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26일 새벽. 일본에 유학중인 친구에게서 한 통의 메일이 내게 도착했다. 9.11 미국참사에 대한 미국정부의 보복전쟁이 임박해 왔다는 소식이 전세계의 신문과 방송을 온통 도배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 메일의 내용은 이번 사태는 비극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전쟁이라는 더 큰 비극으로 확대되어서는 안되며,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의사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메일을 보낸 친구는 서울시립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경학예대학에 유학 중인 이윤정(32) 씨였다. 나는 즉각 이씨에게 동의를 표하는 메일을 보냈다. 이런 내용의 메일이 오가기 전에도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한 우리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없는가 하는 고민을 함께 했었다. 반전에 동의하는 국제단체에 개별적인 서명을 한다거나, 오마이뉴스의 <평화의 쪽지 날리기>에 서명을 한 것은 그런 실천의 일환이었다.
이윤정 씨의 메일을 받기 전에, 나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비평과전망>의 편집위원들과 무크지 <모색>의 편집위원들과 이번 미국사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이런 시점에 일본에서 위와 같은 내용의 메일이 날아왔으므로, 즉각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행동을 시작해야겠다는 뜻을 이윤정 씨에게 전달했다.
이윤정 씨는 동경에도 이번 미국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많은 시민과 지식인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윤정 씨가 참여하는 인권독서회에서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몇 차례의 토론을 전개했고, 이 토론의 결과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이 서울과 동경에서 동시에, 토론의 내용을 담은 전쟁반대 평화 촉구의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서울과 동경에서 각각의 토론을 거쳐 대략 합의한 성명서의 초안을 이윤정 씨가 작성해서 내게 보내온 것이 2001년 9월 28일 금요일 낮 3시 43분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전쟁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으려면, 최소한 전쟁 개시 이전에 발표해야 하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반전여론을 조성할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명에 동참할 인원을 찾기는 어려운 조건이 있었다. 일본 대학의 경우 가을방학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많은 인원들에게 성명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얻기가 무척이나 힘들었고, 한국의 경우 추석 연휴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귀향해 있어 연락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성명서 초안을 수정한 후 최종 문안을 확정하여 일본으로 이메일을 보낸 것은 추석연휴가 끝나가는 10월 3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들은 서명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성명의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들의 행동에 동참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때문에 서명과 관련한 체계적인 캠페인을 전개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많은 수의 서명인원이나, 명망가들의 발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울과 일본의 보통 시민과 청년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의사를 교환하는 과정을 통하여,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연대의 작은 불씨를 틔워보자는 것이었다. 거창한 명분이나 이념에 대한 막연한 토론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들이 죄 없이 죽어갈 전쟁을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가 활동하는 공간에서 주변의 동료들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했으며, 많은 동료들이 서명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왔다. 한국에서는 모두 19명이, 일본에서는 17명의 청년들이 서명에 동참한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10월 6일까지 우리는 해당 서명자의 의사를 최종확인 했으며, 서명인원을 확정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윤정 씨가 서명에 동참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서명자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 측 서명자 가운데는 유학생으로는 이윤정 씨가 유일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수의 유학생이 이 서명에 동참할 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유학생이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에는 많은 부담이 있었다. 일본 국내법상으로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유학생이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할 경우 최악의 경우에는 강제 국외추방도 가능하다는 우려가 들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본내 유학생의 경우는 서명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나 이 서명의 공동발의자인 이윤정 씨는 어떤 불이익이 있더라도 서명에 동참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로써 서명인원과 성명서의 내용 모든 것이 확정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함께 토론한 끝에 결정한 이 사항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 남은 셈이다. 동경과 한국의 공동발의자들은 이 문제를 갖고 서명자들과 함께 토의를 해보기로 했다.
10월 6일 토요일 저녁 7시 한국측 서명자들 가운데 참석이 가능한 세 사람(이명원, 홍기돈, 권경우)은 흑석동의 한 설렁탕집에 모여 의논을 했다. 사람들과의 오랜 대화를 통해서, 이 성명서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오마이뉴스>에 성명을 게재했을 때,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관심 있는 사람들이 실시간대로 성명서의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에도 한국의 <오마이뉴스>와 비슷한 성격의 인터넷 신문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우리들의 성명서가 게재될 것이다.
우리들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단체의 이름을 '평화를 생각하는 국제인권모임'이라고 정했다. 이것은 평화를 향한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의 의사표현을 굳이 양국간의 경계로 한정시킬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개별국가의 경계를 넘어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지구마을의 사람들이 네트워킹을 통한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우리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인종과 성, 계급과 종교를 넘어 동일한 지구마을의 주민이며,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아름답게 충족시킬 권리가 있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지금 이 지구마을의 호모 사피엔스들이 서로에게 죽음의 무기를 겨누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 36명은 서로에게 겨누어진 죽음의 무기를 정중하게 내려놓을 것을 호소한다.
< 9. 11 미국 참사에 대한 우리의 입장>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에 대해 우리의 문제의식과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자 한다.
이번 사건에 있어서 테러행위의 부당성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이유로도 죄 없는 미국의 민간인들을 희생시킨 테러범들의 폭력행위는 용서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 차원에서, 우리는 죄 없는 불특정 다수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을 희생시킬 것이 분명한 미국의 전쟁은 용인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보복전쟁은 테러근절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테러와 이에 대한 보복전쟁이 증오의 악순환만을 가져올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국이 테러에 대한 보복전쟁을 전개시키기보다는, 테러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일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전략과 세계경찰국가로서의 패권주의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미국의 보복전쟁이 시작된다면 이것은 세계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 되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개별국가의 총력전과 민간인 대량학살이라는 끔찍스러운 결과를 초래했던 근대전의 비극적 말로가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만일 테러에 대한 응징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확실한 증거를 토대로 테러범을 밝혀내고, 이를 근거로 해당 테러범을 체포한 후 국제법에 따라 처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 궁극적으로는 전지구를 황폐하게 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적이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의 과제는 전쟁이 아니라, 전지구적인 차원에서의 평화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제는 전세계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함께 평화로운 시대를 위해 연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우리는 근대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전쟁책임이란 전쟁에 참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낸 세금이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에 쓰일 것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전쟁의 연루자가 아니라 평화의 모색자가 되어야 한다. 이에 한국과 일본의 시민과 지식인들은 목소리를 모아 반전평화 운동에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전평화운동에 연대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아래와 같이 서명하고자 한다.
서명자 명단
<한국측>(19명)
이명원(문학평론가), 이택권(문학평론가), 강성률(영화평론가), 홍기돈(문학평론가), 류신(문학평론가), 오창은(문화평론가), 권경우(문화평론가), 염정민(중앙대 대학원), 김상철(문화평론가), 고명철(문학평론가), 김학현(성대대학원생), 한재표(성대대학원생), 장인수(시인), 김미정(성대대학원생), 장은영(성대대학원생), 홍시현(홍익대학생), 이동우(중앙대학생), 하승우(경희대학원생), 최창근(경희대대학원생)
<일본측>
※일본 (17명)
東京學藝대학 대학원 사회과교육(이하 8명)
李潤楨(이윤정), 牛木純江(우시키 스미에), 國分麻里(고쿠부 마리), 坂本敦(사카모토 아츠시),井上美穗子(이노우에 미호코), 日高智彦(히다카 토모히코), 西江良子(니시에 료코),
有田琴美(아리타 고토미)
一橋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이하2명)
山口公一(야마구치 코이치), 西浦直子(니시우라 나오코)
시민(이하 7명)
及川英二郞(오이카와 에이지로) 東京學藝大學 전임강사
伊地知紀子(이치지 노리코) 愛媛大學 교수
江連恭弘(에즈레 야스히로)法政大學第二高校 교사
水谷明子(미즈타니 아키코) 시민
中西一裕(나카니시 카즈히로)상업
小林茂樹(고바야시 시게키) 사립고교 임시교사
大串潤兒 (오오구시 준지) 信州대학 전임강사
2001. 10. 8. 평화를 생각하는 국제인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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