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국민의 힘 (제70회)

제 8 부 - 친일언론

등록 2001.10.26 20:29수정 2001.10.2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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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뒤편의 한 건물. 한 시간 전쯤 두 대의 구형 그랜저 승용차에서 내린 10여명의 청년들이 건물로 올라갔다. 그리고 조금 뒤 수입 고급승용차가 도착하더니 두 명이 내렸다. 우습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우람한 체구에 검은 색 옷을 입고, 또 검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건 가슴에 '난 깡패입니다'라고 적힌 명패를 달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들어가고 5분 정도가 지나자 건물 전체가 시끄러웠다. 비명소리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부서진 기물들이 창문을 뚫고 길가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 정도면 주위 상인들이 경찰에 신고할 법도 하다. 헌데 흔히 있는 일인지 그들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소란의 진원지는 5층의 제일 구석에 위치한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의 입구에는 '청운개발주식회사'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이 따위로 일하려면 차라리 접시 물에 코를 처박고 뒈져라. 뒈져!"
사무실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집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청년들은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아까 청년들을 인솔했던 두목의 모습도 보였다. 그 역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코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얼굴은 붕어빵처럼 퉁퉁 부어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두목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 그는 행동대장이었다. 진짜 두목은 그의 앞에 서 있는 삼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두목의 옆에는 보디가드인지 덩치가 큰 사내가 턱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저는 그게 일기장인 줄 알고......."
행동대장은 변명을 하려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필이면 그 때 두목의 눈과 마주친 것이다.

"야, 이 새끼야! 네 놈은 글도 읽을 줄 모르냐? 도대체 뭘 보고 이게 일기장이란 말이냐? 아이고, 이걸 그냥!"
"죄... 죄송합니....... 크윽!"
행동대장은 괜히 말 한 마디를 잘못했다가 매만 벌었다. 이번에는 복부였다. 그 큰 덩치가 발길질 한 번에 뒤로 벌렁 넘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물론 곧바로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한 대 더 맞을 게 뻔한데 누가 일어나겠는가?

두목의 감정은 폭발 직전이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죄 없는 가짜 일기장만 찢어댔다. 그것은 김 노인이 환자들의 치료 내용을 기록한 일지였다. 행동대장은 일기장을 찾았다는 기쁨으로 미처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내가 저런 놈을 행동대장으로 두고 있으니 맨날 영등포 놈들에게 씹히지."
행동대장이란 조직의 대소사를 도맡아 하는 두목의 오른팔이다. 그런 자가 어이없는 실수를 했으니 두목이 화가 날만도 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도대체 어떤 놈들에게 당했다는 거야?"
두목은 간신히 감정을 가라앉히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게...... 실은 저희들도 처음 보는 놈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찰인 줄 알았는데."
"경찰! 그런데?"
두목은 경찰이란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한 놈이 면도칼을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쪽 계통인 것 같기는 한데......."
"면도칼? 그럼 저놈들의 얼굴이 그 놈에게 당한 거란 말이냐?"
두목은 말을 하면서 부하들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일회용 밴드가 붙어 있었다. 물론 면도칼에 당한 거라 상처가 깊진 않았다.


"예!"
"주먹까지 쓸 줄 아는 소매치기라? 그런 놈이 있다는 소린 듣지 못했는데. 그리고 다른 놈은?"
두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면도날은 지금껏 한 번도 싸움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조직폭력배들 사이에서 그의 실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놈은 우리 계통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형사 냄새가 조금 나긴 한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행동대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은 무술 실력은 뛰어나지만 형사도 아니고, 깡패는 더 더욱 아니었다.

"그럼 뭐야? 도대체 네 놈이 아는 게 뭐냐? 어휴! 저걸 그냥 확! 야, 이 새끼야. 그럼 선금으로 3천이나 받았는데 나보고 모두 토해내란 말이냐? 아니면 네가 토해낼래?"
보아하니 두목은 일기장을 찾아준다는 조건으로 의뢰인으로부터 선금을 받은 모양이다. 헌데 지금 그의 수중에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가 돈이 없는 건 형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자랑이다. 이 자식아! 아이고, 이것들을 그냥. 뭐해, 나가지 않고. 돈이 없으면 놈들이라도 잡아와야 할 게 아냐!"
"와장창창......!"
겨우 참았던 두목의 감정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재떨이고 의자고 주위에 보이는 것은 모두 던졌다. 청년들의 움직임은 싸울 때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커다란 덩치들이 한 군데도 맞지 않고 모두 문을 빠져나갔다.

헌데 그들은 곧바로 다시 들어왔다. 그것도 비명까지 지르면서 말이다. 무슨 영문인지 네 명이 한꺼번에 가슴을 부여안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들의 가슴에 신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 중에는 행동대장도 끼어있었다. 가장 먼저 도망가다가 당한 것이다.

잠시 후 얼과 면도날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박석제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이곳으로 왔다. 차량번호를 추적했기 때문에 장소를 찾는 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노... 놈들입니다."
행동대장은 땅바닥을 굴러 두목 쪽으로 다가갔다.
"한 놈은 다쳤다고 했잖아!"
"그건 사실입니다. 그 때는 분명....... 으악!"

"병신 같은 새끼!"
이번에는 두목의 오른발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정통으로 맞았는지 코가 터져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이미 한 번 터졌던 곳이라 피의 양이 엄청났다.
"한꺼번에 덤벼라! 밀리지 말고! 밀리면 절대 안 된다."
두목은 대장답게 상황 파악을 잘했다. 얼과 면도날이 휘젓고 다니도록 놔둬서는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리봉동에서처럼 에워싸서 집중 공격을 해야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병신 새끼들, 물러서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야, 도끼! 왼쪽을 막아야지. 아이고, 저 멍청한 새끼."
두목은 고함치며 독려했지만 부하들은 하나 둘씩 자꾸만 쓰러져갔다. 원인은 얼이었다. 그의 몸놀림은 두 시간 전과는 천양지차였다. 그 때는 청년들의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했지만 지금은 그들보다 먼저 파고들었다. 특히 집기들을 이용한 그의 공격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책상이나 의자의 나무 부분을 발로 차면 그 부분이 부서져서 청년들의 얼굴과 몸으로 날아갔다. 나무가 부서질 정도의 파괴력이니 날아가는 속도가 오죽하겠는가? 만약 손이나 얼굴에 맞았으면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다행히 얼은 몸에 맞춰 주춤거리게만 만들었다. 공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청년들이 나무에 맞아서 주춤거리면 발과 주먹으로 완전히 쓰러뜨렸다. 모든 동작들이 전광석화처럼 이어져 순식간에 네 명이 더 쓰러졌다. 면도날이 두 명을 쓰러뜨렸으니 이제 두목과 그의 부하만이 남은 셈이었다.

"빨리 끝내자!"
얼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두목은 자신이 맡고, 그의 부하는 면도날이 상대했다.
"어딜!"
두목은 뭔가 좀 달랐다. 그는 뒤로 물러나 얼의 발을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반격을 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갔다. 헌데 그게 실수였다. 얼은 그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공격을 하는 척하면서 한 바퀴 돌아서 재차 공격을 했다.

"크악!"
얼의 발꿈치가 그대로 그의 턱을 가격했다. 회전하는 속도에 체중까지 실렸으니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으으으......."
턱이 돌아갔는지 두목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우두두둑! 휴우!"
얼이 다가가 그의 턱을 원위치 시키자 겨우 숨을 쉬었다.

"꿇어!"
그가 간신히 일어서자 이번에는 면도날이 나섰다. 그도 방금 두목의 부하를 제압했다. 원래 폭력배의 세계에서는 싸움에서 지면 무릎을 꿇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규칙이다. 면도날은 그걸 요구한 것이다.

이럴 때는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처음부터 느슨하게 다루면 원하는 대답을 얻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면도날도 범죄 세계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두목이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곧바로 그의 발이 움직였다.

"크아악!"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두목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나뒹굴었다.
"이 새끼, 소리만 요란하고 속이 텅 빈 걸 보니 완전 깡통이구먼. 내한테 엄살은 통하지 않는다. 안 일어나? 난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퍽!"
"크아악!"
면도날은 연속해서 세 번을 찼다. 그러자 두목은 마치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났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자식,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자신의 역할이 끝나자 면도날은 뒤로 물러났다. 대신 얼이 앞으로 나섰다.
"요즘 을지로에서 설치고 다닌다는 놈이 바로 너냐?"
"으악!"
또 다시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대답이 늦은 대가였다.
"예! 그렇습니다! 이름은 전윤삼이고 별명은 쌈닭입니다."
두목은 전의를 상실했는지 묻지도 않은 말까지 했다. 아마 지금부터는 대답이 술술 나올 것이다.

"쌈닭이라? 너, 옛날에 응암동 용래 밑에 있었지?"
다시 면도날이 나섰다. 그는 전국의 조직폭력배 계보를 꿰고 있었다.
"예에? 그걸 어떻게......."
'도대체 이놈들의 정체가 뭘까? 절대로 영등포 놈들은 아니다.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용래 형님보다 하수는 아니다. 잘못하다간 뼈도 못 추릴지도 모른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면도날이 한 때 자신의 보스였던 사람을 동생처럼 말하자 두목은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응암동의 용래파는 한 때 강북지역을 주름잡았던 폭력조직이다. 몇 년 전 조직폭력배 일제 단속기간에 두목이 잡혀 들어가자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새로운 조직들을 만들었다. 쌈닭도 그 때 여기에 용역회사를 차리고 뿌리를 내렸다.

그들이 하는 일은 다양하다. 재개발지구 철거, 사채놀이, 심부름 센터, 선거 브로커, 청부업 등이다. 최근에는 청부업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채무자들을 협박해서 돈을 받는 일이 제일 많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알고 있겠지?"
얼은 그의 얘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질문만 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아...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두목은 또 맞을까봐 몸을 움츠리며 대답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있겠군."
"......."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실 그는 두 사람이 자신을 찾은 이유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 대답이 금방 나올 리가 없었다.

"으악!"
이번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몸을 최대한 웅크려서 방어를 했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발이 날아왔다. 어느새 면도날이 그의 뒤에 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마지막이다. 만약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 네 놈의 몸뚱이는 한동안 하늘에 떠 있게 될 것이다."
그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쌈닭에게는 그건 죽여버리겠다는 말보다 더 무섭게 들렸다. 면도날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얼에게 미소를 보냈다.

"호... 혹시 그 영감쟁이 때문에 오셨습니까? 그게 아니면......."
얼이 대꾸를 안 하자 두목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영감쟁이? 후후후! 이 새끼가 죽고 싶어서 댄스를 추고 있군. 좋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얼은 흥분해서 두목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그러자 쌈닭의 몸은 인형처럼 허공에 떠오른 채 창가로 이동했다.

"큭큭큭! 사... 살려주세요. 제발!"
놀라운 일이었다. 얼의 덩치는 쌈닭의 2/3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는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쌈닭을 들어올렸다.
"네 놈이 영감쟁이라고 부르는 분이 바로 나와 저 친구의 할아버지시다. 어디 한 번 더 그렇게 불러봐라. 어서!"
쌈닭의 몸은 이미 반쯤 창 밖으로 나가 있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스....... 커어억!"
얼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두목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떨어지기도 전에 숨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그만해! 그래도 이 놈이 있어야 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잖아."
만약 면도날이 조금만 더 늦게 말렸어도 쌈닭은 기절했을 것이다. 얼마나 놀랬는지 그의 하체는 오줌으로 완전히 젖어 있었다.

"컥! 컥! 컥! ......!"
충격 때문에 쌈닭은 풀려난 뒤에도 한동안 기침을 해댔다.
"좋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내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시냐?"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그냥 청부를 맡았을 뿐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쌈닭은 혹시나 얼이 믿지 않을까봐 안절부절, 공포에 떨었다.

"그래? 그럼 할아버지를 납치한 게 네 놈들이 아니란 말이냐?"
"그건 맞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좋다. 그것도 양보하지. 그럼 청부를 한 놈들이 누군지는 알겠지?"
"그것도......."
쌈닭은 대답을 끝까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김 노인의 소재는 물론이고, 청부자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하느냐?"
"그건......?"
이번에는 아예 고개조차 들지도 못했다. 그는 '의뢰인들만 연락을 취하게 되어 있다'고 말할 참이었다. 헌데 그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약간 달랐다. 뭔가 자신이 없는 눈치였다. 얼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3천만원짜리 거래를 하면서 비상연락망이 없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두 사람은 이들이 하는 말을 밖에서 모두 들었다. 이렇게 되자 두목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졌다.

"알고는 있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하나 주워서 건넸다. 쌈닭은 할 수 없이 다이얼을 눌렀다. 곧바로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렸다. 헌데 상대편에서 받질 않았다.
"죄송합니다. 연락이 안됩니다."
그는 핸드폰을 다시 얼에게 넘겼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묘했다.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핸드폰이 고장났을지도 모르니 전화기로 해봐라."
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행동대장이 땅바닥에 구르고 있는 전화기를 들고 왔다. 신호가 들리는 걸 보니 고장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두목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하지만 다이얼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도 상대편에서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였다.

"후후후! 그럴 테지. 그럼 어디 내가 한 번 해볼까?"
이번에는 아예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번호를 한 번 불러 봐."
"예에?"
갑자기 쌈닭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뭐해? 부르지 않고? 그새 번호를 까먹었나?"
"그게 아니고.......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011-****-****입니다."
쌈닭은 마지못해 번호를 말했다.
"그것뿐이야?"
"예! 하나뿐입니다."

"그래? 헌데 넌 왜 두 번 다 다른 번호를 눌렀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 분명히 같은 걸로 눌렀습니다."
두목은 제법 당당하게 나왔다.
"좋아! 그럼 이건 누구 전화번호지?"
얼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대신 청년들을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어이 자네, 그래. 일어나서 핸드폰을 소리나게 해봐!"
그는 제일 구석에 있는 유난히 덩치가 큰 청년을 가리켰다. 그러자 청년이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진동을 벨소리로 바꿨다.

"삐리리릭! 삐리리릭! ......!"
얼이 번호를 누르자 청년의 핸드폰에서 소리가 울렸다.
"다음은 자네. 난 지금 몹시 급하다. 빨리 끝내자."
두 번째 청년이 미적거리자 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청년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후후, 이 정도면 나도 하산해도 되겠지?"
청년의 핸드폰에서도 벨이 울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야기는 의외로 간단했다. 두목은 처음부터 얼을 속일 생각이었다. 헌데 아무 번호나 눌렀다가 상대가 전화를 받으면 곤란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부하들의 핸드폰 번호를 누른 것이다.

부하들은 자신과 있을 때는 항상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놓고 있다. 두 개를 누른 것은 너무 긴장한 탓에 앞서 누른 번호를 까먹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문제는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진동이 울리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얼이 감지한 것이다.

"이얍!"
그 때였다. 두목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얼을 향해 달려들었다. 얼은 이번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를 뒤로 제치더니 두 손으로 쌈닭의 손목을 잡았다.
"으아아악! 내... 내 팔! 아아악......!"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두목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손목은 여전히 얼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우두두둑!"
얼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손목을 좌우로 비틀어 버리자 부러진 뼈가 어긋나며 일부는 살을 뚫고 밖으로 삐져 나왔다. 이렇게 되면 설사 병원에서 치료를 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정상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얼은 적당히 겁을 줘서는 원하는 대답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사실 두목으로서는 청부자에게 위약금을 물어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청부업에서 도태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비밀을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부하들로부터도 배척 당하는 것이다. 물론 주먹 세계라고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대장이 비겁한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하극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쌈닭은 겁먹은 척하면서 기회를 노린 것이다.

팔을 비트는 순간 얼의 눈에서는 강렬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두목은 그것을 보면서 뒤늦게 자신이 실수를 깨달았다. 20년 넘게 주먹 세계를 주름잡던 쌈닭도 그렇게 살벌한 눈빛은 처음 보았다.

"너희 둘, 그래. 이리 나와 봐."
얼은 쌈닭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서 있던 두 명을 불러냈다.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저런 놈을 두목으로 모셨다간 쪽박차기 일수다. 던져버려라."
"예에?"
청년들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바보 같은 놈들, 그럼 앞으로도 저놈을 계속 두목으로 모실 거냐? 기회를 주려 했더니 싫다면 할 수 없지. 들어가라."
얼은 이번에도 심리전을 펼쳤다. 단지 상대가 쌈닭에서 부하들로 바꿨을 뿐이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아... 아닙니다.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태도가 돌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쌈닭은 더 이상 두목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다음 두목이 누가 되느냐하는 것이었다. 모든 동물세계가 그렇듯이 주먹세계에서도 전임 두목을 몰아내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쌈닭은 던지는 두 부하가 그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들은 즉시 쌈닭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주저하거나 겁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들로서도 더 이상 두목에게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봐 주거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혀... 형님! 말씀드리겠습니다. 011-****-****입니다. 정말입니다. 직접 걸어보십시오."
다급해진 쌈닭이 곧바로 전화번호를 불렀다. 보통 사람이 그 정도로 다쳤으면 말은 고사하고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쌈닭은 고통을 느끼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눈이 초롱초롱했다. 얼은 대답대신 면도날을 쳐다보았다. 자연스럽게 모든 시선이 면도날에게 집중되었다.

"좋다. 한 번만 더 믿어보지. 하지만 이번에도 아니면 네 놈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면도날이 고개를 끄덕이자 얼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곧바로 쌈닭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록 2-3초의 짧은 순간이지만 그에게는 지옥과 천당을 수백 번도 더 왔다갔다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신호가 두 번 울리자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청운개발의 전 사장입니다."
"아! 전 사장. 그래, 부탁했던 건 찾았소?"
"하하하! 물론이지요. 제가 누굽니까? 을지로의 쌈닭입니다. 쌈닭."
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조금 전의 모습이 먹이를 앞에 둔 야수라면, 지금은 간도 쓸개도 다 빼놓은 간신배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쌈닭을 위시한 깡패들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수고했소. 그럼 당장 보내주시오."
"하지만......."
"아! 잔금 때문에 그러시오? 그건 염려 마시오. 물건을 받는 즉시 계좌에 입금하리다."
"하하하! 약속은 잘 지키시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물건은 보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건을 보내기 어렵다니? 이것 보시오. 전 사장! 그게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은 무슨 말이야? 내가 물건을 보내기 싫으니까 그렇지."

"뭐라고? ...... 넌 누구냐?"
그제야 상대편에서는 얼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챘다.
"나? 네가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물건이라면. 일기장 말이냐?"
"잘 아시는구먼. 그런데 말이야. 이윤수가 누구지? 이 사람 일제시대에 대단한 일을 했더군.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면 볼만하겠지? 특히 조국신문에 말야."
"......."
얼이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데도 상대편에서는 대꾸조차도 못했다.

"전화 받는 사람 어디 갔어? 더 이상 나랑 통화하기 싫은 모양인데, 그럼 곧바로 다른 신문사로 갈까?"
"잠깐! 원하는 게 뭐냐? 돈이냐?"
상대는 얼이 일기장을 가지고 협박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긴 쌈닭이라도 일기장의 원본을 봤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후후후! 그렇다면 얼마나 주시겠소? 1000억? 아니지 조국일보의 가치를 생각하면 적어도 그보다 몇 배는 더 받을 수 있을 거야."
천억이란 말에 상대편에선 다시 침묵을 지켰다. 사무실에 있던 쌈닭과 그 부하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과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들은 일기장이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
그 때야 상대편은 얼이 단순한 협박범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만약 얼이 협박범이었다면 천억이란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쪽이 더 잘 아실 텐데."
다시 침묵이 흘렀다.
"으음,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10분 후에 전 사장의 전화로 연락을 하겠다."
상대방은 눈치가 빨랐다.

"좋으실 대로."
얼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불과 5분도 되지 않아서 쌈닭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건 상대편이 다급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얼은 벨이 계속 울리도록 놔뒀다. 일곱 번이 울린 뒤에나 받았다.
"여보세요."
다시 그의 변신이 시도되었다. 그는 어느새 과묵하고 차가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영등포......."
"잠깐!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장소와 시간은 내가 정한다."
얼은 승부사적 기질이 있었다. 그는 한 번 기선을 제압하자 쉽게 밀리지 않았다.
"좋다. 말해라."
"후후후! 네가 정하는 장소와 시간에 만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뭐... 뭐라고?"
얼은 상대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착각하지 마라. 네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니까. 싫으냐? 그러면 안 해도 된다."
"장소는 영등포시장 끝에 있는 야채 창고에서 저녁 아홉 시다."
상대방은 얼이 전화를 끊을까봐 황급히 약속장소와 시간을 말했다.
"좋다. 그리고 그 분은 무사하시겠지?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너희들이 져야 할거다."
"걱정하지 마라. 영감은 무사하다."
"네 말이 사실이길 바란다. 그럼 그 때 보자."
"흐흐흐, 그래, 네 놈들을 위해서라도 사실이길 바란다."
얼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혼자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갈수록 강해졌다. 이제 쌈닭을 비롯한 깡패들은 무서워서 아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가자!"
그는 면도날을 힐끔 쳐다보더니 먼저 나가버렸다. 대신 면도날이 쌈닭을 향해 한 마디 했다.
"내일부터 사무실 간판이 붙어 있다든지, 다니다 네 놈들의 상판때기가 보이면 그 땐 각오해야 할 게다."
그 말을 끝으로 면도날도 사무실을 나섰다. 그 날 이후 쌈닭을 위시한 부하들의 모습은 서울에서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 등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편집자 주)

덧붙이는 글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 등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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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입하게 된 이유는 조중동의 언론독점의 폐혜를 극복하려는 오마이뉴스의 노선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자회원제를 통한 다양한 의견 수렴방식에 공감한다. 2. 나의 생각(소설, 사회비평)을 표현할 매체가 필요했다. 물론 다른 매체도 있지만 본인의 정치노선과 비슷하고, 글쓰기에 제약을 받지 않는 오마이뉴스를 선택하게 되었다. 3. 노동, 사회단체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얻은 경험으로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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