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10.09 22:22수정 2001.10.10 13:53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비가 옵니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밤이 깊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내리고 있습니다. 가을비가 대지를 적셔주고 있습니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도 오늘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우산을 쓰고 출근한 아침 시간은 기분이 아주 상쾌했습니다.
저녁에 성당에서 모임이 있어 참석했다가 방금 집에 들어왔습니다. 비 내리는 창가를 바라보니 사춘기를 맞이한 소년처럼 깊은 상념에 젖게 됩니다. 인생은 그런 것인가 봅니다. 추억을 더듬기도 하고 또 잊어버리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아이들과 얼마 전에 이효석 님의 '메밀꽃 필 무렵'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여자와는 인연이 없었던 허 생원이 유일하게 단 하룻밤 함께 했던 여인 성 처녀! 그는 메밀꽃 필 달밤에 걸어갈 때면 동행인에게 항상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인과의 그 기이한 만남을.
12년 전 31세 때 연애도 못하는 못난 아들 때문에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노력으로 한 여인과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조금 알고 있는 어느 아주머니의 딸인데 28세였습니다. 양가 어머니가 참석한 가운데 아담한 레스토랑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가냘프게 보이는 몸매에 눈이 아주 선해 보이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야기 듣는 것을 퍽 좋아했습니다. 나와 마주앉아서 음식을 나누면서도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는 들려주었고 그녀는 예쁜 표정으로 기쁘게 들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이번에는 말을 하라고 했더니 빙그레 웃기만 하고 아니라고, 자기는 듣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하며 또 이야기하라고 하였습니다.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그렇게 우리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였고 그녀는 조용히 정성껏 나의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난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마냥 행복했습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그녀와 영화관에 갔습니다. 표 두 장을 끊고 우리는 옆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여자와 단 둘이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나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내용보다도 내 옆에 여인이 앉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뿌듯한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추운 겨울 날 그녀와 천호동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검정색 오버코트를 입고 나왔습니다. 난 파란 양복에 갈색 오버코트를 입고 나갔습니다. 차를 마시려고 카페를 들어가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한강 둑을 걸어보자고.' 그 순간 난 나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강가를 남녀가 함께 걸어간다? 그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멋있는 연인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내 생전 처음으로 그녀와 한강 둑을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면서 그녀는 또 나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참 그녀는 아기처럼 이기적입니다.
자기는 거의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서 나에게만 말을 하라고 졸라대니 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좋아서 난 또 여러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한강 둑을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혼자가 아닌, 여인과 걸었다 이 말입니다. 즉 강가의 테이트라는 것을 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입니다.
여러 차례 그녀와 만나면서 나도 그녀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내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이 되겠지요. 어느 날 그녀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녀에게 이야기 듣는 것을 아예 포기한 나는 밝은 모습으로 즐겁게 들어주는 그녀가 그냥 좋기만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내가 죽을 힘을 다해 용기를 낸 것이지요. 그녀의 눈이 놀란 토끼 눈처럼 커졌습니다. 내가 어색한 자세로 그녀를 안으려고 했을 때 그녀가 일어났습니다. 빨개진 얼굴로 나를 보더니 빽을 들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하고 심하게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나가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을 때 카운터가 정면으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 직원 한 명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 나는 바보였습니다. 세상에 카운터의 직원이 다 볼 수 있는 곳에서 여인을 껴안으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가슴이 몹시 방망이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영원히 못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앞이 아무 것도 안보였습니다. 밖에 나갔습니다. 그녀가 문 밖에 서있었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실성한 사람같이 그녀 앞에 섰습니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주 조용한 그녀의 목소리가.
"제 손을 잡아보세요. 그러면 괜찮아질 거예요."
바보에게 그녀의 말은 하늘나라 천사의 목소리였습니다. 간신히 힘을 내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습니다. 그때서야 바보는 무섭게 뛰는 가슴이 진정되고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것이지요.
그렇게 나의 '메밀꽃 필 무렵'은 안타까움만 남기고 끝났습니다.
덧붙이는 글 | 비가 내리는 오늘 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생각납니다. 그녀는 그 순간 천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랑의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한 나에게 그녀는 사랑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습니다.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한강 둑에서 그녀는 바보의 마음 속에 잊지 못할 사랑의 추억을 심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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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