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 눈은 왜 1천개나 될까

<송광사 여름수련회 수행기 9>

등록 2001.10.03 19:28수정 2001.10.08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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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 연구자 행세를 하며 살아온 세월은 나를 중진의 자리에 올려 놓았지만, 나의 삶과 멀어져가는 학문적 글쓰기는 언제부턴가 나를 쓸쓸하게 했다. 논문도 논문을 쓰는 사람이 삶에서 터득한 지혜를 담고 또 논문이 일상적 삶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소망이 시간이 흐를수록 간절해졌다.

그 무렵 공(空)을 주제로 한다는 <구운몽>이 다시 읽고 싶었다. 광산 김씨 명문 가문 출신의 유가 사대부인 김만중 선생이 불교적 주제를 담은 <구운몽>을 지은 것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 고개에서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 읽어보니 <구운몽>에는 죽음을 앞둔 사대부가 세속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하게 들어있었다.


반야심경의 공에 대한 현봉 스님의 강의를 듣는 자리에서 <구운몽>과 관련된 나의 학문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내가 국문학 연구자가 된 뒤 처음으로 내 인생의 고민을 끌어안고 쓴 <구운몽> 관련 논문을 떠올린 것도 당연했다.

<구운몽>에서 육관대사의 수제자인 성진은 미모의 여덟 선녀들을 만나 본 뒤 세속의 부귀영달을 떠올려 부러워한다. 그래서 세속 인물인 양소유로 환생하여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 그러나 결국 다시 성진으로 깨어난다. 성진이 양소유로 태어나고 다시 성진으로 돌아오는 환생의 각 단계는 바로 앞 단계의 부정이다.

양소유가 처음의 성진을 부정했다면, 그 양소유를 부정한 성진은 처음의 성진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환생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육관대사는 깨어난 성진이 양소유를 부정하자 못마땅해 한다. 성진이 아직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육관대사는 깨어난 성진이 양소유의 세계를 한갓 꿈이라고 부정하는
태도를 특히 호되게 나무랐다. 양소유에 의해 추구되었던 현실적 삶
을 허망한 것으로 부정한 것이 깨어난 성진의 결산이었다면, 그런 성진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어줌으로써 성진을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게 한 분이 육관대사인 것이다.

나는 육관대사의 이런 태도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른 작가 김만중의 시선을 읽어냈다. 양소유의 삶으로 대변된 현실적 삶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는 시선이었다. 김만중은 사후 세계보다는 현실 세계에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유가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자기 일생이 허망하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해 애썼던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김만중 선생을 위해 현생의 의의를 좀더 분명하게 찾아주고 싶었다. 그 의의는 무엇일까? 반야심경의 공 사상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서, 현생에서의 세속적 삶은 사람에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을 실천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라밀을 실천하여 사람이 스스로 달라지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보다 나은 환생이나 해탈을 위한 바탕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현생의 삶은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현실인 차안과 극락인 피안을 대립시킨다. 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깊고 넓은 강이 미망의 강이다. 그 강을 건너가는 것은 무척 어려워 뗏목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 뗏목이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미망의 강을 건너 피안으로 가는 것이 소중하지만,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궁극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니 뗏목의 비유가 적절하다.


나는 이생의 찰라적 경험 속에도 미망의 강이 흐르고 있으며 아울러 피안으로 가기 위한 뗏목도 놓여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곳 현실의 경험에 충실함으로써, 그것을 피안으로 가는 뗏목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충실하는 것 자체가 불법에 못지 않은 진리를 깨닫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보니 <구운몽>의 일부가 고쳐지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양소유가 성진으로 깨어나기 전에 스스로 각성에 이르기 위한 실천을 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양소유는 말년에 자기 삶의 방식을 반성하고 불도를 닦을 것을 결심했지만, 출가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태도는 자기의 세속 경험에 대한 허무의식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따뜻하지 않다. 그보다는 유가 사대부인 양소유의 몸으로 자기 현실에 충실하는 모습을 더 보여주어야 했었다. 양소유가 성진으로 깨어나기 전, 수행 정진을 시작하거나 민중들을 위해 보시를 시작했다면 어떠했을까.

"관세음보살의 눈과 손은 왜 천 개나 될까?"
<구운몽>에 대해 이런저런 몽상에 잠겨 있는데 이 말씀이 너무나 크게 들려 정신을 차렸다. 공 사상에 의해 세상의 본질을 깨달은 분이 관세음보살인데, 그분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거기에 무슨 상징이 들어 있을까.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이 고난에 처한 중생들을 빠뜨리지 않고 그 천 개의 눈으로 다 보아주시고, 어떤 중생의 상처도 그 천 개의 손으로 다 어루만져준다는 뜻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그 천 개의 눈과 손은 바로 우리 자신의 눈과 손, 그것도 하룻동안의 우리의 눈과 손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눈은 사랑의 눈이 되었다가 분노의 눈이 되고 저주의 눈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손은 자비의 손으로 남을 따뜻하게 해주다가도 폭력의 손이 되어 남의 몸에 상처를 입힌다. 우리의 마음과 몸은 이렇게 매 순간 쉴새없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탐진치에 얽혀 시시각각 달라지는 중생과 같은 모습으로 나투시어 중생들을 위로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위로와 구원을 받아야 할 중생을 그와는 다른 입장에서 동정하거나 아득한 윗자리에서 내려다 보며 이끄는 것이 아니라 중생과 똑같이 됨으로써 중생을 위로하고 구제한다는 깊은 뜻을 관세음보살 상은 구현하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의 이런 자비행은 지장보살의 완전한 보살정신으로 나아간 것 같았다. 온갖 세상의 중생들이 빠짐없이 모두 극락으로 천도되지 못하면 자기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언은 모든 중생들을 부처로 받들면서 스스로는 그 밑의 보살로 남는다는 자기 희생과 겸양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느긋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개똥밭에 굴러도 지장보살보다는 먼저 극락에 간다"고.

송광사 대웅보전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모셔져 있다. 연등불과 석가불과 미륵불을 지칭하는 삼세제불은 시간적 차원에서 부처의 총체인 셈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수없이 절을 하고 또 하였다. 그런데 지장보살의 서원은 모든 중생들이 다 부처가 되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삼세제불이 바로 일체 중생임을 깨닫게 된다. 삼세제불을 향해 절을 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절하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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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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