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그의 근황이 궁금하다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그의 사랑이 끊임없이 펼쳐지기를

등록 2001.10.02 05:16수정 2001.10.0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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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저께 밤에 천주교에서 하는 한가위 차례 순서를 적기 위해 옛 다이어리를 꺼내어 보았습니다. 넘기다 보니 신문 스크랩을 한 기사 몇 개가 눈에 띄어 훑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결심 공판에 들어서는, 수갑인지 포승줄인지에 두 손을 묻은 박노해의 사진이 보였습니다.

너무 오래간만입니다. 노동자들의 시인 박노해를 생각한 것은 천만뜻밖입니다. 그의 본명은 박기평입니다. 갑자기 그의 요즈음 생활이 궁금해졌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작년인 것 같습니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가족이 함께 탑골 공원에 갔습니다. 거기에 뜻깊은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을 대표하여 33인이 나와서 유권자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행진하는 행사입니다. 시인 고은 선생님이 대표로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격정적으로 낭독한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그 33인 가운데 박노해도 소개되었던 걸로 압니다.

마찬가지로 작년의 일입니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후 처음 맞이하는 광주민주화운동 때에 광주에 간 개혁파 의원들이 술판을 벌려 엄청난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박노해도 있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실망했던지요. 그 이후 그의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시인 박노해, 그의 '노동의 새벽'이란 시집을 감명 깊게 읽고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손 무덤'이란 시가 섬뜩하면서도 노동자들의 아픔을 극명하게 잘 나타냈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노동자들의 삶이 극도로 힘들었던 시절에 그의 시 한편 한편은 바로 노동자들의 한이고 눈물이고 희망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나중에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책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에 대해 노동자의 시각으로 하나하나 비판해가면서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다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에 서초동 법정에 가보았습니다. 오후 2시부터 시작한 법정 안은 방청객들로 가득 채워지고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사이사이 바닥에 앉아서 결심공판을 지켜보았습니다.


지금도 머리 속에 그 당시의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신문에 있는 사진보다도 더 분명하게 떠오릅니다. 하얀 수의에 조그마한 체격, 묶인 두 손에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 들어와 자리에 앉은 그의 모습이.

재판관의 여러 가지 말과 검사와 변호사의 말은 거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박노해가 마지막으로 읽은 그 종이 뭉치의 어마어마함이 생각날 뿐입니다. 그것을 다 읽었는지 아니면 중단했는지 모릅니다. 스크랩한 신문을 조금 살펴보니 3시간이 넘게 그 원고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 날 검사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방청석 맨 앞에 앉은 한 할머니가 일어나 검사석을 향해 심한 욕을 하며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할머니가 박노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형! 만약에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 순간부터 사형 당하는 날까지 하루하루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요? 6시간이 넘게 진행된 공판이 끝나고 집으로 오면서도 마지막 그 낱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발 형량이 줄어들어 사형만은 면하게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어느 시사 월간지에서 그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참 삶의 자세를 잘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에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에 집에 왔더니 어머니께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주려고 국수를 끓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배가 고파서 빨리 달라고 떼를 썼더니 고생하는 일꾼들 먼저 주고 난 뒤에 주겠다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그는 막무가내로 빨리 달라고 계속 졸라대었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심하게 내면서 큰 대접에 여러 명이 먹을 수 있는 국수를 주면서 다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 네가 나중에 무엇이 되겠느냐? 그렇게 자기만 생각하는 네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일하느라고 일꾼들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들이 먼저 먹어야지 그래 학교 갔다온 네가 먼저 먹어야 되느냐? 자기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하고서 무엇을 한단 말이냐? "

박노해는 어렸을 때의 이 일을 늘 기억하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어머니의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여러 운동과 사상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회를 좀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그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없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부조리한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애를 쓴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나의 소망은 고맙게도 이루어져서 그는 감형에 감형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그가 석방되어 자유롭게 되었을 때 나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우기도 하고, 새로운 시민 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도 간혹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소식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로 주어진 생을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도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의 생활을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세상이 예전과 많이 바뀌어져서 평범하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노동자들의 시인, 얼굴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동자 시인, <박해받는 노동자들을 해방한다>는 의미에서 '박노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그가 어디에선가 소외 받고 고통에 신음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선사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의 저서 <참된 시작>처럼 변화된 시대에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역할이 새롭게 시작되었고, 지금 열심히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그의 모습을 두 번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서글서글한 표정에 늘 웃음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더불어 사는 삶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는 그렇게 살아나가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그의 모습을 두 번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서글서글한 표정에 늘 웃음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더불어 사는 삶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는 그렇게 살아나가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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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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