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09.29 13:08수정 2001.10.01 16:31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 주민여러분 마을 이장입니다. 추석 명절을 받아 마을 대청소를 하고자 하오니 모두를 정자나무 앞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장닭이 연신 '꼬끼오' 홰를 치고 나자마자 확성기에서 이장님의 구성진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귀향하는 자식과 친지를 위해 마을 안길을 깨끗이 청소하자는 재촉에 추석 대목이 선뜻 다가옵니다.
잘 익은 감나무가 담장 너머까지 드리워진 추석(秋夕)입니다. 동네 까치는 무엇이 바쁜지 밤나무 숲과 동구 밖을 오가며 반가운 손님 맞이를 합니다. 황금빛 들녘으로 향하는 경운기의 발동소리도 바쁘고 송편 빚을 쌀을 찧는 방앗간도 바쁘지만 매일 이처럼 바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신명나겠습니까.
귀성이 시작됐습니다. 일부 언론은 귀성행렬을 전쟁에 비유합니다. 아닙니다. 전쟁이 아니라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아름다운 대 이동의 물결입니다.
부모 계신 곳을 향한 귀성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언제쯤 고향어귀에 닿을까? 조바심도 나지만 이 날을 위해 일 년을 견디고 살았습니다. 차마 잊을 수 없는 고향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귀향 차량들이 단풍보다 울긋불긋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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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시 '향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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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마을 청년회들이 동구밖에 귀향 환영 플래카드를 내걸었습니다. "어서들 오시게나 벗들, 타관 땅 고단한 객지 밥에 얼마나 서러웠는가." 고향 벗들은 객지로 떠났다 돌아오는 그리운 친구를 위해 윷판도 챙겨놓았습니다. 동네 콩쿨대회를 위해 마이크며 앰프도 섭외해 놓았습니다. 무대설치에 바쁜 청년회장의 구슬땀이 정겹기만 합니다. 이제 벗들과 어울려 한판 놀 차례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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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마을 이름만 보아도 눈물 왈칵 쏟아질 것 같습니다. 세상천지 오만 곳 떠돌며 정들어보려 했지만 한 몸 뉘일 곳은 고향 땅 만한 곳이 없습니다. 고속도로에 지치다 고향 길 인근 소로(小路)에 들어서면 가슴이 뜀박질하기 시작합니다.
눈에 익은 상점과 이웃들의 쭈그러진 얼굴들, 가을 바람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아는 척합니다. 물론 고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험한 세상을 따르다보니 모질어 진 탓인지 인심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고향은 고향입니다.
고향(故鄕)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의 시 '고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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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읍내에 동창회 모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벌거숭이로 자맥질하다 허기져 구워 먹은 개구리 뒷다리며 메뚜기의 고소한 맛, 입가에 묻은 숯검정에 얼굴 마주보며 키득거리던 친구, 학교 가던 들길 가위 바위 보로 업고 업히며 책가방 뭉쳐 들고 가던 친구, 그 친구들이 모이자고 합니다.
세상 어디 깨복쟁이만한 친구 있습니까? "어이 이 사람아 잘 살았능가? 그래 자식이 몇 이라고..." 고향 친구의 억센 손이 객지에서 돌아온 동창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어색한 높임말도 그새 '야자'로 돌아가고 추억의 책가방을 펼치면 밤 서리하다 혼쭐나던 추억이 주렁주렁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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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누이도 오라비도 다 떠난 고향들녘에 황금물결이 일렁입니다. 대처로 가자던 자식에게 "아스팔트에 어찌 농사를 짓는다냐!"며 뿌리치던 아버지의 혼이 춤을 춥니다. 농사꾼 세상살이 그래왔듯이 잘 키워논 자식놈들 대처에 내어주듯 등골 휘며 키워 놓은 알곡을 똥금에 빼앗길 판입니다.
흉흉한 가뭄도 장마비도 태풍도 이겨냈지만 농민을 후려치는 농정 앞에는 농약병만 어른거립니다. 저 황금들녘에 울려 퍼지던 풍년가를 언제 다시 신명나게 불러볼지 아버지는 마른 가슴팍에 담배 연기를 채워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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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허물어져 가는 고향집 마당에는 나락이며 붉은 고추들이 널려졌습니다. 담장 울에는 호박넝쿨과 박이 열렸습니다. 저렇게 잘 익고 알찬 것 투성이인데 고향은 자꾸만 허물어집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아닙니다. 버림받은 우리들의 아버지와 형제가 농자(農者)입니다. 이거 지어라 말아라, 이거 심어라, 저거 심어라... 농정에 망가진 들녘에는 농약병만 뒹굽니다. 혹여, 저 허물어진 고향집에서 들려오는 탄식을 자식들마저 귀 틀어막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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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부모님이 자꾸 야위어갑니다. 갈수록 팍팍한 세상, 타관객지로 떠난 자식생각에 맘이 편치 않은 탓입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고급스런 선물보다, 자식의 건강과 온전한 세상살이입니다. 자식의 안부전화가 끊기면 전전긍긍하는 부모님 심정을 타관객지에 지친 자식들이 제대로 헤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늙어 굽은 등허리로 손주를 반기는 부모님, 반가워 함박 웃음 짓는 부모님은 자식들이 떠날 무렵이면 허전한 어두운 그림자로 눈물을 감추기 마련입니다.
오실 때 그 마음처럼 가실 때도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 듬뿍 안고 가야 맞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종종 안부전화를 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입니다. 제 자식만 챙긴 불효를 덜어버리고 부모님께 아낌없는 정성을 다해야 옳습니다. 약 한 첩에 담긴 그 정성에 부모님의 골병은 씻은 듯 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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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저절로 열린 박이 듬직하게 자랐습니다. 저절로 열리고 자라는 박처럼 제 명(命) 제가 타고날 것이라고 믿으며 주렁주렁 태어나 자란 자식들입니다. 부모 맞잡이인 큰형과 큰누이의 등에 업혀 자란 막내가 장성해 아비와 어미가 됐으니 세월 참 무섭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잘 자라는 저 푸른 것들처럼 푸르게 살아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에 근심이 걷히질 않습니다. 세상살이 뜻대로 될 순 없지만 정직한 농부의 자식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자식을 도둑이 되라고 키운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 해꼬지로 제 등만 따뜻하라고 가르친 아버지는 이 땅에 단 한 분도 없는데 험한 세상을 휘젖는 저들은 누구의 자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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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호진 |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고 조상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끼! 애비, 에미없는 후레자식 같으니라구!"만한 험한 욕이 어디 있습니까? 바쁜 세상에 눈 코 뜰 새 없지만 조상에게 술 한잔 따르고 등 엎드리는 것이 후손된 도리입니다.
조상의 묘에 무성한 잡초로 웃자랐다면 지하의 조상님들이 서러워할 것입니다. 세상 잘나 나라 밖으로 떠난 자식들 허다하지만 이 땅에 남은 우리들이야 산모롱이 지나 가파른 산에 누운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를 잊지 않고 찾아가야 합니다.
돌아오지 못한 벗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청운의 꿈은 바래지고 망가진 몸으로 귀향열차 떠난 텅 빈 서울의 포장마차에 남아 눈물의 소주에 쓰러진 못난 친구가 몹시도 보고 싶습니다. 빚쟁이 성화에 밤 도망을 한 이웃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보름달을 보며 눈물 훔칠지...
친구는 이웃은 어쩌면 타관 땅 노래방에 들어가 이 노래를 부를지도 모릅니다. 부르면서 울고 울면서 고향을 불러 목젖에 눈물이 가득 고일 것 같아 가슴 아프기만 합니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뿐이 곱뿐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잡고 고개 마루 넘어서 갈 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나훈아의 노래 '고향역' 가사 1절>
나라도 집안도 뒤숭숭한 시절입니다. 수 십번 망했을 이 나라가 건재하게 존재한 것은 고향 때문입니다. 세상이 뺏은 기운을 얻는 곳은 고향이며, 슬픔과 아픔을 씻겨주어 성한 육신으로 되돌려주는 곳도 고향입니다. 팍팍한 세상살이 믿을 친구 하나 없어 야멸차기만 할 때 "친구야, 친구야 내 친구야" 불러보는 그 이름은 고향입니다.
올해 추석 한가위는 효도의 정과 친구들과의 우정이 달덩이 같아서 오는 발길도 가는 발길도 포근해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고향은 천년 만년이 지나도 우리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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