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르... " 대숲 소리
"파아아... " 파도 소리

영화 <봄날은 간다>를 따라가는 삼척 소리기행

등록 2001.10.11 12:12수정 2001.10.1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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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게 깔린 서울의 어둠을 등지고 삼척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서울발 삼척행 9시 밤차. 밤기차든 심야버스든 밤에 떠나는 여행의 매력은 매한가지다. 깊이 잠든 도시를 뒤로 한 채 꽃신을 신고 떠나는 일상 탈출. 사랑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살금살금 집 밖을 빠져 나오는 기분이랄까? 술에 취한 상우가 오매불망하는 은수를 만나러 야밤에 대관령을 넘는 것처럼.

'봄날은 간다'의 소리 마당, 삼척에 발을 내려놓는다. 4시간이 흘러 새벽 한 시다. 1박 2일로 계획한 삼척 소리 여정. 아침 일찍 정라진의 일출을 본 뒤, 삼척 시내 구경과 근덕가도를 달려 '봄날은 간다'가 들려준 자연의 소리, 맹방 파도 소리와 대숲 소리, 신흥사 절간의 고요를 담아보기로 마음 먹는다.

흑바탕에 점점이 떠 있는 통통배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6시, 서둘러 여관을 나와 정라진으로 향한다. 강원도의 바닷바람은 언제 맞아도 맛깔나다. 정라진의 일출 조망은 소망의 탑과 정라진 방파제가 제격인데, 우선 낚시꾼들이 모여드는 방파제가 눈길을 끌어 그 앞으로 다가간다. 사시사철 학꽁치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방파제 머리맡에 서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흑바탕의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통통배 서넛뿐이다.

▲ 정라진 일출 ⓒ 김영주
여명을 뚫고 수줍은 해가 살짝 머리를 들이민다. 아직은 어스름이 남아 있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일출보다 더 신비롭고, 상사로운 기운마저 느껴진다.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태양이 여명을 밝히는 새벽 바다 위를 횡으로 가르며, 서서히 그러나 이내 눈 밖으로 달아나버리는 고기잡이배들. 시골 포구에서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 중에 이보다 더한 것이 있으랴.

오십천 절벽 위에 솟은 죽서루

삼척 시내로 들어와 삼척박물관 앞 다리 앞에 멈춰 선다. 오십 굽이를 감아친다는 오십천 끝자락 절벽 위에 의연히 꼿꼿하게 자리잡은 죽서루. 누각 동편에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유희소(遊戱所)가 있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관동의 경승지를 찾아온 한량들이 죽죽선녀의 미색에 갖은 추파를 던졌으나, 그의 정조는 대나무와 같고,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는 선녀와 같았다고 있다.

▲ 오십천 절벽의 죽서루 ⓒ 김영주
오십천을 잇는 다리 밑에 내려가 죽서루를 올려다본다. 단양 8경의 절벽에는 규모 면에서 못 미친다 하더라도 절묘하게 세워진 절벽 누대가 시내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절경이다.

송강 정철 아닌 누가 가더라도 관동 8경 중 제 1경으로 꼽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나무숲에 가려 절반쯤 모습을 드러낸 누각과, 누각 밑으로 깍아지른 절벽, 절벽 아래를 소리없이 흐르는 오십천의 찬서리 맞은 유수(流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또한 그 지점에서 왼편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면 야트막한 야산 위에 실직국의 왕릉이 보인다. 왕릉치고는 소박하지만, 수 천년 동안 제자리를 지켜온 역사의 숨결이 전해진다.

한치재에 올라 동해 바다를 경탄하며

정라진에서 맹방 해수욕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치재(限置裁)를 넘어가야 한다. 이 한치재는 '큰길'이라는 뜻과 '한이 서린 고개'라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예전 관동의 주요 도시였던 삼척은 이 고갯마루에서 사법 기관의 집행이 이뤄졌던 곳인데, 죄인들의 형벌이 이뤄지던 곳이라고 해서 한이 서린 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구불구불한 한치재를 어렵게 올라와서 그냥 내려가버린다면 서울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다. 맹방 해수욕장의 조망 장소로서 이보다 더한 곳이 없으며, 강원도 전체를 통틀어 동해 바다가 이렇게 아름답게 펼쳐지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짙푸른 동해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온 한치재의 코끝에 서면 왼편으로 삼척 포구, 오른편으로 맹방 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온다.

애 끓는 듯한 맹방의 파도 소리

▲ 쉴 새 없이 울어대는 맹방의 파도 ⓒ 김영주
상우와 은수가 세번째로 소리 채집에 나선 맹방 해수욕장. 은수는 털썩 모래밭에 앉아 있고, 상우는 마이크를 세우고 소리 채집에 열중인 곳. 그리고 멀리 삼척의 포구와 방파제가 눈에 들어온다. 두 주인공은 없지만, 영화에서의 그 장면 그대로다. 물론 음향까지도. 극장의 스피커를 통해 들었던 가슴을 꿰뚫을 것 같은 그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쏴아아아아~ 파아아아~ 철썩!'

발걸음을 뒤로 밀쳐 백사장 끝에 앉아본다. 파도 소리는 금세 바리톤으로 바뀌어 '우우우우' 짖어댄다. 세심하게 귀 기울여 들어보니, 새끼 잃은 어미 짐승이 자식 잃은 슬픔에 못이겨 서글피우는 소리 같다. '웅웅웅웅웅' 그러다가 굵은 파도가 밀려와 백사장 앞에서 자지러지면서 '철썩~파아아아' 하고 내리친다. 돌연 울어대는 대상이 금수가 아닌 사람으로 옮겨 붙는 느낌이다. 집나간 아들 걱정에 '엉엉' 울어대는 어머니를, 옆에서 듣고 있던 지아비가 혼쭐내는 듯한 소리처럼, 바다는 그렇게 계속 울어댄다.

산사의 고요, 신흥사

버스를 타고 가다 양지 슈퍼 앞에서 내리면, 신흥사까지 5분 거리다. 강원도의 조그만 산사는 이름난 거찰과는 분명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리 험준하지 않은 산자락에 얌전하게 자리잡은 신흥사(신라 원애왕 838년)는 큰절에 딸린 암자 같다. 신흥사의 절터는 ㅁ 자형으로 정면에 2층 누각인 학소루(鶴巢樓)가 버티고 있고, 누각 밑을 지나면 정면에 대웅전, 왼편에 심검당(尋劍堂), 설선당(說禪堂)이 보인다.

▲ 신흥사의 학수루와 경내 ⓒ 김영주
눈 내리는 산사의 고요를 채집하러 은수가 밤중에 살포시 문을 열고 나오는 데가 이 심검당이고, 상우가 산사의 소리를 담는 곳이 대웅전 앞이다. 심검당이란 사찰의 선실(禪室)에 주로 붙이는 이름으로,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커먼 기둥들이 천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친근감이 생겨서인지 절간이라기보다는 시골 고택을 보는 듯하다. 스님 몇 분 외에 여행객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은수가 살금살금 상우에게 다가가는 밤 깊은 산사의 고요는 지라도 꽤나 분위기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봐도 속세의 범인이 들을 수 있는 산사의 소리란 새소리와 바람소리일 뿐이다.

"바람 불고, 눈보라 칠 때가 제일 좋지"

신흥사에서 양지슈퍼 앞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 왼편으로 나 있는 작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 10여 분쯤 걸어가면 양리 대숲이 나온다. 머슴 밥그릇에 조밥을 가득 담아주던 영화 속의 강하순 할머니. 실제 대숲 옆에 그 할머니가 살고 있지만, 지금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있단다. 은수와 상우가 처음 소리 채집에 나서던 그 논길을 지나, 대숲으로 들어간다.

▲ 근덕면 육리의 대숲 ⓒ 김영주
아무도 없는 곳이라 대숲에 털썩 주저 앉아 할머니가 "바람불고, 눈보라 칠 때가 가장 좋다"고 했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스으으으' 제법 으슥해진다. 바람이 일자 좀 더 소리가 좀 더 선명해진다. '슈우우우' 설익은 휘파람 소리 같다. 잠시 바람이 잦아지자 대숲은 이내 적막에 휩싸인다. 담양의 대숲처럼 울창하지는 않지만, 대숲 뒤편이 산속인 지라 등 뒤에서 산짐승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웬걸? 아니나 다를까 장작 타는 듯한 '타닥타닥'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들짐승의 발소리인가 보다.

잠시 등 뒤에 정신이 팔린 사이, 대숲 사이로 제법 쏠쏠한 바람이 밀려들고, 숲이 요란해진다. '쏴아아아아' 여름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소리색은 전혀 색다르다. 계곡물소리처럼 사납지 않지만, 그 여운은 세찬 물소리보다 훨씬 오래 간다.

영화 속 대숲 장면에서 둘이 대나무숲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장면이 떠올라 시선을 머리 위로 올려본다. 쭉쭉 뻗은 대나무 위로 살짝 열린 공간을 바라다보다, 혼자 실실 웃어본다. 누구 하나 보고 있지는 않지만, 웬지 쑥스럽고 멋쩍다. 그러나 둘이 들어가보면 멋쩍다기보다는 로맨틱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줌시티에서 여행컨텐츠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윗글은 줌시티의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자세한 삼척 여정은 http://www.zoomcity.com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줌시티에서 여행컨텐츠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윗글은 줌시티의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자세한 삼척 여정은 http://www.zoomcity.com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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