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 할아버지의 실종
[1]
햇살나눔터. 이곳은 수원 근처에 위치한 '국민의 힘'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로 수용인원은 300명 정도이고, 모두 무의탁 노인들이다. '국민의 힘'에서 하는 사업은 모두 운영주체가 따로 있다. '국민의 힘'은 재정지원을 하고, 감독권만 행사할 뿐이다. 그건 이곳도 마찬가지다.
매주 월요일은 정기 검진을 받는 날이다. 이곳에서는 2년 전부터 의료 단체들과 공동으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진료는 양의와 한의, 두 부분으로 나눠서 하고 있다. 환자들이 많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노인들이라 설사 건강하다 하더라도 정기 진료를 받는다. 그래서인지 월요일 아침에는 사무실이 노인들로 북적댄다.
이곳에서는 양의보다 한의가 더 인기가 좋다. 그것 역시 노인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한의치료를 받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렸다. 헌데 진료를 시작한 지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환자들의 숫자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중 일부는 바깥에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여 있지? 오늘은 진료를 안 하나?"
우석은 차에서 내리면서 노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뒤이어서 단원들도 내렸다. 진료하는 날에는 일손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들도 가끔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얼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치료한 다음 보름 전에 퇴원했다. 강조와 동민은 아직 완쾌되지 않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참석하지 못했다.
"추운데 여기서 뭐하세요?"
아라가 가장 먼저 노인들에게 다가갔다.
"우리 예쁜 아가씨가 왔구나. 글쎄 말이야. 그 분이 아직 안 오셨어. 벌써 2주째야."
"그분이라뇨? 김 할아버지 말씀인가요?"
"그래. 무슨 일이 있는지 연락도 안 되나 봐."
"난 이곳에 3년 째 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야. 모두들 걱정이 대단해."
"혹시 아프신 건 아닐까?"
"그렇진 않을 거야. 연세는 많아도 워낙 건강체질이잖아."
"하긴 김 선생 성격에 아프다면 사전에 연락을 했겠지. 무슨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해."
노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김 노인에 대한 얘기를 했다.
김 선생이란 분은 매주 이곳에서 무료로 노인들을 치료해주는 한의사이다. 그는 무료 진료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서 노인들을 돌봐왔다. 그는 한의대를 나오거나 한의원을 운영하지도 않는다. 비록 정식 교육은 배우지 않았지만 한의학에 대한 지식과 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기술은 전문가들을 능가한다. 그가 같은 날 이곳을 찾아오는 다른 의사들보다 훨씬 더 인기가 좋은 것도 그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100명이 넘는 환자들을 한 명도 빼 놓지 않고 치료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반 병원처럼 시간에 쫓겨서 2-3분만에 환자들을 밀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환자가 하는 얘기를 모두 다 들어준다. 그리고 시간 내에 다하지 못한 얘기는 진료가 끝나고 따로 만나서 한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비슷한 환자들도 그를 어머니나 할아버지처럼 생각한다.
그것으로 그의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노인들은 직접 방으로 가서 진료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너무 늦으면 이곳에서 노인들과 같이 잠을 자고서 새벽에 떠난다. 그 덕분에 그가 다녀가고 나면 이곳은 최소 2-3일은 분위기가 밝아진다.
그의 의술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한 가지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환자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는 항상 약보다 환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른 한 가지는 약재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처방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처방도 약재가 주위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비싼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에겐 소용이 없다는 것이 평소 그의 소신이다.
"그래, 알아봤냐?"
"응, 할아버지들 말처럼 연락처를 알 수가 없대."
석이와 면도날이 사무실에 가서 김 선생의 연락처를 직접 확인하고 왔다. 이곳을 3년 넘게 다녔는데도 사무실에는 연락처는 고사하고 나이에 대한 기록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단 한 번도 빠지거나 늦은 적이 없었으니 연락처를 받아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 봐. 내가 한 번 찾아볼게."
석이는 차로 가더니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그의 노트북은 보물창고였다. 덩치는 작지만 못하는 게 없었다. 간단한 자료는 하드디스크에 저장되어 있고, 필요하다면 해킹으로라도 알아냈다. 이번 것은 국가 정보망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곧바로 행정자치부의 정보망으로 들어갔다. 모든 정보기관의 고급 정보에 접근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석은 별다른 장애 없이 들어갔다.
"이름은 확실하겠지? 김 ... 영 ... 규, 서울."
기초 자료를 입력하자 잠시 후 결과가 나왔다. 서울에만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500명이 넘었다. 그 중에서 82세가 5명이고, 83세가 2명, 그리고 84세가 1명이었다. 다행히 나이가 많을수록 숫자가 적었다. 아마 그건 나이가 많을수록 사망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82세에서 84세까지의 8명을 한꺼번에 묶어서 클릭하자 구체적인 자료가 나왔다.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두 명만 자기 집에서 살고, 나머지는 주소가 양로원으로 되어 있었다. 자기 집에 살고 있는 두 명 중 한 명은 가족들이 많고, 나머지 한 명은 독신이었다.
"좀더 자세히 알아볼 수 없어?"
개인의 신상 정보가 간단히 확인되자 면도날은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평생 전과자라는 오명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던 그로서는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나중에 우석에게 부탁해서 자신의 신상 정보에 대해서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왜 없겠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우석은 즉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 것은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것이라 또 다른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우석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가 없었다. 먼저 독신으로 사는 노인의 신상부터 확인했다.
그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해방 전에는 중국에서 살다가 해방 직후에는 일본에서 살기도 했다. 학력은 일본 동경제대 법대 1년 중퇴였다. 아마 그 후에 중국으로 건너간 모양이다. 현재 주소는 저소득층의 밀집지역인 구로구 가리봉동으로 되어 있었다.
"어느 쪽인 것 같애?"
"글쎄? 난 왠지 가리봉동에 사는 사람 같은데. 면도날형 생각은 어때?"
"나도 그래."
나머지 한 사람은 별다른 이력이 없었다. 생활도 유복하고 가족들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좋다. 일단 부딪혀 보자. 석아, 가리봉동으로 가자."
일행의 생각이 일치하자 얼이 결정을 내렸다. 주소지로 직접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2시간 후, 가리봉동의 한 주택가.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었다고 해서 '벌집'으로 불리는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동네였다. 집 한 채에 일, 이십 가구가 사는 것은 보통이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공기조차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집세가 서울에서 가장 싸다. 이곳에선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만 내면 누구든지 살 수 있다. 그런 조건 때문인지 이곳에는 유독 외국인 노동자나 실직자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허름한 2층집. 일행은 일 층의 가장 구석진 방을 찾아 들어갔다. 햇빛도 들지 않고, 공동화장실이 옆에 있어서 냄새가 고약했다.
"김 선생님은 안 계십니다. 일주일 넘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실업자들이 많은 탓인지 한 낮인데도 집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말을 해주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 사실 훔쳐가려고 해도 훔칠 것이 없다.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생활 도구들은 대부분 남들이 쓰다 버린 것들이다. 그러니 가져가 봤자 내다 팔 수도 없다. 불을 켜자 방 안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위 환경에 비해서는 방 안은 깨끗했다. 그건 김 노인의 성격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오랜 독신 생활로 인해서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청소도 아침, 저녁으로 두 번씩은 꼭 했다. 그의 부지런함도 곰팡이는 막질 못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은 탓인지 천장과 벽면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방 안에는 생활 도구라곤 라디오와 작은 옷장, 그리고 앉은뱅이 책상이 전부였다. 대신 나머지 공간은 모두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방의 벽면이 책으로 가려져 있다는 할 정도로 책이 많았다. 어림잡아도 2천 권 정도는 돼 보였다. 일본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중국어로 된 책들도 상당히 많았다. 분야도 다양했는데 그 중에서도 의술에 관한 것이 가장 많았다.
"정말, 할아버지가 이런 곳에서 살았단 말야? 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군."
우석은 방 안을 둘러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김 노인은 결코 이런 곳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 지식은 물론이고, 인격적인 면에서도 그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 분은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모두들 우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40대 중반의 사내로 자신을 박석제라고 소개했다. 김 노인과는 5년 전부터 친분을 맺어 왔으며 지금은 한 빈민운동단체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 노인은 지난 10년 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하루도 빼지 않고 무료진료를 해왔다. 그가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햇살나눔터 말고도 여섯 군데가 더 있었다. 매일 한 군데씩 가는 셈이었다.
"그것 말고도 일 주일에 두 번 침구사협회에 나가서 침술 강의를 하십니다. 생활은 강사료를 받아서 겨우 꾸려나가시죠. 하루 종일 무료진료를 하시면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시다가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셨지요. 저는 걱정이 되어 여기서 같이 잠을 잤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벌써 나가신 뒤였습니다. 아침까지 차려놓고서 말입니다."
박석제의 말속에는 김 노인에 대한 존경심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들린다. 하지만 소식은 고사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이유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는 얼 일행이 김 노인을 찾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경찰에는 신고를 했습니까?"
"곧바로 신고를 했습니다만 지금껏 소식이 없습니다."
"흠, 경찰에서도 모른다면 큰일인데. 집은 언제쯤 나가신 것 같습니까?"
"월요일에는 제가 알고 있는 복지시설에서 진료를 하십니다. 헌데 그곳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나오시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와서 확인했습니다. 그 때도 안 계셨으니까 그 전에 나가셨다고 봐야지요."
"그 때 방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그게 좀 이상했습니다. 방은 분명 깨끗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왜요? 이상한 거라도 있었습니까?"
얼은 물론이고, 모든 시선이 박석제에게 집중되었다.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음,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겠죠?"
"물론입니다. 먼저 그 분은 밖을 나가셔도 문은 항상 열어놓습니다. 대신 불은 절대 켜놓지 않습니다. 낭비를 싫어하고, 근면을 생활 신조로 삼고 계시는 분이라....... 헌데 제가 왔을 때는 방안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책들의 위치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분류표를 만들어 놓을 정도로 책을 잘 정리해 두셨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완전히 뒤죽박죽입니다."
책들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 종류의 책들이 뒤섞여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회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누군가가 뒤진 다음에 대충 정리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나로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음, 그럼 납치됐다는 말인데....... 혹시 그렇게 볼만한 단서라도 있습니까?"
"이걸 한 번 보시겠습니까?"
박석제는 품속에서 작은 노트를 한 권 꺼내서 얼에게 건넸다. 그것은 일기장이었다. 그것을 펼치는 순간 다시 한 번 김 노인의 치밀하고 엄격한 성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기장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방 안에는 그와 같은 일기장들이 수백 권이나 더 있었다. 그렇게 김 노인은 수십 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왔다. 박석제가 가지고 있던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의 것이었다.
"제 생각에는 침입자가 이것을 찾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놈들이 다녀간 뒤에도 있었다는 것은 다른 곳에 숨겨져 있었다는 건데, 회장님은 어디서 찾았습니까?"
"선생님은 평소 중요한 것은 방바닥의 작은 구멍에 숨겨두셨습니다. 여깁니다."
박석제는 앉은뱅이 탁자를 밀어내더니 장판을 들춰냈다. 그의 말대로 그 밑에는 책이 한 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장판으로 가리고 책상까지 올려놓아 침입자들이 쉽게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 속에는 아직 남아 있는 물건이 있었다. 입구가 넓고 납작한 병이었다. 병 속에는 훈장 한 개만 달랑 들어 있었다. 훈장은 순금으로 된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뒷면에는 일본이름과 한국이름이 동시에 적혀 있었다.
오카모토미노루(岡本實), 이윤수.
"이윤수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누구지?"
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반해 아라는 이윤수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일기를 읽어보면 알게 될 겁니다."
박석제의 말에 따라 일행은 모두 방바닥에 앉아서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2000년 10월 27일.
정확하게 57년 전 오늘, 두 분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민족의 한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나도 몇 년 더 살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의 혼과 기백이 땅에 떨어진 것은 일제의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일반역자와 그 후손들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있지만 정작 독립지사들의 후손들은 부귀영화는 고사하고 제대로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하긴 일본군 장교가 대통령이 되는 세상이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우리 세대에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57년 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폭로함으로서 조금이나마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 ......
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일기의 내용을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종기와 이윤수, 그리고 최기봉. 이들 3 인은 일제말기에 40대 초반의 전도가 유망한 지도자들이었다. 김종기는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 연희전문에서 강의를 했고, 이윤수는 민족신문인 조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리고 최기봉은 민족경제를 일으키겠다며 사업을 선택했다.
이들의 활동은 눈부셨다. 김종기는 강의 3년만에 정식 교수가 됐으며, 이윤수는 젊은 나이에 편집국장의 자리에 올랐다. 최기봉 역시 순식간에 서울지역 상권을 장악해나갔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민족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들은 동료들을 규합해서 비밀지하조직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이름하여 '조선해방그룹'이었다.
문제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생겼다. 그들은 전쟁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동원하기 위해 조선인총동원령을 내리고 동시에 그에 반대하는 지하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수십 개의 지하 조직들이 발각되고, 수천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다. 위기는 조선해방그룹에도 닥쳤다. 그러던 중 3 명이 같은 장소에서 체포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잡혀가면서도 자신들이 체포된 사실을 믿지 못했다. 회합 장소를 아는 사람은 자신들뿐이며, 장소를 정한 것도 불과 두 시간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신검문이나 가택수색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그들 중 한 명이 배신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제 경찰의 협박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 100명이 넘는 조직원 명단을 일제에, 그것도 스스로 바쳤다.
결국 두 명을 포함한 50여명의 조직원들이 조사과정에서 고문으로 목숨을 잃고, 나머지도 대부분 후유증으로 옥사하거나 불구자가 되었다. 배신자는 이후 승승장구하여 신문사의 사주가 됐고, 해방 후에는 독립운동의 공로로 국민훈장까지 받았다.
"선생님은 생전에 부친과 최기봉 선생의 행적이 정당하게 평가받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기도 했고요."
박석제가 보충 설명을 했다. 독립유공자 신청, 그게 문제였다. 두 사람의 행적이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다면 당연히 이윤수의 친일행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박석제는 그것을 두려워한 조국일보에서 김 노인을 납치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민족을 팔아먹은 놈들이 언론사주를 하고 있으니 나라꼴이 이 모양이지."
가장 먼저 폭발한 것은 우석이었다.
"흥! 그러고도 국민훈장에 독립유공자 칭호를 받아! 쓰레기 같은 것들."
그는 분을 싹이지 못하고 한 동안 방안을 걸어다니며 씩씩거렸다. 놀라기는 면도날도 마찬가지였다.
"일기의 내용대로라면 친일반역자가 민족신문의 사주라는 말인데,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도 사회가 불평등하고 부패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도 친일파의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줄을 모르고 있다.
"민족신문은 무슨 놈의 민족신문! 여길 봐! 이게 안 보여? 이런 사설과 기사들을 쓴 놈들이 민족신문이란 말이야?"
일기장에는 일제시대 조국일보의 사설과 기사들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천황을 찬양하거나 전쟁을 미화하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을 반대하는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일제에 항거해서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잖아?"
"웃기고 있네. 형은 사람들이 왜 배신자를 싫어하는 줄 알아? 그건 처음에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친하게 군다는 거야. 그러다 먹을 게 없어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서는 거야. 조국일보 놈들도 마찬가지야. 초기에는 일제에 조금 반항하긴 했지. 하지만 말기에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친일을 했어. 게다가 더 웃기는 것은 뭔 줄 알아? 반일을 할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하다가 친일할 때는 목숨을 걸고 했다는 거야."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래도 당시에 우리 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신문은 조국일보뿐이었잖아. 당시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런 기사가 나온 게 아닐까?"
면도날은 여전히 우석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누구나 수십 년 동안 믿어왔던 것을 한 순간에 뒤집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고정관념이 무서운 것이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당시 기사가 공개되는 것을 꺼려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국민들이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국민들을 무시하는 거지. 어느 학자의 말처럼 당시 이 땅에 살아왔던 사람은 어느 한 사람도 친일의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고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들의 경우는 달라. 그들은 최근 수십 억을 들여서 세계 각국의 신문자료들을 모아서 신문기념관을 만들었어. 하지만 거기에는 당시의 친일 기사들은 하나도 전시하지 않았어. 그것만 보아도 당시 그들의 행적이 얼마나 떳떳하지 못했는가를 알 수가 있어. 이런 말이 적절할지 모르지만 배추밭에 무가 하나 자란다고 무밭이 되겠어? 일본 놈들을 찬양한 게 배추밭이라면 항거한 것은 무만큼도 안 될 걸?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형이 직접 당시 기사들을 한 번 찾아봐. 인터넷에 들어가도 그런 기사들을 수두룩하게 널려 있어."
최근 인터넷에는 일제시대 조국일보의 행적을 소개하고 비판하는 사이트들이 많이 생겼다. 우석도 그런 사이트를 통해서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하긴 천황에게 훈장까지 받을 정도라면 대충 짐작은 간다."
면도날도 우석의 얘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수긍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흔든 것은 이윤수가 천황으로부터 받은 훈장이었다.
어떤 이유로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훈장은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이윤수가 그만한 공적을 세웠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로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나는 동료들을 배신하고 지하조직을 소탕하는데 공적을 세워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일보가 친일에 앞장을 선 것에 대한 대가일 것이다.
두 사람에 비해 나머지 사람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라와 박석제는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라는 조국일보에 한 때 근무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과거 행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훈장 뒷면에 적힌 이윤수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이미 상황을 짐작했다.
얼의 행동은 좀 이상했다. 그는 일기를 읽는 내내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건 지난번 M호텔에서 외제승용차에 탄 여자를 봤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면도날처럼 일기의 내용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조국일보의 친일행각은 민족운동진영에서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국민의 힘'이 그런 활동을 지지하는 입장이라 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으응? 왜!"
그는 생각을 하느라 아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아라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최갑진 사건 이후 얼과 그녀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아라의 극진한 병간호가 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녀는 그가 병원에 있는 한 달 동안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어느 남자가 흔들리지 않겠는가?
헌데 오늘 다시 두 사람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라는 오늘 따라 그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그는 M호텔을 다녀 온 직후에도 한 동안 지금처럼 행동했다.
"아... 아무 것도 아냐."
"......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박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는 갑자기 소극적으로 변했다. 평소 같으면 당장 조국일보로 쳐들어갔을 텐데, 어쩐 일인지 박석제에게 의견을 물었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증거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조국일보에 가서 무조건 사람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질 않습니까?"
박석제 역시 뾰족한 수가 없었다. 조국일보는 국내 제일의 신문사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섣불리 덤볐다간 오히려 낭패를 당하게 십상이다.
그 때였다. 밖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누구세...... 아악!"
밖을 내다보던 박석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 내렸다. 무엇에 맞았는지 정수리의 허연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회장님! 아악!"
뒤이어 우석이 쓰러졌다. 그 역시 머리에서 피를 흘러내렸다. 그는 박석제와 가까이 있다가 당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 여명의 청년들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워낙 덩치들이 커서 방 안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에 각목을 들고 있었다. 박석제와 우석을 쓰러뜨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모두 박살내버려!"
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청년들의 행동이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얼과 면도날이었다.
"크윽!"
얼의 몸놀림은 바람처럼 빨랐다.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오른발이 제일 앞에 있는 청년의 가슴에 가 있었다. 곧이어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이 한꺼번에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비명소리는 이어졌다. 이번에는 면도날의 작품이었다. 그는 발대신 손을 사용했다. 그의 두 손이 움직이자 앞의 두 청년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스며 나왔다. 면도날은 소매치기 할 때 쓰는 면도날을 손가락에 끼우고 손을 휘둘렀다. 겁을 먹은 청년들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석아, 여긴 네가 맡아라. 그리고 아라 넌 밖에 나가서 놈들이 타고 온 차의 번호를 적어놔라."
얼은 급한 나머지 말을 하면서 아라의 손을 잡았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상황 탓에 그는 못 느꼈지만 그녀는 전율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 그는 어느 노래가사처럼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헌데 이 한 번의 동작으로 그녀는 그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 그녀의 마음은 그랬다.
다행히 우석은 상처가 깊지 않아 금방 일어났다. 하지만 박석제의 상처는 예사롭지가 않았다. 피가 흘러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잃어버렸다. 아라가 재빠르게 지혈을 했지만 상처가 깊어 병원에 가서 봉합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얼과 면도날은 곧바로 달려나갔다. 밖에는 열 명이 넘는 청년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각목이 쥐여져 있었다. 하지만 겁을 먹었는지 얼과 면도날이 앞으로 걸어나가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내게 맡겨!"
면도날은 곧바로 청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다혈질이었다. 평상시에는 과묵하더니 싸움이 벌어지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을 형이라며 따르는 우석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순간 그의 두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그는 27년을 살아오면서 혈육의 정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헌데 처음으로 형제애를 느낀 우석이 피를 흘리자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잠깐만!"
얼이 그것을 눈치채고는 황급히 가로막았다.
"왜! 저 자식들이 우석이를....... 모두 죽여 버리겠어."
면도날은 말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흥분했다. 얼은 그가 정신을 차리게 손바닥으로 등을 때렸다.
"넌 이게 전공이 아니잖아. 내게 맡겨."
사실 흥분하기는 얼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면도날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가 먼저 공격을 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면도날 때문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썩었다지만 벌건 대낮에 무슨 짓거리냐? 난 네 놈들이 싸움질을 즐기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했으면 네 놈들이 누군지 밝힐 수는 있겠지?"
얼은 면도날이 또 흥분할까봐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말을 했다.
"......."
청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얼이 아니었다.
"하긴 네 놈들 입으로 두목의 이름을 말하긴 곤란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네 놈들은 우리가 누군지 알기나 하고 공격을 한 거냐? 어이! 김 형사, 자넨 이 놈들을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동대문 얘들인가? 영등포 얘들인 것 같기도 하고 말야."
그는 청년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경찰 행세를 했다.
"여긴 서울이야. 아무리 동태 눈깔을 달았다고는 하지만 그 쪽 애들은 경찰과 깡패를 구분 못할 놈들이 아냐."
등을 때린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면도날은 정신을 차리고 센스 있게 받아 넘겼다. 경찰이라는 말에 청년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김 노인이 실종되었고, 신고를 했다면 경찰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들이 경찰이라면 얘기가 복잡해진다.
요즘 경찰은 자신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공무집행방해와 같은 공권력에 도전하는 행위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 며칠 전 강남의 한 파출소에서는 술에 취한 사람이 행패를 부리다 다음날 바로 구속되기도 했다. 청년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놈들, 네 놈들이 경찰이면 난 안기부원이다."
아까 밖에서 명령을 내리던 그 목소리였다. 그가 바로 이들의 두목이었다.
"후후후! 눈치를 채셨군. 헌데 말이야. 뒤에 숨어서 부하들에게 악역을 맡기는 걸 보니 네놈은 인간성이 좋질 않구나."
모든 것이 얼의 계획대로 되었다. 그는 이 자를 끌어내기 위해서 청년들을 자극한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켜서 아라가 몰래 빠져나갈 틈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것 역시 성공했다. 싸움이 벌어지자 주위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아라는 그 틈을 이용해서 빠져나갔다.
"후후후! 미친 놈, 난 말장난은 좋아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것만 내 놓으면 순순히 물러가마."
"가지고 있는 거라니? 야! 너 나 모르게 숨겨 놓은 것 있냐?"
"숨겨 놓은 거? 있지. 아니 있다 뿐이냐? 팬티 2장에 양말 두 켤레. 거기에다가 애인까지. 참! 내가 말 안 했지? 고향에 애인이 있다고."
면도날의 말솜씨는 갈수록 늘어갔다. 헌데 애인 이야기는 왠지 현실감이 있어 보였다.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미친 놈. 그깟 애인이 뭐가 중요하다고 숨겨? 헌데 저 친구가 호모가 아니라면 네 팬티나 양말에는 관심이 없을 테고, 그렇다면 네 애인에 흑심을 품고 이런 짓을......? 야! 너 정말 조심해야겠다. 저 친구 얼굴 한 번 봐라. 눈은 위로 쭉 찢어지고, 이맛빡이 툭 튀어나온 것이 욕심 깨나 있게 생겼다. 참! 저런 놈들이 그 짓거리 하나는 끝내준다더라. 야! 정말 걱정된다. 걱정돼. 너 애인 단속 잘 해야겠다."
"야, 이 새끼야! 넌 지금 내 얼굴을 저 놈의 상판때기랑 비교하는 거냐? 내 비록 이 모양 이 꼴로 생겼지만 그건 조상에 대한 모독이다. 모독! 만약 이 사실을 지하에 계신 부모님들이 아신다면 땅을 치고 통곡하실 거다. 그리고 이제야 말이지만 내 애인이 얼마나 눈이 높은 줄 아냐? 저런 것들은 트럭 채 갔다 줘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여자다. 미친 놈. 넘볼 걸 넘봐야지."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태연한 척하던 상대 두목도 점점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난 영감쟁이가 숨겨 놓은 일기장을 찾으러 왔다. 당장 그것을 내놓지 않으면 오늘이 네 놈들의 제삿날이 될 줄 알아라."
"일기장!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 말이냐? 멍청한 놈. 그럼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얼은 품속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던져라! 그럼 우리는 조용히 물러가마."
두목은 일기장을 찾으러 왔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 참, 웃기는 놈일세. 야, 임마! 너 정말 깡패가 맞긴 맞냐? 무슨 놈의 깡패가 싸우지도 않고 물러가겠다는 거냐? 겁이 나면 솔직히 그렇다고 해라."
얼은 말끝마다 '놈'자를 붙였다. 상대는 그보다 적어도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였다. 그건 그에게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현실화되었다.
"쳐라! 죽여도 좋다. 일기장만 찾아라."
두목의 명령이 떨어지자 청년들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우람한 체구에 각목까지 드니 가히 위압적이었다. 싸움은 힘과 무기만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얼과 면도날은 덩치는 작지만 빠르고 날렵했다. 뒤늦게 움직인 그들의 주먹과 발이 오히려 각목보다 먼저 상대를 가격했다.
연속해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다섯 명의 청년들이 쓰러졌다. 그 중 두 명의 얼굴과 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모두 면도날의 공격을 받은 자들이었다. 얼의 공격을 받은 자들은 부상이 더 심했다. 한 명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주저앉아 있고, 나머지 두 명은 배와 옆구리를 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나머지 다섯 명은 만만찮았다. 그들은 얼과 면도날을 둘러싸고 공격을 해댔다. 숫자가 많기도 하지만 기다란 각목들이 쉴새없이 날아다니자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야! 작은놈을 조심해."
"알았다. 이 새끼들이 정말. 야앗!"
두 사람은 혼신을 힘을 다했지만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하기에도 버거웠다. 조금 전 덩치 큰 사람들 사이로 움직이며 공격할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욱!"
"얼아! 야앗!"
결국 얼이 각목에 옆구리를 맞고 주저앉았다. 부상이 심한지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러 개의 각목들이 날아들었다. 만약 면도날이 중간에서 막지 않았더라면 얼은 큰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얼아! 괜찮냐?"
면도날은 각목들을 막은 다음 얼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청년들이 더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았다. 두목이 중지명령을 내린 것이다.
"니미럴! 고작 이 따위 공책 한 권을 찾기 위해서 일 주일 동안 뛰어다녔단 말야?"
어찌된 일인지 일기장은 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얼의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그렇다. 각목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면서 일기장까지 날려버린 것이다. 두목은 몸을 날려서 그것을 손에 넣었을 뿐이다.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그만 가자."
목적을 달성한 두목은 곧바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청년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에서 사라졌다.
"일어나지마. 그대로 있어."
얼이 일어서려 하자 면도날이 만류했다.
"괜찮아."
의외로 그는 멀쩡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꿈쩍도 못하던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다. 오히려 면도날이 머쓱할 정도였다. 그는 얼이 부상에서 완쾌되지 않아 몸이 부자유스럽다고 생각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얼은 그 동안 짬짬이 운동을 해서 평소보다 몸 상태가 더 좋았다.
"그러면 놈들을 쫓아가자."
"괜찮아. 안 가도 돼."
이번에는 얼이 만류했다.
"괜찮다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뭐가? 그런 건 방안에 수백 권도 더 있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놈들이 가져간 것은 최근에 쓴 일기로 방 안에 있는 것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 이럴 줄 알고 내가 바꿔치기를 했어. 진본은 아라가 가지고 있....... 큭!"
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면도날의 주먹이 날아왔다.
"그래, 이 새끼야! 너 잘났다. 그런 일이 있으면 눈짓이라도 줘야 할 게 아냐."
걱정했다는 말이었다. 면도날은 오늘 난생 처음 정이란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우석이 부상당했을 때도 그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일을 당하면 누구나 가지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얼이마저 쓰러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 순간 그는 전혀 새로운 감정을 경험했다. 가슴 한 구석에서 두려움이란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꼈던 공포란 감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는 순간 우석과 얼이 잘못되어 자신으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바로 공포의 정체였다. 우석에서 얼의 부상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이 네 사람의 관계를 한층 더 가깝게 만든 것이다.
"차번호는 적어놨냐? 잘했다. 우선 박 회장님을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놈들을 찾아보자. 석이 네가 또 수고를 해줘야겠다."
청년들이 사라지자 아라와 우석이 박석제를 부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박석제는 정신을 차렸고, 우석의 부상도 그리 심해 보이진 않았다.
얼의 계획은 간단했다. 두목은 가짜 일기장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고, 대신 아라가 알아낸 차번호로 그들을 추적할 생각이었다.
"알았어. 걱정하지마. 그런데 할아버지는 무사할까?"
우석은 부상을 당했는데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층 더 성숙해 보였다.
"일기장과 훈장이 우리 손에 있는 한 무사하실 거야."
얼은 경찰 출신답게 범죄자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일기장과 훈장을 빼앗을 때까지는 김 노인을 해치진 못할 것이다.
"우리가 갈 때까지는 무사하셔야 할 텐데. 뭐해? 가지 않고. 빨리!"
"자식, 그렇게 걱정되면 평소에 잘하지. 후후후! 아... 알았어. 가자!"
우석이 노려보자 얼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잠시 후, 일행을 태운 차는 골목을 벗어났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 등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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