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행두 시인을 만나본 사람은 안다. 그에겐 막걸리 한 사발의 취기도 시가 된다는 것을.
또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정시인의 꾸밈없고, 수수한 사람됨됨이는 그 자체가 이미 시"라고.
하여, 지천명에 가까워서야 상재한 그의 첫 시집 <우리가 그려가는 세상>(오감도 刊)에는 만사를 아래로 굽어보고 저 홀로 '독야청청'하는 초인(超人)의 제스처도, 세속적인 독자들을 미혹할 화려한 언어 조탁술도 없다. 그러나 정형두 시집엔 오랜 세월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질박하지만 진솔한 그만의 언어가 곳곳에 살아있다.
독자의 눈을 멀게 하는 화려한 세공석같은 시들이 득세하고, 횡행하는 세상. 정행두의 시는 다듬지 않은 원석같은 투박함으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네 웃음소리는
달빛에 출렁거리고
내 가슴은
자꾸만 일렁거린다
주인 없는 빈배는
네가 꿈꾸던
바다의 저편, 작은 섬에 머물고
나는 갈수록 어두워지는
굴 안에서
네 빛을 받아
바다를 채우고 바다를 비운다
-- <섬> 중에서.
저 잘난 맛에 사는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만큼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유한함.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어느 누구, 세상 무엇에게서도 희망을 찾지 못한다. 바로 그런 세상에서 '네 웃음소리'에 '가슴이 일렁인다'는, '네 빛'으로 '바다를 채우고 바다를 비우'리라는 노래는 얼마나 크낙한 파장으로 우리를 흔드는가. 희망이란 어차피 믿음에서 연유하는 것. 그 믿음의 대상이 인간이건, 신이건 혹은, 다른 어떤 것이건.
그렇다면 정시인이 품은 '인간에 대한 낙관'과 '희망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난 척'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태도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본시 잘난 사람들은 자기 이외의 것에서 희망 따위를 찾지는 않는 법.
내 이름이 뭐냐구요/나도 몰라요/바람은 나를 바람이라 불러요/구름은 나를 구름이라 불러요/비는 나를 비라고 불러요.
<야생화>란 제목의 이 짧은 시는 정행두 시인의 내면풍경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늘의 뜻을 깨닫는 나이'라는 오십을 목전에 두고서야 체득한 진리. "누가 어떤 이름으로 바꿔 불러도 이름 없는 들꽃은 또 그렇게 피어나듯,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에 자신의 존재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 누가 무엇이라 부르든 겸손하고 꾸밈없는 시인 정행두의 존재는 바뀌지 않는다. 그가 웃으며 건네는 질박한 막걸리잔이, 그의 나긋나긋하고 부끄러운 듯한 목소리는 그것을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그가 그려낸 <자화상> 또한 스스로를 낮추는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 독자에게 다가선다.
산 아래서는
나무, 숲, 구름, 새
눈에 밟힌 것들이 모조리
액자 속에서 멈춘다
산 위로 올라갈수록
액자 속의 풍경들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고
구름 사이로 지나다 보면
거실의 액자는
산을 비운 채
하늘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그 속에서 누군가가
바둥거리고 있다
--<자화상> 전문.
창조라는 신의 영역에 감히 도전장을 낸 시인이 겪는 고통을 필설로 어찌 형용할까? 그러나, 스스로 '바둥거리고 있다'고 부끄러운 고백도 서슴지 않는 정시인에게 그 고통은 고통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빛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기억될 '질박한 토기'같은 시를 써달라는 것. 정행두를 향한 우리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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