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추석이 서럽기만 하다"

못가는 사람에 비하면 귀성길 고생은 귀여운 투정

등록 2001.09.29 10:30수정 2001.09.2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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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린 시절 내게 추석은 무척이나 기다려지고 신이 나는 명절이었다. 모처럼만에 맛나는 음식들을 질리도록 먹을 수 있기 때문에도 그랬고, 명절이라고 모여든 일가 친척들이 용돈 명목으로 쥐어주는 수입이 짭잘한데 따른 재미가 제법 쏠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아이까지 거느려 일가를 이룬 지금, 추석 등 명절은 나에게 있어 신이 나기는커녕 서글픔만 잔뜩 안겨주는 반갑지 않은 날들이 돼 버렸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제 살 길을 마련하지 못한 채 부모님에게 의존해 하루 밥 세 끼를 해결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걸핏하면 술값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기 일쑤인 둘째형, 그리고 아이들이 거의 성인이 다됐을 정도로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틈만 나면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 일쑤인 첫째형.

그런 형들과 나 사이의 불화와 반목을 새삼 일깨워주는 불유쾌한 자리가 바로 추석 등의 명절인 것이다.

그나마 올해는 둘째형의 행패를 견디다 못한 부모님이 얼마 전 갑자기 집을 나와 종적을 감춰버리시는 바람에 추석 차례상을 차릴 일조차 없어져 버렸고, 이에 따라 나 또한 귀향을 할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그 동안 여러 차례 반복돼 온 일이긴 하지만, 남들 모두 때 빼고 광낸 모습으로 귀향길을 서두르고 있는 가운데 우리 가족만 덜렁 집을 지켜야 할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부모님이 집을 나오신 이후, 나는 두 형들에게 적지 않은 시달림을 당해야만 했다. 평소 부모님과 각별한 정을 나누며 살아왔다는 게 그 이유였다. 부모님이 집을 나오셔서 두 형들에겐 연락을 끊었어도, 나에게만큼은 계신 곳을 알려주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으로 부모님 행방을 대라고 두 형들은 닥달을 해댔던 것이다.

이 같은 두 형들의 닥달에 대해 나는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두 형들의 생각대로 부모님은 집을 나오신 후 나에게 연락을 해오셨고, 나이 드신 두 분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핸드폰을 사다 거의 억지로 떠안김으로써 핫라인(?)까지 개설을 해둔 뒤 한 달에 한 번 꼴로 찾아뵙고 있는 상태였지만, 남은 여생 마음이나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부모님의 바람을 알고 있었기에 소식이나 계신 곳을 곧이 곧대로 알려줄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부모님을 우리 집이나, 하다 못해 집 가까운 곳으로라도 모시고 싶었지만, 두 분은 나중에라도 그 같은 사실이 밝혀질 경우 우리 가족이 첫째형과 둘째형의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해 막무가내로 멀리 떨어져 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이번 추석을 앞두고 나는 사실 많은 고민을 했다. 집안 사정상 본가에 가서 차례는 지낼 수 없다 할지라도, 객지에서 외롭게 명절을 맞고 계실 부모님을 찾아뵙는 건 어떨까 하는 고민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추석에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식농사를 잘못 지은 탓으로 노년에 객지에서 곤궁한 삶을 살고 계신 부모님에게 있어 명절날 우리 가족의 방문은 당신들의 모습을 더 한층 가슴 아프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 부모님의 가슴 아파하시는 모습을 나는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다.

평소 찾아뵐 때조차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차를 돌려 나올 때면,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자식 내외와 손녀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아두려는 듯 오래도록 뒤에서 지켜보고 서계신 부모님의 모습을 견뎌하지 못하는 나이고 보면, 추석 같은 때 한층 깊어지기 마련인 부모님의 비감이나,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귀성길 교통상황 방송을 보며 먼 길에 고생할 자식을 염려하는 마음은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추석이 지난 뒤 주말쯤 해서 나는 아내와 딸아이를 동반하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 표정으로 부모님을 찾아뵐 계획이다. 평생 일구신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 사시느라 삶은 곤궁하되 다른 어느 때보다 마음만은 편안하실 부모님을 찾아뵙고, 남은 여생을 좀더 편안하게 사실 수 있도록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를 모색해 볼 생각이다.

힘든데 뭐하러 자꾸 오느냐며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말씀은 하시면서도, 내심 우리 가족의 방문을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쁘다. 우리가 간다는 연락을 접하면 조급증이 일어 집 앞이나 동구 밖까지 나와 서성대고 계실 부모님을 뵐 생각에 내 마음은 벌써 힘찬 시동을 걸고 고속도로 위를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벌써 꽤 오랜 세월에 걸쳐 명절다운 명절을 맞지 못하면서 나는 일년중 설날과 추석 단 두 번 정도 형제들과 일가 친척들이 모여 반갑게 만날 수 있는 것만도 큰 복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나처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나마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귀향길이 아무리 힘들고 차례상 차리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걸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차라리 귀여운 투정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덧붙이는 글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벌써 꽤 오랜 세월에 걸쳐 명절다운 명절을 맞지 못하면서 나는 일년중 설날과 추석 단 두 번 정도 형제들과 일가 친척들이 모여 반갑게 만날 수 있는 것만도 큰 복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나처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나마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귀향길이 아무리 힘들고 차례상 차리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걸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차라리 귀여운 투정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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