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10.09 19:30수정 2001.10.09 21:36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야기 하나
가벼운 이야기 하려고 한다. 민족의 명절 추석길 잘 다녀와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나이 서른다섯 먹는 동안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번 여행길에서 느낀 점을 한번 정리해봤다. 우리네 사는 의미와 삶의 질, 생활의 진보란 무엇일까? 허허.. 이러면 또 무거운 얘기가 되는 건가?
일요일 새벽, 자는 아이들 태우고 짐 챙겨 법석을 떨며 출발, 무사히 고향마을(충남 서산)에 도착, 이틀을 자고 처가(전북 김제)에 갔다가 마지막날도 새벽같이 출발해 새로 뚫린 서해안고속도로 덕분에 별로 밀리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암튼 4일 휴일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오고 가는 시간에다가 여독 때문에 별로 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기를 쓰고 고향앞으로 가는 걸까? 나는 또 왜? 그것은 이농과 도시집중에 따른 귀향본능 때문일 것이다. 오고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파헤쳐진 주변의 동산을 보며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왜 서울을 중심으로 산맥의 흐름을 거슬러 자연지형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지 생각해봤다.
왜 사람들은 서울로만 몰리냐고 아내가 묻는다. "그게 우리시대 자본주의 산업화의 현주소이고, 그게 우리 삶의 질을 떨어뜨렸다. 무분별한 개발과 지역편중으로 상징되는 우리식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의 하나가 바로 환경친화이다." 아내한테 대답은 잘 한다. 하지만 나도 그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서울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쩝...
이야기 둘
집에 내려가면서 이번에는 정말 우리집 며느리들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사실 우리집은 네 며느리에 모권이 강한데다가 아주 민주적인 집안이다. 우리 어머니 엄청 부지런하셔서 어머니 보다 먼저 일어난 며느리는 아무도 없었다. 제사도 안지내고 추석아침 간단한 예배후 밥만 먹는다. 애들은 형제들이 주로 보고 음식 만드는 일도 거든다. 그럼에도 형님들께 "설거지는 우리가 합시다" 하고 부추겼다.
15명이 넘는 대식구 설거지를 둘째형과 같이 몇차례 도울 수 있었다. 물론 둘째 형수님이 아프셔서 형님이 적극적이셨지만, 결국 목사인 큰 형님과 결혼후 집안일 제쳐둔 세째형은 동참하지 않았다. 우리 집안의 한계였다. 그날 예배시간에 '다같이 일하는 온식구가 즐거이 먹고 마셔...' 노래를 함께 불렀는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안에서 완전한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날은 아마도 회갑이 넘으신 아버님이 설거지를 돕게 되는 그날이 아닐까? 너무 심한 생각인가?
처가집에 가서는 분위기 때문에(?) 도울 수도 없었고 눈치만 봤다. 장모와 처형, 아주머님은 음식 만들랴, 치우랴 내내 쉬지 못했다. 늘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나와 우리 사회의 한계. 정말 부인네들로부터 음식시중 받으며 고스톱 치는 남자들 보면 같은 남자로서 분노를 느낀다. 실천이란 쉽지 않고 남자들이 알아서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축제의 즐거움을 누릴 권리를 여자들도 스스로들 주장해주오! 제발...
이야기 셋
형제들이 부엌에 오래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집안에 힘을 쓸 일들이 많았기 때문. 그날 가뭄에 고생한 아버지의 요구로 남자들은 집채만한 물탱크를 설치했다. 묵은 쌀로 방아도 찧고 고추밭에 나가 온가족이 고추를 땄다. 다섯 살짜리 아들도 고추를 땄다. 노동을 배우는 내 아들의 모습은 얼마나 귀여웠었는지... 눈물이 날 지경. 온가족이 함께 일하던 때가 이번 명절기간중 가장 기뻤던 것으로 기억된다.
추석날 가족묘지에 들른후 아내 고생시킬까봐 바람쐬러 조금 떨어진 바닷가로 나갔다. 지금은 현대건설이 논으로 만든 서산농장인데, 그 한가운데 어린시절의 추억과 전설이 깃든 '검은여' 라는 바위섬이 있던 곳이다. 고향이름이 부석(浮石, 뜬돌, 검은 여자바위)인데, 고향 갯바다 한가운데를 흐르는 적돌강에 있는 바위섬, 의상대사를 사모한 당나라 여인이 바다에 몸을 던져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거기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정주영씨의 이름과 함께 그 아름답던 전설과 천혜의 어장은 간데 없고 우리의 머리를 시원하게 식혀줄 뿐...
그리고 그 바다에서 죽었던 중학교시절 담임선생님과 다른 한 선생님 생각이 났다. 그분들은 참교육을 실천하던 선생님들이셨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던 한겨울 밤 교장에게 멱살잡혀 스트레스 받고 밤새 술을 마시다 갯벌로 나갔다가 길을 잃었고 밀물이 차 들어오는 동안 밤새 헤맸고, 다음날 두 선생님은 서로 손을 잡은채 양말이 다 닳은 채로 바다 한가운데 나무로 만든 그물에 걸려 있었다. 얼마나 슬픈 기억이었는지... 또 참된 교육은 얼마나 멀고 험한 것인가.
이야기 넷
오랫만에 가본 고향집에서 잠자고 아침을 맞는 순간, 나는 또다른 신비를 느꼈다. 올망졸망한 동산들과 숲들이 둘러싼 마을의 아침, 새들이 앞뒤에서 아침을 알렸고 마을 앞 논에서는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대지가 숨쉬었고 살아있다는 것이 무언지 새삼 느꼈다 '땅의 온기를 돈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유명한 인디언 추장의 말이 생각났다. 생태 안에서 우리의 삶의 질이 이야기될 수 밖에 없다는 것들...
그날 마을 앞산 위로 떠오른 빨강색, 주황색, 노랑색,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일곱빛깔 무지개를 보았다. "어, 무지개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내 아이들의 표정 속에서 경이로움을 느꼈고, 불게 타오르던 저녁노을과 지는 해를 보면서 거대한 장치 같은 지구의 운동을 느꼈다.
집앞과 옥상에 올라가 마을광경을 몇번이고 바라보았다. 내가 고향집 앞에서 30여년간 보아온 광경이기에 가장 익숙하고 편안했다. 아쉬움에 마을을 조망하여 사진도 찍어왔다. 물론 무지개도 찍었다. 나중에 당신이 보고나서 '에이 별거 아니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삶의 방향이 뒤틀려 있고 우리는 오랜 세월 그걸 모르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아닐까. 너무 감상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어떤 치열함 때문인가? 아무튼 고향 다녀온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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