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누렁이가 사라진 이유는?

때깔 고운 새옷입고 동네 누빌 생각에 그만...

등록 2001.09.30 12:00수정 2001.10.01 18:0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눈썹 같은 달이 조금씩 부풀어오르더니 점점 사위를 밝혀가고 있다. 고샅부터 샅샅이 핥아가는 달빛의 혀끝은 온 동네 모양을 달달달 외우고도 남겠다. 저 둥근 달이 하늘 중심의 축이 될 때는 세상의 모든 모난 것들도 덩달아 둥글둥글해져 풍요로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

ⓒ 배수원



추석을 며칠 앞둔 동네는 벌써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제수용 과일이며 생선을 미리미리 손봐 두려는 사람들로 인해 오일시장은 시끌벅적하고, 오고가는 흥정에 저마다 흥이 철철 넘쳐 사람들의 얼굴에는 함박꽃 웃음이 가득하다. 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저 부대끼는 소리들이 세상을 살맛 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나 또한 그 소리들 속에 묻혀보고 싶어진다.

과일 전을 지나 아이들 옷을 파는 좌판을 지나고 있을 때, 할아버지인 듯한 노인이 손자 옷을 고르고 입혀보느라 진땀을 흘리고 계신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꼬추 딸랑딸랑한 손자 깨를 벗겨 이 옷 저 옷을 입혀보는 광경이 얼마나 우스꽝스럽던지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배시시 웃음을 베어무는 어린 날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어머니 명주치마 끝을 옹골지게 붙잡고 오일장을 따라나섰던 추석 즈음의 아련한 기억이...

추석을 한 달이나 앞두고 어머니께 추석빔을 사달라고 옹을 파기 시작하였다. 다랑 논 몇 배미에 밥 부치고 사는 살림살이 때문에 언감생심 새 옷 입는 꿈을 꾸어보기나 했을까마는 그 해는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유별나게 심통을 부렸던 것 같다.

그 시절, 추석날 아침에 때깔 곱고 폼 나는 옷으로 차려입은 또래 아이들이 상점이며 놀이터를 누비고 다니던 모습이 몹시 부러웠었다. 색깔 고운 운동화 위로 두어 번 접어 올린 바지에 행여나 흙이라도 묻었을까봐 연신 털어내던 깔끔이 부러웠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땟자국이 울울한 옷을 입은 나 혼자만이 외톨이라는 슬픔이 더 컸었다.

물기 없는 감자 쪼가리만큼 팍팍한 살림에다 아버지마저 사고로 몇 달째 방안에 누워만 계셨기에 다섯 식구의 생계가 어머니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런 마당에 철없는 아들이 새 옷 타령을 하고 있으니 남의 자식들처럼 새 옷 한 벌 사주지 못한 어머니의 옹색한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을까?

"나 요참 추석 때 옷 안 사주면 밥도 안 묵고, 바깥에도 안나가불라요...."
"으메, 저 철없는 놈 좀 보그라이.....휴우.......으째 세상이 요로코롬 쫙쫙 오그라든다냐?"
옹기종기 초가지붕 위로는 덜 여문 달과 어머니의 한숨이 시리게 버무려지고 있었다.


철없는 아들의 보챔을 달래기라도 하듯 어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다로 갯것하러 나가셨다. 갯살이로 벌어오는 돈이라야 아버지 병 수발 밑으로 솔솔 들어가 버리고 집안에는 단 한 푼의 여윳돈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린 마음에도 추석빔 한 벌 정도 살 돈은 남아있으리라 믿었고 또 이번 해 만큼은 꼭 사 주시리라 믿고 싶었다.

추석을 며칠 앞둔, 꼭 오늘같이 장이 서는 날이었다. 아침 밥 숟갈을 놓자마자 어머니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오늘은 반드시 어머니 허리춤이라도 붙잡고 따라나서서 새 옷 한 벌 얻어 입을 참이었다. 며칠을 졸라대는 심통에 어머니도 신물이 났는지 이내 체념하신 듯싶었다.
"이놈이 한 번 졸라대면 항우장사도 못해 보겠네. 어여 장에 가보자."
"진짜로요? 글믄 꼭 새 옷도 사주어야 혀, 알았제?"


어머니께서는 좋아서 폴짝폴짝 뛰는 나를 앞세우더니 우리 집에서 2년이나 한솥밥을 먹고 있던 누렁이를 끌고 나가셨다. 누렁이는 귀가 쫑긋하고 꼬리가 착 올라붙어 있어서 여간 영리하지 않았다. 나와 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고 바깥일 나가시는 어머니 발끝을 그대로 쫄쫄쫄 밟고 다녀서 어머니의 작은 그림자 같은 개였다. 식구들 모두가 그렇게 좋아하는 누렁이인지라 내가 심심할까봐 동무라도 하라는 요량으로 데리고 가는 줄만 알았다.

대목이 닥쳐서인지 장터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지만 처음 본 굿판에도 기웃거리고 희한한 물건들을 정신없이 구경하였다. 덩달아 사방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군것질거리가 입 안에 군침을 가득 고이게 만들었다.
"쩌기 잠깐만 다녀올란다. 여기서 잠깐만 굿 구경하고 있어라이?"
어머니는 누렁이를 끌고 어디론가 황급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나는 장돌뱅이들이 벌여놓은 굿판에 흠씬 빠져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헐레벌떡 돌아온 어머니는 연방 죽는 시늉을 하며 안절부절 못하셨다.
"으짰으까 누렁이가 어디로 가버렸다이? 으짜면 좋겠냐 이 일을....."
"에이, 엄마 걱정 마 누렁이는 엄청 영리한께롬 집으로 돌아올 거여....."
"그러것제잉.....누렁이는 영리한께 우리보담 먼저 집에 와있겠제?"

사라져버린 누렁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신기하고 희한한 구경거리들이 누렁이를 까맣게 잊게 만들었다. 동생들 추석빔도 한 벌씩 사고 내 옷은 내가 맘에 든 걸로 직접 골랐다. 조른 김에 한 번 더 졸라서 손오공이 그려진 운동화도 샀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어머니는 내가 사달라는 대로 사주셨다. 저녁 어스름이 거뭇거뭇 내릴 때야 장본 물건들을 이고 지고 집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동네어귀만 들어서도 부리나케 쫓아 달려나오던 누렁이가 오늘은 보이지가 않았다. 이상하다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새로 사온 옷들을 동생들과 입어보고 뽐내느라 잃어버린 누렁이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불을 펴고 잠자리에 누워서야 누렁이 생각이 불현듯 났다.

"엄마! 누렁이가 으째 안 보인다요? 시방 부엌에 쪼그리고 앉았을까?"
"대처나 으디 갔을까? 걱정마라라잉 오늘 안 오면 내일이라도 돌아오겄제..... 언능 자거라"

그러나 명절이 다 지나도록 누렁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나는 누렁이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장터로, 이웃 마을로 누렁이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다. 울고불고 생난리를 쳐보았지만 누렁이가 돌아 올 리는 만무하였다.

묘한 일이지만 나와 동생들이 누렁이를 찾느라고 애를 태우고 있는 반면에 누렁이를 가장 좋아하셨던 어머니께서는 누렁이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돌리고 시큰둥하시는 것이었다. 결국 그 해는 추석빔을 입고 외톨이 신세를 벗어나 친구들과 당당히 어울릴 수 있는 기쁨도 있었지만 누렁이를 잃어버리는 슬픔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년이 지나서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옹색한 살림이라서 누구에게 추석빔을 사주거나, 받지도 못하는 처지여서 누렁이라도 팔아 자식들 추석빔을 사주셨던 어머니의 둥근 사랑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머리 위로 어머니처럼 환한 달이 떠오르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쓰레기 모으던 독거 노인이 '딱 한 번' 꺼낸 말, 잊을 수가 없다 쓰레기 모으던 독거 노인이 '딱 한 번' 꺼낸 말, 잊을 수가 없다
  2. 2 조용하던 익산 시골 마을에 주차요원까지... 무슨 일이람? 조용하던 익산 시골 마을에 주차요원까지... 무슨 일이람?
  3. 3 [단독영상] 청계천 백로 붙잡고 사진 찍는 외국 관광객들 [단독영상] 청계천 백로 붙잡고 사진 찍는 외국 관광객들
  4. 4 김어준씨에게 묻습니다...그게 상식에 맞습니까? 김어준씨에게 묻습니다...그게 상식에 맞습니까?
  5. 5 [단독] '연어 술파티? 외부 음식 없었다'던 수원지검... 교도관 문답서엔 "비싼 도시락" [단독] '연어 술파티? 외부 음식 없었다'던 수원지검... 교도관 문답서엔 "비싼 도시락"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