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섯'과 'STOP' 사이 어떻게 건널까

다시 생각하는 남과 북의 언어벽

등록 2001.10.09 20:01수정 2001.10.10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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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 백두산 관람용 소형버스의 뒷모습. 옛소련에서 들여온 차지만 뒷편의 '방향지시등'을 순우리말로 바꿨다. 세상에 '섯!'이라니, 정말 애교스럽지 않은가.
ⓒ 오마이뉴스 노순택

"로 선생, 지금 뭐하는 겁네까? 시간이 긴장하고 있지 않소. 어서 차에 오르라우!"
"네? 누가 긴장하고 있다고요? 어디서 누가 왔습니까?"

지난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방북단이 1주일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안내원 선생'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소리 가운데 하나는 "시간이(또는 일정이) 긴장하고 있으니 서두르라"는 말이었다.(워낙에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보여주려니 사람도 시간도 긴장할 수밖에...)

하지만 남쪽에서는 사람 또는 생물체가 긴장한다는 표현은 써도, 시간 등의 추상명사가 긴장한다는 말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닌가.

▲ 백두산을 오르내리는 '문제'의 '섯!' 버스.
ⓒ 오마이뉴스 노순택
그래도 우리말이니까, 모두들 얼른 이해하고 안내원 선생들의 지시를 따랐다. 만약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더라면 이 같은 빠른 이해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터.

백두산에서 함께 밥을 먹었던 한 안내원도 "만약에 북남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더라면 같은 민족으로의 감정이 쉽게 생기지 못했을 것"이라면서도 "남쪽 선생들은 영어말을 너무 많이 써서 뜻을 못알아 들을 때가 혹간 있다"고 애로사항을 털어놨다.

그는 "한때 우리 공화국에서도 (한글이) 비과학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된 적이 있었지만,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는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수령님의 엄격한 지시가 있었기에 오늘의 아름다운 우리말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백두산 등반(북한에서는 산을 오를때 '등반'이란 말대신 '탐승'이란 말을 쓴다) 당시 삼지연 공항에서 천지 앞까지 방북단을 실어다 준 버스에서 발견한 '우리말 방향지시등'은 작은 충격이었다.


▲ 남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4륜 구동차량. '섯!' 대신 'STOP'이라고 써 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세상에 '섯'이라니, 그것도 느낌표(!)까지 달아놓은 '섯!'이 아닌가.

뱁새눈을 살짝 치켜뜨고 살피자면 약간은 유치하게 보일 수도, 조금은 조야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터이지만, 솔직히 '애교스러움'을 느끼며 난생 처음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낯익은 듯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북한에서 본 차량 모두가 이런 '섯!' 방향지시등을 달고 있는 건 아니다. 남녘에서 흔히 보는 차량 모두에 'STOP'이란 영문 방향지시등이 달려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비록 이데올로기와 체제는 다르다 해도 남북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통분모이자 통일의 현실 가능성을 높여주는 열쇠가 '우리말'임을 부정하긴 힘들다. 비록 한쪽이 약간은 경직된 듯하게 우리말을 지켜온 게 사실이고, 또 한쪽은 너무 유연(?)한 나머지 제 근본조차 잃어버릴 지경에 빠진 것 역시 사실이지만 아직 그 공통분모는 살아있고, 또한 굳건하다.

사실 남과 북의 '국민'과 '인민'이 '미제의 앞잡이'거나 '머리에 뿔달린 빨간 악마'가 아니라 피와 살을 나눈 형제라는 점만 서로 인정한다면,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강은 '섯!'과 'STOP'의 좁은 샛강 딱 그만큼의 차이 아닐까?

이데올로기의 색안경을 잠시 벗고, '섯!'과 'STOP'의 좁은 샛강이 어떤 모습으로 흐르고 있는지 최근의 몇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 "분단 역사에서 중대한 사변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왔다"

지난해 대북밀사로 파견됐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북경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협의하기 위해 북측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원장을 만났다가 송 부위원장이 "분단 역사에서 중대한 사변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왔다"고 첫마디를 던지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쪽에서 '사변'은 '6.25사변' 등에나 쓰이는 '변고나 재난'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 박 장관은 송 부위원장이 "(사변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의미"라는 해명을 하고서야 오해를 풀었다.

'중대한 사변'이란 말은 지난 1992년 연형묵 총리가 '남북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할 때도 사용했던 적이 있으며, 최근 북한 언론에 자주 나오는 용어다.

▲ 주체사상탑 전망대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층 표시등. 'ㅈ'은 지하층을 'ㄱ'은 기단층을 표시하는 약자다. 남녘이었다면 B1, B2가 써있을 터.
ⓒ 오마이뉴스 노순택

■ "당신은 호랑이띠? 나는 러시아산 소가죽띠요"

북한이탈주민후원회에 따르면 탈북자들이 남한사회에 적응하면서 웃지못할 사연이 많았다고 한다.

한 탈북자는 "난 호랑이띤데 당신은 무슨 띠냐"는 질문에 '허리띠 자랑'을 하는 걸로 오해하고 불쾌해하며 "나는 러시아산 소가죽띠"라고 답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12지신에 따른 '띠' 구분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 "일정이 긴장해서 국수 맛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해 남북한 정상회담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일정이 긴장해서 국수 맛이 없었을 것입니다"고 말해 잠시 어리둥절했다. 북한에서 일정, 또는 시간이 긴장한다는 말은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뜻이며, 국수는 냉면을 지칭한다.

■ 남녘과는 다르게 쓰이는 북녘 말들

감투를 쓰다 - 남녘에서는 직함이나 벼슬이란 의미지만, 북녘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을 뜻한다. 그밖에도

일없습니다(북) - 괜찮습니다(남) / 낙지 - 오징어 / 가슴띠 - 브래지어 / 가락지빵 - 도넛 / 얼음보숭이(또는 에스키모) - 아이스크림 / 물미역 - 해수욕 / 가시아버지 - 장인어른 / 단물 - 주스 / 동강옷 - 투피스 / 집단체조 - 매스게임 / 손기척 - 노크 / 끌신 - 슬리퍼 / 못신 - 스파이크 / 잠약 - 수면제 / 가두녀성 - 가정주부 / 꼬부랑국수 - 라면 / 땀받이 - 러닝셔츠 / 다리매 - 각선미 / 구멍수 - 돌파구 / 물맞이칸 - 샤워실 / 갑작바람 - 돌풍 / 불심지 - 도화선 / 구팡돌 - 디딤돌 / 물레걸음 - 뒷걸음 / 뜨게부부 - 사실혼부부 / 구석차기 - 코너킥 / 직승기 - 헬리콥터 / 어김돈 - 위약금 / 지붕마당 - 옥상 / 옮겨지음 - 각색 / 살결물 - 스킨로션

북녘은 1966년 5월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서울말 대신 평양말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언어표준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 북한표준어인 '문화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언어가 탄생하거나 소멸했는데, 게중에는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강한 단어들도 많았지만 빼어난 우리말 사용의 모범이 되는 단어들도 많이 태어났다.

특히 북으로 갔던 국어학자 김두봉, 이극로, 김영환, 홍기문 등은 우리말 지키기에 앞장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인 대화 과정에서 남녘사람이 이질감을 느끼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북녘엔 '두음법칙' 없다는 점이다. 예컨데 남녘의 이발관은 '리발관'이 된다.

우리는 늘상 영어와 우리말이 뒤섞인 대화를 하지만 북녘사람들의 상당수는 이런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남녘의 '스타'는 북녘에선 '인민배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언어의 이질감에 아무리 돋보기를 갖다댄들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부풀지는 않으니 다행일 수밖에.

독일이 통일 직후 동서독 언어학자들을 한데 모아 약 11만개의 단어를 수록한 '통일독일대사전'을 만들어 서로의 언어이질감을 해소하는데 적극 활용했던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북 당국간의 협상과 민간차원의 교류가 잦아질수록 (심지어 남북간 긴장관계가 첨예하게 이어질 지라도) 남북한 언어학자들에게 부여된 과제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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