대 후보의 약점을 캐내서 폭로하는 방법이 주로 거론되었다. 타 계파에 대한 분석은 물론 흡수할 곳과 무너뜨려야 할 곳을 분류해 놓기도 했다. 또한 의원 개개인의 성향과 비리가 포착된 의원의 명단도 적혀 있었다.

네 번째 장의 내용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들이었다. 여기는 주로 대선 후보자들의 인기도와 지지기반, 그리고 약점과 비리들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차차기에 부상할 대선 후보자들에 대한 분석이 적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기별로 기술되어 있었다.

최소한 대통령이 되려면 정치철학과 이념, 그리고 정책에 대한 구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건 어디에도 그런 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역대 대통령들처럼 유대석은 오로지 대권을 쟁취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선 저녁 뉴스 시간에 앵커와 직접 인터뷰를 해볼까?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아침 토크시간에 나가는 것도 좋고. 후후후, 이렇게 되면 당장 인터뷰 내용부터 만들어야겠군."

그는 문건의 첫 번째 항목인 언론에 관한 부분을 펼쳤다. 문건은 가장 먼저 언론과 친숙해져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확보할 것을 강조했다. 문건을 읽으면서 그는 수십만 명의 축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통령에 취임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똑! 똑!"
그가 막 인터뷰 내용을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여비서가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축하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래? 일단 회의 중이라고 하고, 한 시간 후부터 연결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도착한 우편물들입니다."
여비서는 수십 통의 우편물을 내려놓고 나갔다.

"후후! 앞으로는 이런 것도 읽을 시간이 없겠지? ...... 빠른 우편이라. 얼마나 급한 일인지 어디 한 번 볼까?"
그는 우편물 중에서 빠른 우편이란 도장이 찍힌 봉투를 가장 먼저 뜯었다. 크기는 서류봉투 만하고, 발신자란에는 김범수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봉투 속에는 10여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모두 얼과 면도날이 M호텔에서 찍은 것들이었다.

"신 실장 같은데. 상대는 누구지? 장소는 M호텔 스카이라운지 같은데......."
그는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서 돋보기를 썼다.
"누구지?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데 말야. ...... 이 사람은 최갑진 의원이 아닌가? 헌데 신 실장이 이 자를 왜 만났지?"
사진 속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호 본능이었다.

"우연히 만난 걸까? 그래, 주식 문제로 만날 수도 있겠지. 아니다. 그렇다면 사후에라도 말을 했어야지. 도대체 이 사진이 의미하는 게 뭘까? ...... 서... 설마!"
부인하면 할수록 그의 머리 속엔 '배신'이란 단어가 강하게 떠올랐다. 놀란 탓인지 그는 발신자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긴 이제 와서 발신자를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는 30년 가까이 법조계에 몸을 담은 베테랑 변호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제일 가는 법률사무소의 수장이기도 하다. 그건 그가 그만큼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금방 마음을 가다듬고 전화기를 들었다.

"A증권사죠? 김 이사 있으면 부탁합니다. 아! 나는....... 여긴 법무법인 대망입니다."
유대석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걸 꺼려했다. A증권사는 신진수가 거래했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은 후환을 남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가 A증권사에 전화를 건 것은 신진수의 거래내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분명히 어제까지 주식을 정리하라고 했다. 만약 신진수가 배신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주식을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 이사? 나 유대석일세. 하하하! 고맙네. 다른 일은 아니고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야. 일전에 우리 신 실장이 개설한 계좌가 있을 거야. 그래, 바로 그 걸세. 그 걸 확인하고 싶은데. 어렵다는 건 나도 잘 알지만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건 아닐세. 주식을 가지고 있는지만 알아봐 주게. 고맙네. 그럼 빠른 시간 내에 연락 주게."

증권사의 이사라면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곧 야당의 실세가 될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았다. 이제 몇 분만 지나면 다시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그 동안 유대석은 다시 사진을 꼼꼼히 살폈다. 실내가 어두워 사진이 흐릿하긴 했지만 크게 확대되어 두 사람의 표정까지도 볼 수 있었다.

"웃는 것을 보니 죽이 잘 맞는 모양이군. 하지만 배신한 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후후후!"
사진 상으로는 둘이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그건 얼과 면도날이 웃는 장면들만 골라서 보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사진으로 넘어가자 유대석은 돋보기를 당기며 유심히 보았다.

"뭔가를 넘기는 것 같은데 뭐지?"
신진수가 각서를 건네고, 최갑진은 그것을 보는 장면이었다.
"만약 이 사진이 어제 찍은 거라면 놈은 최갑진에게 내가 발목당으로 간다는 것을 말했을 것이다. 골치가 아프게 생겼군. 그나저나 도대체 이게 무슨 종이지? 뭘 넘겼기에 최갑진이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유대석은 몰려드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야당에 입당한 시점에 이런 일이 터졌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신진수는 자신의 비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으음!"
얼마나 긴장했던지 그는 전화벨 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여보세요. 아! 김 이사, 날세. 그래, 알아봤나? 아직도 그대로 가지고 있던가?"
예상대로 A증권의 김 이사였다.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거래자의 계좌와 비밀번호는 물론 거래내역까지 확인하려면 아마 여러 명이 고생했을 것이다. 그만큼 유대석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권력 앞에서는 예금자 보호법이나 보안 규정 따위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예, 주식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으음! 예상대로군. 죽일 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닐세. 수익률은 어떤가?"
"오늘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45% 정도 됩니다. 상당히 좋군요. 조심하십시오. 잘못하면 주가조작의 의심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이 주가는 5% 가량 떨어졌다. 그것은 우석이 주식을 매도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게. 그리 오래 하지는 않을 거니까."
증권회사 이사 정도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원래 주가조작이란 게 단기간 내에 주가를 올린 다음 이익을 챙기고 빠지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혹시 다른 문제라도 있나?"
"돈이 너무 많이 투입된 것도 그렇지만 투자한 회사들이 대부분 자금 사정들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김 이사는 유대석이 자금을 회수했을 때 회사들이 받을 충격을 우려했다. 하지만 재단의 재산이 모두 투입된 것을 모르는 유대석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원래 투자야 그런 곳에 하니까 별 문제는 아니고, 헌데 돈이 많이 투입됐다는 건 무슨 말인가? 하긴 200억도 작은 돈은 아니지."

"200억이라뇨? 2000억이 아니고요?"
"2... 2000억이라니? 난 200억만 투자하라고 했는데. 그럼 놈이 재단을 정리한 돈까지....... 그게 분명한가?"
"확실합니다. 지금 제가 모니터로 직접 확인하고 있습니다. 2000억에 45%를 더하면 모두 2900억입니다."

그 정도면 대형 증권사의 하루 거래량과 막 먹을 정도의 거금이다. 물론 신진수가 직접 동원한 자금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지금 그것을 팔 수는 없나?"
유대석은 주식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수익률이 높더라도 신진수가 배신한 이상 그것은 그의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대석에게 2000억 이상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최갑진이 앙심을 품고 주가를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벌써 5%나 떨어지지 않았는가.

"그건 곤란합니다. 본인이 아니면 거래를 하기 힘듭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방법이 없나? 김 이사도 그게 내 돈이란 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제가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어서 말씀해 보시게."
"예, 하지만 고문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일단......."
김 이사는 차분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 동원해서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잘 들었네. 김 이사의 도움을 잊지 않음세.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하시게."
유대석은 전화를 끊고서 담배부터 찾았다. 그에게는 고민거리가 있을 때마다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이자 표정이 조금 풀렸다.

"멍청한 놈, 그렇지 않아도 제거하려 했는데 오히려 잘됐다. 흐흐흐, 유대석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보여주마."
그는 화를 삭히면서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신 실장인가? 나 이사장일세."
"아! 유 고문님. 어쩐 일이십니까? 참, 먼저 축하의 말씀부터 올리겠습니다."
신진수는 증권방에 들어가려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유대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긴장했으나 금방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하하! 고맙네. 자네에게서 유 고문이라는 소릴 들으니 왠지 어색하군."
유대석은 표정은 굳었으나 목소리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부드러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면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헌데 어쩐 일이십니까?"
신진수는 혹시 그가 눈치를 채지 않았나 해서 슬쩍 떠보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일은 무슨 일? 뉴스를 보면서 자네의 얼굴이 떠올라서 전화를 했네. 참, 주식에 투자한 돈은 모두 정리했나?"
"아! 그거 말입니까? 모... 모두 정리했습니다."
주식이란 말이 나오자 신진수는 말을 약간 더듬었다.
"그럼 내일 좀 가져오게. 재단을 정리한 것도 같이."

"그건 갑자기 왜......."
신진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자가 혹시 눈치를 챈 건 아닐까?'
그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유대석과 마주보고 얘기를 했다면 금방 들통났을 것이다.

"다른 건 아니고 이제부터는 돈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지 않겠나? 아무래도 통장이나 주식으로는 불안해서 말이야. 작심당에서도 나를 눈에 가시처럼 볼텐데 조심해야지."
"그야 그렇지요.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사실 자네에겐 그 동안 말하지 않았는데 전 정권 실세들 중에는 무기명 채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네. 그래서 그걸 사는 게 어떨까하고 생각중이네.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고 내일 저녁 7시까지 양평 별장으로 오게. 입당 축하주나 한 잔 하면서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보세."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무슨 말인가?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나? 오늘에 있기까지 최소한 반은 자네 공일세."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더 잘 하라는 말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헌데 돈은 어떻게 가져갈까요?"
"그냥 자네가 관리하던 대로 여러 개의 차명 계좌에 분산해서 넣어오게. 그리고 참, 주식에 투자한 돈은 자네 몫이니 그냥 가지고 있게."

유대석은 신진수가 의심이라도 할까봐 떡고물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0억을 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양평 별장에서 뵙겠습니다."
떡고물이 효과가 있었던지 신진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괜히 겁먹었잖아. 하긴 대권에 눈이 멀어서 나 같은 것에 관심이나 있을라고.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2천억을 전부 찾아야 되는데. 바보 같은 놈, 며칠만 더 참지."

그 사이 그는 증권방으로 들어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증권사이트에 접속하는 순간 얼마나 놀랬던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구입한 주식들이 모조리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 10% 이상 폭락했다. 그 중에는 하한가까지 떨어진 종목도 있었다. 원래 회사들이 건실하지 못한 데다 우석이 대거 매도를 하면서 악성루머까지 나돌게 되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에이! 전화까지 말썽이야."
그는 최갑진에게 이유를 알아보려고 전화를 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최갑진이 투자한 곳도 동반 하락했다. 물론 이유는 똑 같았다.
"안되겠다. 이런 상황에서는 팔 수는 없다. 잘못하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른다."

신진수는 매도를 하려다가 포기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천만주가 넘었다. 그것을 한꺼번에 내다 팔면 주가는 완전히 결단나고 말 것이다.
"일단 200억만 가져가서 시간을 끌어 보자."
그는 그 중 일부를 팔려고 매도 주문을 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 등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편집자 주)

덧붙이는 글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 등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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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입하게 된 이유는 조중동의 언론독점의 폐혜를 극복하려는 오마이뉴스의 노선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자회원제를 통한 다양한 의견 수렴방식에 공감한다. 2. 나의 생각(소설, 사회비평)을 표현할 매체가 필요했다. 물론 다른 매체도 있지만 본인의 정치노선과 비슷하고, 글쓰기에 제약을 받지 않는 오마이뉴스를 선택하게 되었다. 3. 노동, 사회단체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얻은 경험으로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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