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로 담근 술이 익어갑니다

등록 2001.10.09 18:59수정 2001.10.1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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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중에 마당이 넓은 집이 있는 녀석이 있다. 어떤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과수가 열리는 나무가 꽤 있다는 것만은 짐작을 하고 있다. 작년 이맘때에도 석류가 익었는데 그 맛이 너무 달다느니, 모과가 열렸는데 그 향이 정말 매혹적이라느니 하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과 가끔 내 집에 모여 밤을 보낼 때가 있다. 음식상 차리는 것을 질색하는 나를 위해 맨 몸에 지갑만 불룩하게 하여 모이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내 집에서 모임이 있었다. 역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친구들을 맞이하는데 그 녀석이 불룩한 배낭을 지고 들어온다.


"이런 빈 손으로 오랬는데 뭘 그렇게 싸 가지고 왔냐?"
"이런 친구, 눈치를 챘군."

그러면서 주섬주섬 풀어헤친 가방에서는 뜻밖에도 석류가 한 봉지 쏟아져 나온다. 입을 쩍 벌리지도 않은, 아직은 붉은 빛보다는 연 초록빛이 더 많은 석류였다.

"급하기도 했네. 익지도 않은 것을 따오면 어쩌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공짜인데 절로 입이 벌어지고 만다. 친구는 말도 귀찮다는 몸짓으로 석류를 까 보였다.

어수룩하게 보였던 석류의 속은 꽉 차 있었고 알맹이는 붉은 빛으로 투명하게 여물어 있었다. 이래 보여도 자기네 집 석류가 얼마나 단지 아느냐고 큰 소리 치는 친구의 말이 내심 미심쩍기도 했는데, 한 알 입 속에 넣어 보는 순간 공치사가 아니란 느낌이 팍 온다.


이렇게 허술한 놈이 언제 이런 맛을 지녔을까싶게 입안에 퍼지는 향과 달짝지근한 맛이 혀에 착착 감겨온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모임의 주인공은 석류가 되어 버렸다. 약간은 이른 감이 없지도 않은 석류를 지고온 사연을 풀어놓는데, 모험담을 듣는 것처럼 신이 났다.


동네 사는 할머니들이 그 석류에 얼마나 눈독을 들이고 있는지, 처음에는 익으면 한 보따리 팔려고 했다가 나중에는 공짜로 줄 것을 원하며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더란다. 작년에도 우리들에게 맛을 보여주려고 익기만을 기다리다가, 알알이 익은 그 놈들을 다 할머니들에게 뺏기고 말았다고 했다.

이러다가는 작년처럼 동이 날 것 같아서, 고소 공포증이 있는 본인이 직접 나무에 올라가 따왔다고, 하마터면 119 아저씨들을 부를 뻔하지 않았느냐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렇게 놀다가 친구들이 돌아가고, 다음 날 딸과 둘이서 석류를 깠다. 물기를 묻히지 않고 깐 다음 마른 병에 반쯤 담아 술만 부으면 된다고 했다. 간단하다는 생각에 겁도 없이 덤벼들긴 했는데, 석류를 까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석류 알들이 얼마나 섬세한 것들인지 손톱을 조금만 세워도 뭉개지거나 터져 일그러져 버리곤 했다. 서투른 딸의 손길을 피해보려고 했으나 이미 석류 까는 재미가 들려 비디오도 마다하고 달라붙은 아이를 떼낼 수는 없었다.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종알거리는 것을 듣다가 나 혼자 생각에 잠기다가 하다 보니, 한 보따리 들고 온 석류를 거의 다 까게 되었다. 담을 만한 빈 병을 찾는데, 친구들과 모여 놀다가 마신 술병이 눈에 띈다. 친구 녀석들이 비워버린 술병을 모아두기를 잘 했지. 그 빈 병에 석류를 알알이 채워 넣는 재미가 쏠쏠하다. 병에다 반씩만 담아서 술을 붓고 나니 술 담그기는 끝이 났다.

이 술이 3개월쯤 지나 발갛게 익을 때, 그 때는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그때쯤일 것이다. 이 술이 익어 첫잔을 맛보게 되는 날, 나는 어떤 말로 축배를 할 것인가. 새롭게 맞이하게 되는 신년의 기대를 말할까. 보낸 해에 대한 섭섭함과 아쉬움을 얘기할까. 어쩌면 아무런 얘기도 없이 술 향기에 그윽하게 취하고 말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가 직접 담근 술이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즐거울 것 같다. 말갛게 빨간 알맹이에서 우러나온 색은 지루한 겨울의 추위와 뜨거운 여름의 태양, 가을의 서늘한 바람에 맞서 견디어온 시간들이 아닐까.

아픔 없이 살아가는 요행을 바라고 싶을 때, 석류주에 담긴, 계절이 주고간 상처와 선물을 떠올려볼 것이다. 그래서 아픔만이 있는 삶이라던가 행복만 있는 삶을 생각하게 되는 날 아끼고 아껴가며 한 잔씩 마셔볼까 한다.

석류의 깊은 색과 향이 거저 생긴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이 하루가 모여서 깊은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났으면... 오늘도 술은 잘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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