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는 기념비적인 종교시설 두 곳이 있습니다. 서문교회와 전동성당이지요. 서문교회는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지어진 교회라는 점에서 기념할 만하고, 전동성당은 건물 자체의 독특한 양식면에서 기념할 만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문교회는 1897년에 터를 잡았고, 전동성당은 1914년에 완공되었다 하는데 전문용어로는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한 형식이라 하는군요.
서문교회는 세월을 따라 흐르는 동안 수없는 개, 보수 작업을 거친 까닭으로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목제로 된 종루(鐘樓) 하나가 검은 콜타르를 칠한 채로 남아서 세월을 증언하고 있군요. 전동성당은 지나치게 웅장하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고, 육중해서 위압감이 느껴지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빛나는 교회라고 내게는 여겨집니다. 절로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하고 이렇게 안으로 외치고도 싶어지는 교회입니다.
왜 죽었느냐, 왜 쓰러졌느냐.
왜 죽였느냐, 왜 쓰러뜨렸느냐.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尹持忠)의 뜻을 이어받은 성당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아마도 유랑인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있었던가 봅니다. 아니면 어둠이 깔린 시간에 오래된 성당건물과 마주한 데서 오는 일종의 <엄숙한 감상>한 것일까요. 내 자신 비록 기독교신자는 아니지만, 자꾸 숙연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래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건물 자체에 내재한 어떤 힘이 확실히 있는 것 같습니다.
1791년 11월 23일로 기록되어 있군요. 불효와 불충 그리고 악덕의 죄목으로 윤지충이 처형된 날짜가 말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외사촌 형이 되는 그는 1759년에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행합일을 주창하는 양명학이 고루한 주자학을 물어뜯는 시기였고, 실사구시를 주창하는 반계 유형원의 실학이 한참 막 꽃을 피워올리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영민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편안한 삶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출세를 또한 출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특한 안목이 형성되어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특히나 권력이 부도덕하고 체제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정도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비루한 기회주의자들은 혼란이야말로 기회라고 외치며 날고 기고 뛰겠지만 말입니다.
윤지충은 25세에 진사시험에 합격을 했군요. 그러나 그쯤에서 그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정규 교과목들을 폐기처분해 버립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런 체제> 아래서는 벼슬이고 뭐고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는 곧장 천주교를 접하고 영세를 받게 됩니다.
당시의 천주교는 뭐랄까, 교리의 해설이 오늘날의 일부 부패한 목사들의 설교와는 사뭇 달랐던 모양입니다. 요컨대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노리는 간교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그야말로 평화와 사랑의 힘이 온 몸으로 쏙쏙 들어오는 듯한 어떤 힘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사심이 하나도 없는 상태, 오직 사람의 생명만을 고민하는 상태, 그것을 가령 순결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순결함이란 정치용어로 말해서 아마도 급진주의자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윤지충은 급진주의자였다고나 할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급진주의자들은 대개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기보다는 바깥 세상에서 들여온 매력적인 사상을 열성적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있지요. 윤지충도 예외는 아니었던가 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위패를 만들지도 않고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왕에 있던 조상의 위패까지도 모두 소각해 버렸다 하니 말입니다. 오직 하나 천주교의 교리를 받들어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천주교도 죄가 많습니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게 하고 순교라 하니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교에만 열을 올렸지 선교의 대상이 되는 나라의 문화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무시해버린,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한 오만한 죄가 있습니다.
대원군 이하응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밤중에 몰래 파헤쳐서 그 시신과 유품으로 선교에 유리한 협상을 하려 시도했던 것만 봐도 그들의 죄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훗날 공의회의 의결을 거쳐 제사를 <허락>하게 되지요. 이것은 뭐랄까, 기회주의라고까지는 차마 못 하더라도 순결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윤지충은 제사를 모시지 않은 죄로 참수형을 당했고, 그로부터 160여 년 뒤에 그의 유지를 받드는 전동성당이 세워졌으며, 한국 천주교사는 그의 죽음을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윤지충이 참수까지 당해야 했던 까닭은 아무래도 그가 일종의 <확신범>이었다는 데서 찾아야겠지요. <내> 말을 믿지 않고 <다른 이>의 말을 믿었다는 것, 다른 이의 말을 믿고 그에 따라 행동을 했다는 것, 그것은 당연하게도 체제를 부정하고 전복시키고자 하는 이의 사주를 받은 일종의 간첩으로 읽혀졌고, 따라서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천주교를 박해한 조선왕조의 정책은 사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기독교의 계율과도 통합니다. 생각을 드러내는 형식이 다르다 해서 마녀라고 화형을 시켰던, 믿음이 대상이 다르다 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던 당시의 기독교 말입니다. 내가 제일이라는 것, 다른 것은 모두 가짜라는 것,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협박이고, 선동이고, 또한 강제로 주입하는 마취제와 같은 것이기도 하지요.
여기서 문득 생각이 나는데, 언제인가 당신은 내게 말했었지요. "나 어제부터 한겨레신문 보기로 하고 구독신청 했어"하고 말입니다. 당시의 나로서는 실로 경천동지의 느닷없는 얘기였지요.
90년대 초반이었던가요. 한겨레신문이 이제 걸음마를 떼고 걷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무렵에 당신과 나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로 인해 태격태격 잘도 싸웠었지요. 정부로 하여금 최루탄을 발사하게 하는 시위대의 행태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는 당신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아득했었는지.
말발이 딸리는 나는 그때마다 당신에게 한겨레신문을 권했더랬습니다. 한겨레신문을 읽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마침내는 동참도 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내가 그럴 때마다 당신은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고, 그리고는 돌아서서 가버리곤 했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때 한겨레신문과 데모를 동의어로 파악하고 딱히 미워할 이유도 없으면서 미워하고 있었으니까요. 하긴 그 무렵에는 그게 일반적인 추세이기는 했지요.
어쨌든 그런 당신이 하루 아침에 변해버린 거였습니다. 당신을 그토록이나 손쉽게 변화하게 만든 건 다름아닌 성당의 신부님이었습니다. 당신이 나가는 성당에 주임신부님이 새로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으로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분이었던 것이지요.
그 신부님이 무슨 내용의 강론을 어떻게 했는지 나는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알지는 못합니다. "나 어제부터 한겨레신문 보기로 했어"하고 말할 때의 유례없이 반짝거린 당신의 눈빛을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이나 했을 뿐이지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발견한 사람이나 가질 수 있을법한 그 눈빛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신부님은 오래지 않아 본당으로 다시 옮겨가게 되었고, 당신은 예전의 당신으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최루탄을 몹시도 싫어하는, 체제에 비판적인 세력을 비판하다가 에이 몰라, 하고 시큰둥해하는 그런 당신으로 말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통해서 종교가 가진 힘의 가변성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을 때, 외부에서 그 에너지를 일방적으로 수혈받은 것이었을 때 그 믿음의 힘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기력한가 하는 성찰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유랑인은 서문교회의 제2대 목사를 지낸 바 있는 김인전 선생을 잠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을 지내면서 파벌과 지방색으로 누더기가 되어버린 임정 내부의 갈등을 솜씨좋게 수습한 걸로 널리 알려진 그 김인전 선생 말입니다.
충남 서천군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39세에 서문교회 제2대 목사로 취임한 김인전은 뭐랄까, 우직하게 교리 자체만을 신봉했던 윤지충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고 내게는 여겨집니다. 유교를 부정하면서도 양반으로서의 고고한 삶의 자세를 일말이나마 견지했던 윤지충과는 달리 김인전은 양반 출신이면서도 서민적이었고, 시중의 잡배들과도 즐겨 어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종교에 대한 그의 식견은 깊었고, 또한 열려 있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입장은 뭐랄까, "하나님의 복음이 교회의 예배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만인에 있다"고 역설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불교의 대승사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컨대 도그마에 잡히지 않고, 사통팔달 열려 있으면서도 확고한 주체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으로 그를 따르는 사람도 아마 대단했던가 봅니다. 3.1운동 직후에는 전주의 운동을 조종한 지휘자로 지목되어 체포령이 떨어지지요. 그러자 그는 즉시 상해로 날아갑니다. 임정에서 정무차장을 시작으로 학무총장, 외교총장, 의정원장 등등, 1923년 47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 1인 3역 그야말로 숨가쁘게 살아온 그의 이력을 들추다 보면 절로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믿음의 힘이라 할까 종교의 힘이라 할까 그런 힘 말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생각건대 종교는, 나와 내 이웃을 동급으로 인정하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한에서의 종교가 가진 그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도 같습니다. 종교의 원래 목적이 가령 내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그 평화를 기반으로 인류의 평화를 희원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으로 그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저기에 뭐가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나 혹은 광고를 접하고 몰려간다거나, 여기에 뭐가 있으니 와서 보고 느끼고 가져라, 하는 방식으로 사람이나 고작 몰려오게 해서는 기왕에 열려 있던 길마저도 자칫 막혀버리는 것이겠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본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게 어느 순간 솟아올라와서 나를 변화시키고 타인을 감화시키는 인간의 최대 최고의 사업이어야 하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어진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이 진실로 두려워하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힘이 되는 것이겠지요. 생각이 다르다 해서, 믿음의 대상이 다르다 해서, 맘에 들지 않는다 해서 함부로 죽인다거나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그런 강력한 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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