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날강도! 시한부 인생 앞의 돈타령

[잊을 수 없는 승객 1] 한 택시기사의 고백

등록 2001.10.30 10:15수정 2001.10.3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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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택시운전을 시작한 지 보름쯤 됐을 무렵, 새벽 3시경이었다. 30대 중반의 남녀가 차를 세웠다. 여자를 먼저 태운 남자는 내게 장거리 요금인 3만 원을 미리 지불했다. "xx까지 잘 좀 모셔요!" 남자는 이미 탑승해 있는 여자에게 알 듯 모를 듯한 표정과 함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작별의 의식을 대신했다. 그 남자가 지은 묘한 표정의 의미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지 불과 1분이나 되었을까, 난데없는 통곡소리에 하마터면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룸미러에 비친 그녀는 오열하고 있었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안개가 슬슬 끼기 시작했던 터라 차를 갓길에 세우기도 좀 애매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오열이 잦아들기만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통곡하던 서슬에 비해 빨리 안정을 찾았다.
"미안해요, 아저씨! 너무 슬프고…, 너무 억울해서…. 아, 이건 정말 불공평해요!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얘기였다. 스치는 가로등처럼 별의별 상상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섣불리 내막을 캐묻는다는 것도 여러 모로 망설여졌다. 잠시 후, 자못 숙연해진 분위기를 자아낸 게 계면쩍었던지 그녀는 스스로 얘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한결 나아졌다. 대충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그녀는 부양가족이 많아 결혼도 미루고 주로 식당 일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고된 나날이었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있어 이제 좀 있으면 어떤 결실을 맺게도 되었단다. 다만 한 가지, 늘 속이 불편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사촌오빠(택시를 태워준 남자)의 권유로 전날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는데, 결과는 말기 위암! 2달밖에 살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는 그만 절망감에 내리 술을 마시다 이제 돌아가는 길이란다.

나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담담히 얘기를 마친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도 더욱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나저나, 아저씨 영업은 잘되세요? 이렇게 밤늦게 일하시면 그래 얼마나 피곤하세요?" 시한부인생으로의 판정을 받은 상황에서 남을 생각해주다니! 통곡을 접하는 순간 떠올렸던 몇몇 불순한 상상들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배운 온갖 위로의 말들(나중 돌이켜 보니 참으로 어쭙잖은)을 두서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녀는 간간이 동의를 표하면서 나의 위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때로는 엷은 미소까지 띄우기도 했다.

불편했던 내 마음은 이제 뭔가 할 일을 했다는 은근한 자긍심으로 한결 밝아졌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썩 괜찮은 택시기사로 남을 뻔했던 나의 행동은 전혀 예기치 않은 기상현상으로 인해 그만 본색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거리 상으로 절반 정도 왔을까, 내내 우려하던 안개가 급작스레 짙어지기 시작했다. 왜 이맘 때쯤이면 으레 전국의 교통사고율을 증가시키는 그 안개 있잖은가. 순식간에 고속도로는 잘해야 50미터의 시계(視界)만이 확보된 채 그야말로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시속 120킬로의 속도를 60킬로대로 확 떨어뜨린 채 나는 온 신경을 도로에 집중해야 했다. 자연 그녀와의 대화는 건성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그녀 쪽에서도 안전을 고려했음인지 스스로 말을 자제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행선지는 보통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어가다간 거의 곱빼기로 걸릴 것 아닌가. 그녀와의 대화도 끊긴 터였고 내 본연의(?) 직업의식이 슬슬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이러면 내 손해가 막심한데…. 어느덧 나는 그녀가 막다른 인생이란 걸 잊어가고 있었다.


사실 택시의 장거리요금은 그 이동거리보다 실지로 소요되는 시간을 더 중시해 매기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다. 겨울철 폭설이 내렸을 때 대체로 이 관행이 적용되며, 평소 요금에 비해 다소 올려 받더라도 승객들이 승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관행이 그렇더라도 예외가 있는 법, 기껏 초보 택시기사인 주제에 내 머릿속은 그런 야비한 계산만으로 꽉 차 있었으니….

가까스로 목적지인 xx읍 초입에 들어섰을 때는 평소 소요시간보다 40분이나 초과되어 있었다. 다행히 읍내 진입도로부터는 시계가 훨씬 좋아진 덕분에 그녀와의 대화가 수월해졌다.
"저, 그런데 말이죠. 요금을 좀 올려주셔야 되겠는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나는 '관행'과 추가요금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정말 죄송한데요, 지금 가진 돈이 하나도 없고 또 집에 가도 마찬가지예요. 어제 아침에 곗돈 내느라 있는 돈을 다…."
나는 순간 짜증이 났다. '아니, 집에 돈 만 원도 없다니. 내가 '따블'로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돈 만 원만 더 얹어달라는 건데, 누굴 바보로 아나!'

이제 나는 그녀의 처지는 완전히 망각한 채 점점 싸가지(?) 없는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지 마시고, 그럼 누구 아는 사람 없어요? 그 사람한테 꿔서라도…."
"아유, 지금이 몇 신데 그런 얘길 하세요. 그냥, 좀 있으면 죽을 사람(내가 이 말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적선한다 생각하시고 이해해 주세요, 네?"

차가 읍내에 들어서자 그녀가 세울 곳을 지적했다. 나는 참았던 담배부터 거칠게 꺼내 물었다. 내 인상이 두려웠던지 그녀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사정했다.
"아저씨, 곧 죽을 마당에 제가 만 원을 아끼겠어요? 한번만 이해를 해주세요. 제가 돈은 더 못 드려도 안전하게 돌아가시도록 기도할게요!"

'쳇, 방법이 없구먼! 장거리 뛴 걸로 만족하자.' 아마 그리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에이, 참!'을 연발하면서도(다행히 욕설은 내뱉지 않았던 것으로 확실히 기억한다) 속은 그다지 쓰리지 않았다. 알겠으니 그만 하라는 퉁명스런 말을 던지고, 정말 조심해서 가시라는 그녀의 인사도 건성으로 받으며 읍내를 빠져나왔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다만 차를 돌릴 적에 백미러로 흘낏 본 그녀가 도로에 그저 서서 이편을 바라보던 장면만큼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귀로의 고속도로는 여전히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나는 진땀으로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잠에 빠졌다. 눈을 뜬 건 교대시간이 가까워 오는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그런데 피곤이 가셔서일까, 아니면 시간의 흐름이 나를 제 위치에 갖다 놓은 걸까. 불현듯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마지막 몇 장면을 제외하곤 너무도 뚜렷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간신히 교대기사에게 차를 인계해주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나는 날강도다! 아니, 날강도만도 못한 놈이다!' '그깟 돈 만 원에, 그깟 돈 만 원에!'하는 자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여태껏 읽어온 책들은 다 무어며, 늘 상식과 기본적 소양만큼은 유지하고 산다는 자부심은 다 무어며, 또 이해타산적인 사람들에 대한 평소의 질타는 다 무어란 말인가. 시한부인생 앞에서 돈타령이나 하는 터수에. 방바닥이 푹 꺼지는 환상이 보였다. 다시 교대시간이 돌아왔을 때, 나는 영업을 포기하고 포장마차로 가 곤죽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다.

정확히 사흘 뒤, 공교롭게도 나는 그녀에게 했던 몹쓸 짓을 만회(?)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 얘기는 다음 기사로 이어진다. 하지만 내 딴에 만회를 했다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녀가 받았을 상처에 비한다면 얼마나 턱없는 보상인가 말이다. 그런 이유로 다소 늦었더라도 또 실현불가능할지라도, 이미 고인이 되었을 그녀에게 정말 미안했었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이렇게 만인 앞에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것만이 진정한 속죄의 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마음씀씀이로 미루어 틀림없이 하늘나라에 가 있을 그녀지만, 당시엔 얼마나 야속하고 슬펐을까. 가슴이 저려온다. 부질없는 희망일지 모르겠으나, 신의 가호 아래 천만다행으로 오진(誤診)으로 판명되어 혹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조금은 내 마음이 편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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