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09.30 02:48수정 2001.10.01 16:36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목요일 점심나절, 현관에 놓아둔 쌀자루 옆구리에서 딸아이의 신발을 집어드는 순간이었습니다. (흐익!)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의 정체는 '피'였습니다.
동시에 날아가 꽂힌 눈길에, 쌀자루는 족히 한 컵은 됨직한 검붉은 액체에 밑자락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아침부터 코 끝을 어지럽히던 출처모를 '비린내'의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그 전날 밤 아홉시쯤 때 아닌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찾아 올 이가 없던 터라 의아하고, 또 한편으로 의심스러운 생각에 문 밖에 귀만 기울인 채 말을 건넸습니다.
"누구세요?"
"아 예 ㅇㅇ택밴데요."
(택배? 이 시간에?) 현관의 바를 걸어둔 채 빼꼼히 열어 본 곳에 정말 택배회사 직원인 듯한 사람이 무언가 묵직한 물건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저어 앞 집에 온 물건인데요, 사람이 없어서요, 잠깐만 맡겨주세요. 금방 연락할께요"
"그러세요 너무 늦은 시간에 배달을 오셔서..."
"저희 요즘 추석 선물 배달이 많아서 무지하게 바쁩니다"
"네에, 수고가 많으시네요"
착한 일 한다는 생각에 물건을 받아 현관에 놓아둔 40kg짜리 쌀자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자주색 부직포 가방에 담겨져 가로세로 50cm는 넘게 덩치가 크고 묵직한 그것의 이름은 '냉동갈비'였습니다. 그 냉동갈비 녀석이 쌀자루 위에서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 핏물을 흘리며 '해동갈비'가 되어 다음 날 점심을 맞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그만 감기 걸린 남편에게 끓여주자고 대추와 생강을 사러 딸아이의 손을 잡고 슈퍼를 향하던 발길을 붙잡아세웠습니다. 사실 슈퍼에 갈 일이 없었더라면, 그 물건은 그 다음 날 상한 갈비가 되어서야 눈에 띄였을지도 모릅니다.
현관에 놓아둔 쌀자루는 시부모님께서 찧어주신 쌀인데, 창고 속에 넣어둔 쌀에서 그만 바금이가 생겨 창고 안을 설설 기어다니는 바람에 혹여 벌레라도 옮을까봐 그 안에 두지 못하고 현관에 자루째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냉동갈비로 인해 수난을 겪을 줄은 몰랐습니다.
쌀자루를 동여맨 주둥이에서부터 타고 흐른 검붉은 액체는 쌀자루 옆구리에 굵직한 두 줄의 무늬를 그리며 씨줄과 날줄을 따라 일부는 말라붙은 채, 그리고 일부는 여전히 축축하게 흐르며 쌀자루 밑둥까지 타고내려 흥건히 고여 있습니다. 그것을 보자니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이 여간 비위가 상하지 않습니다.
한동안 사람이 있는지 어쩐지 인기척이 별로 없던 앞집이라서, 지역광고잡지를 뒤져 이따금 놀이터에서 만난 앞집 꼬마 주연이가 자랑했던 동네 입구의 '치킨이모'네를 찾았습니다.
"여보세요? 거기 주연이 이모댁인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여기는 주연이네 앞 집인데요, 어제밤에 주연이네집으로 택배가 왔는데 사람이 없다며 저희집에 맡기고 갔거든요, 그게 냉동갈빈데 녹아 흘러서 지금 저희 집이 난리예요"(사실 난리일 것까지는 없었는데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저런 제가 지금 바로 올라갈까요?"
"네 그래 주세요."
화장지로 쌀자루에 묻은 피를 찍어내고 있는데 주연이 이모부가 올라오셨습니다.
"아이구 이거 어쩌죠? 그거 쌀을 다른 자루로 옮겨야겠는데요, 이게 피라서요. 쌀을 씻으셔야 할 것 같아요. 남편 오시면 해달라고 하시든가 뭣하시면 제가 지금 해드릴까요?"
"아니예요. 그냥 두세요. 그 택배회사 직원이 금방 연락하겠대서 여기 올려놨었는데 이렇게 녹아 흐르는 건 줄은 몰랐네요."
"아이구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할 수 없죠 뭐..."
주연이 이모부가 짐을 들고 내려간 후 다른 쌀자루를 가져와 피가 묻은 것과 묻지 않은 것을 가려 퍼담고 보니 씻어야 할 쌀이 5~6kg은 족히 됩니다.
분무기를 가져와 바닥에 말라붙은 핏자국까지 닦아내고 씽크대에 쌀을 부어 씻었습니다. 부분부분 덩어리가 져서 강정처럼 말라붙은 쌀을 떼어내 씻고 또 씻자니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씻은 쌀은 김치통으로 한 통이 넘습니다. 그걸 냉장고에 넣어두었습니다.
그 쌀로 밥을 지어먹던 금요일 점심 무렵, 앞집 주연이 엄마가 주연이와 함께 오셨습니다.
"그 쌀이요, 변상해 드릴께요."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어제는 제가 좀 흥분을 해서 '난리'어쩌구 했는데요, 씻어놓고 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저희 지금 이 집에 없거든요. 가끔 물건가지러 오긴 하는데 친정에서 지내요. 왜 치킨집으로 연락하지 않고 여기로 가져왔는지 모르겠네요"
"모르는 분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죠. 쌀자루 위에 올려놓은 제 잘못인 걸요. 저희는 괜찮은데요. 그거 고기가 녹아서 어떻게 해요?"
"그래서요 택배회사에 항의하려구요. 오늘 아침에야 연락을 했더라구요. 그 때는 상황을 잘 몰라서... 쌀이 얼마나 못쓰게 됐나 보려구 왔어요."
"못쓰게 되기는요, 씻어 놓았는데 떡 해먹든가 그냥 밥 해먹든가 하면 되지요 뭐."
"그래두 미안해서..."
"아유 괜찮아요, 정말 신경 안쓰셔도 돼요."
그렇게 돌려보낸 주연이 엄마가 한 시간쯤 후에 딸아이 입히라고 티셔츠를 하나 사들고 다시 오셨습니다.
"아유 뭐 이런 걸 사오세요."
"너무 미안해서요."
"아니예요, 무얼 어쨌다고 제가 이 걸 받아요."
"받으세요, 그래야 맘이 편하니까요"
"제가 되레 미안해지는데... 고맙게 잘 입힐께요."
이렇게 해서 추석선물을 하나도 받지 못한 딸아이에게 예쁜 웃도리가 생겼습니다.
앞집 꼬마 주연이는 올해 여섯살로 엄청나게 붙임성이 좋은 아이입니다. 가끔 현관문을 열다 눈이 마주치면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아예 '이모'라고 하며 반가워하곤 했습니다.
그 덕에 주연이 엄마와도 몇 번의 수인사를 건넸었는데 그게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성질 못된 제가 무척이나 퉁퉁거렸을텐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주연이네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제는 주연이 엄마가 전화를 하셔서는 '택배회사에서 쌀을 변상해주고 고기도 상했으면 현물로 변상해주겠다고 했으니 쌀을 가져오면 꼭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제가 점점 더 미안해집니다. 쌀을 정말 받아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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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초창기에 시민 기자 활동을 하며 사는 이야기에 글을 썼습니다. 후원회원이 되려고 18년만에 다시 로그인을 했습니다. 지금은 독서논술 지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